드라마는 내가 만든다 (2)
회의가 끝나고 잠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인도를 걸으며 형택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준형이냐? 왜 무슨 일이야?]
"김 실장 연락받았어요?"
[어 받았어. 지금 애들 다 집합시켜서 단장시켜서 데려가려고 한다.]
"형. 우리 애들 2집 활동할 때 입었던 개인별 의상 있잖아요. 단체복 말고···. 멤버별로 특성에 맞게 맞췄던 거요. 그거 입혀서 가세요."
[응? 그거 스타일리스트 불려야 하는데? 무대도 아니고 촬영하는 곳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
"네. 무조건 제 말대로 하세요. 그래야 캐스팅될 가능성이 커질 겁니다."
[그, 그래? 네가 그렇게 강하게 나오니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무조건요. 진짜예요."
[그래 알았어.]
나는 전화를 끊고 근처 카페로 들어가 과일주스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TVM 김호진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작가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할 거냐고 지금 위에서 난리입니다.]
"그러니 감당하지도 못하실 걸 왜 지르셨어요."
[뭐 제가 약간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 꽂히면 돌진하는 거 아시죠?]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왠지 모르게 한길만 걷는 외골수 장인이 떠올랐다.
"일단 XM Ent.에서 곧 만나자는 전화가 갈 거예요."
[XM Ent.라면 어제 작가님이 오늘 아침에 연락해보라고 했던 아이돌 소속사잖아요.]
"아이돌도 말고 거기에 여배우도 있습니다."
[여배우요···? 제가 이런 건 약해서요. 어디 회사에 누가 있고 이런 걸 잘 모릅니다.]
'정말 만드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
"이러시면 아시겠죠. 최근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던···."
[설, 설마···. 혹시···!?]
"맞습니다. 나유정 씨에요."
[아니···. 상상도 못 했던 거물이···. 아니 유정 씨가 왜 이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하는 거죠?]
완전히 의외의 인물이 나오자 급격하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김호진 PD였다.
"왜겠습니까? 대본을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출연하기로 마음을 먹은 거죠."
[저, 정말인가요? 꿈은 아니겠죠?]
"리얼한 현실입니다. 곧 전화가 갈 거니 당장 약속 잡으세요."
[네···. 그리고 제가 알아야 할 다른 사항은 없나요?]
"유정 씨는 계약과 관련해서 세부적으로 까다롭게 굴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XM Ent.가 계열사기도 하고요.“
“다만 출연료는 내부적으로 논의하셔서 대우 좀 해주세요. 사실 그거 말고는 큰돈 들어가는 게 없고 뮤직넷하고 CA 미디어 세트, 소속사 건물 이용하면 제작비가 싸게 먹히잖아요."
[그, 그렇죠. 아마도 윗선에 나유정 씨가 주연으로 나온다고 이야기하면 난리 날 거 같습니다. 연기력과 흥행 파워를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니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유정 씨 드라마 복귀를 바라는 팬들이 엄청나게 많을걸요. 굳이 팬이 아니더라도 기대를 많이 할 겁니다."
[휴···. 갑자기 유정 씨가 하겠다고 하시니 제가 약간 긴장되는데요?]
"긴장 안 하셔도 되요. 친절하진 않아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작가님···. 죄송한데요. 도대체 유정 씨는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그거까지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그냥 어쩌다 보니 사정을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렇군요. 아 참. 테리우스는 어떻게 하죠? 작가님 말씀대로 연락은 하긴 했는데 연기력은 어떨지 살짝 걱정되네요.]
"메인 역할을 할 남자 주연인 한연준은 연기를 꽤 잘합니다."
[네. 그건 저도 알죠.]
이 양반 지금 살짝 걱정하는 것 같다. 사실 나유정이 나온다고 하면 유명한 아이돌들이 저렴한 몸값으로 줄줄이 출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니까.
"만약 잘 안되면 같은 소속사인 유정 씨가 연기를 지도할 겁니다."
[네? 진짜요?]
"진짜예요. 연준 씨뿐만 아니라 다섯 명 전부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피디님이 아이돌 쪽을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요. 한팀을 온전히 캐스팅하는 게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하는 길입니다. 합을 맞춰볼 필요가 없이 바로 투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노래도 그냥 테리우스 애들 노래를 쓰면 되고요."
[아···. 시간 절약하려면 괜찮은 방법이긴 하네요.]
"그리고 아마도 테리우스 멤버를 보시면 왜 제가 그 그룹을 선택했는지 단박에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허 참···. 이거야 원. 어제부터 도대체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지금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요.]
"후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피디님이 테리우스를 딱 보고 마음에 들어서 캐스팅하려고 하더라도 위에서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네. 그럴 수도 있죠.]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일종의 기획사 패키지 개념이라고 설명해주세요. 나유정 받고 테리우스는 끼워 넣기라고 말이죠."
크흠... 그래도 끼워 넣기 무시하지 마라. 외모로 뽑은 남돌 1위라고!
[네. 일단 연락이 오면 오늘 오후에 미팅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감사는요 무슨···."
[아닙니다. 진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잘 만들어서 작가님이 애써 주신 것을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야 잘 만들어지면 좋은 거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나유정 씨 캐스팅해드렸는데 원고료 좀 올려주세요. 회당 2백만 원만 올려주세요. 제가 신인인걸 고려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으음···. 작가님이 이렇게 손수 발로 뛰셨는데 제가 그거라도 좀 도움을 드려야죠. 꼭 관철을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D님 아무쪼록 무탈하게 계약이 전부 진행됐으면 하네요."
[이제부터 제가 힘을 내야죠. 죽을 각오로 뛰겠습니다.]
"죽지는 마시고요. 흐흐···."
전화로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전부 다 처리했다. 뭔가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반 정도 남은 딸기 키위 주스를 들어 쭉 들이켰다.
"크···. 달달하군. 오늘 일처럼 말이야."
이렇게 나서서 머리를 짜내며 상황을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이리저리 안 뛰어도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 내고 입상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고 상금도 받아서 드라마 제작도 알아서 하게 해도 됐다.
하지만 나유정과 우리 테리우스 애들을 생각하면 피곤하더라도 꽤 보람된 일일 것 같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던가!
테리우스는 1티어로 올라가고 나유정은 에너지를 얻고 힐링을 하는 코믹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나랑 아는 사람들이 잘된다면 그거 또한 나름 보람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 작품에 다른 배우가 주연을 맡아서 연기하고 그 드라마를 나유정이 봤다면 엄청나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한연준하고 키스 장면까지 있는데?
'하여간 내 오지랖도 참···. 쯧···.'
카페를 나와 회사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니 나유정에게 톡이 왔다.
[나유정 : 어디에요?]
[이준형 : 가수팀 사무실입니다.]
[나유정 : 저 심심한데···. 하 실장님이랑 같이 있는 것도 좀 그렇고···.]
[이준형 : 아! 그럼 여기로 오세요. 여기가 어디냐면···.]
나는 공용 PC에 앉아서 연예 기사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많이 본 뉴스에 톱스타 이상진이 성폭행으로 고소당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특종 - 복귀 준비 중이던 톱스타 이상진 성폭행으로 고소당해]
한류스타 이상진(30)이 1주일 사이 세 명의 여성에게 잇달아 성폭행 혐의로 고소를 당하면서 연예계가 들썩이고 있다.
지난 1일 고소장을 낸 여성은 총 세 명으로 초대형 사건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인터넷에선 한류스타의 충격적인 성추문으로 최근 많은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 운동과 맞물려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그의 경우 고소한 3명의 여성이 피해를 본 시기는 다르지만, 유흥업소의 룸이라는 장소는 공통점이 있어 여러 가지 추측과 소문이 양산되고 있다. <중략>
한편, 이상진은 최근 TVM의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작인 지옥에서 온 사나이의 주연 배우로 복귀를 준비 중이었다고 알려졌으며 해당 방송국은 현재 관련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대응을 해나간다는 방침이다.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후속 방영작을 교체할 움직임을 보인다고 전해졌다. <중략>
'이제야 터졌구만.'
나는 기사를 읽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의 스캔들이 터졌는데 사실상 후속작 방영은 물 건너 갔다고 봐야 된다.
'슬기로운 덕질 생활을 촬영해서 방영하면 되지. 슬기로운 닥터 생활의 후속작으로 덕질 생활. 캬~ 얼마나 좋아?'
망상에 빠져있는데 사무실 앞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심심하다며 하 실장 방을 탈출한 나유정이었다.
나는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번쩍 손을 들고 흔들었다. 사무실을 쓱 둘러보던 그녀가 나를 보더니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사무실에는 꽤 많은 인원이 근무 중이었다. 가수팀 사무실이 지원팀하고 같이 썼기 때문에 늘 복작복작했고, 배우팀 사무실은 약간 한가한 편이었다. 이런 차별은 배우가 주력인 XM Ent.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유정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 방송국에서 미팅이 있어서 풀 세팅으로 꾸미고 나온 그녀는 역시나 군계일학이었다.
혼자 있을 땐 몰랐는데 여러 사람과 같이 섞이자 그녀의 미친 미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작고 눈코입은 오밀조밀하다. 키는 165cm 정도였는데 비율이 워낙 좋아 키까지 커 보였던 것이다.
배우 얼굴을 자주 볼 일이 없던 가수팀 매니저들까지도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유정은 그런 시선에 꽤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뭐해요?"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모니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내가 보여준 기사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내가 미리 알려준 사실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기사에 관심을 끊고 사무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회사 구조 잘 모르시죠? 아이돌 연습실 보여드릴까요?"
그녀 옆에 바짝 서서 다른 사람들은 안 들릴 크기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며 입꼬리가 씰룩대는 게 포착됐다.
'어이구···. 그렇게 좋은가?'
배우는 관두고 오디션에 나가던지 아예 아이돌을 하는 건 어떨까? 아이돌 메이커에 나가서 훈련생으로 멘토들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는 나유정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얼른 나가자는 신호였다. 거의 15명이 넘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나도 약간 머쓱하긴 했다. 특히 지원팀 순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크흠···. 유정 씨. 나가시죠."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연습생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회의실과 댄스 연습실, 노래 연습실 등을 구경시켜줬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을 고증이라도 하는 듯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어봤다.
특히 댄스 연습실을 보여주니 가장 좋아했는데 이곳에서 아이돌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한다고 하자 그녀가 기분이 좋은지 아이돌 댄스를 슬쩍슬쩍 보여주었다.
'어라? 댄스도 춰?'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아이돌 메이커 2시즌 타이틀곡인 '나야 나'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줬더니 얼굴이 헤벌쭉해져서 나야 나 댄스를 어설프게 추기 시작했다.
잡덕인 그녀의 최애는 '슈퍼노바'였고 두 번째는 이제는 해체한 '101' 세 번째가 테리우스였다. 101의 노래를 틀어주니 아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어이···. 난 무생물이냐? 이 아가씨가 창피함을 모르네.'
아무리 부부끼리라도 방귀를 텄다고 아무 데서나 뿡뿡 대면 그건 예의가 아닌 법. 기본적으로 매너는 지켜야 했다.
아! 물론 우리가 부부란 소리는 아니다.
난 아직도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예쁜 것 빼면 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깨톡" "깨톡"
메시지를 쳐다보니 형택이 형이었다. 테리우스 멤버들이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준 것이다.
"유정 씨! 애들 도착했다네요. 이제 방송국 갈 준비하셔야죠."
내가 그녀에게 테리우스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황급히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헐···."
마치 여고생으로 타임슬립을 한 것 같은 나유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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