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내가 만든다 (1)
내 대본을 보고 심하게 갈등을 겪는 그녀를 보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생각 없으시면 다른 연기자 알아봐야겠네요."
나는 소파에 놓인 대본을 가져가기 위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시만요."
그녀는 나를 몸으로 살짝 밀치더니 대본을 채갔다.
"한번 읽어 보고 의견 줘도 되죠?"
"당연하죠. 엄청나게 재미있을 겁니다."
그녀는 확신에 찬 내 표정을 보고 안심한 듯 캘린더를 힐끗 보더니 소파에 앉았다.
"제가 영화를 찍으면서 너무 고생해서 휴식을 좀 취해야 해요."
생각해보니 이해가 갔다. 그녀는 최 감독의 작품에서 혼신의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체력과 정신력이 방전될 정도로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었으니까.
하 실장이 많은 스케줄을 잡지 않는 건 나름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많이 다를 겁니다. 유정 씨에게 힐링이 되면 됐지 절대 에너지를 빼앗지 않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오히려 충전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답지 않은 나의 농담에 눈을 슬쩍 흘기는 나유정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의견은 내일 주세요."
그렇게 그녀를 뒤로하고 쿨하게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중이었다.
깨톡... 깨톡···
"아들! 아침부터 누가 그렇게 연락하니?"
"누구긴? 나유정 씨지."
"배우 나유정? 언제 또 담당이 바뀐거야? 이제 테리우스 애들은 관리 안 해?"
"완전히 바꾼 건 아니고 둘 다 번갈아가면서 담당해."
"그래? 다행이네."
"엄마. 뭐가 다행이야? 지금 테리우스 애들 못 볼까 봐 걱정해?"
"에이···. 설마 박정숙 여사가?"
형이 국을 한술 뜨며 의문을 표했다.
"너희는 잘 모를 거야. 너희 엄마 맨날 방에서 테리우스 나오는 동영상 모니터한다. 노래를 나도 다 외웠어. 쯧쯧···."
거의 환갑에 가까워져 아버지가 노래를 외우실 정도면 엄청나게 보시는 것 같았다.
"근데 오빠. 나유정이 진짜 그렇게 예뻐? 저번에 한 말은 농담이지?"
"뭐···. 발톱에 때라는 거? 농담 아닌데?"
"오빠 거짓말 좀 하지 마. 진짜 짜증 나."
"주리야. 그냥 정신승리 해도 된다. 뭐하러 내 의견 물어보니?"
"아 씨 진짜!"
깨톡... 깨톡···
"좀 받아봐. 시끄럽네."
"알았어. 나도 출근해야지. 엄마 나 밥 다 먹었어. 일어날게."
나유정은 웬일로 아침부터 나에게 톡을 보내고 있었다.
[나유정 : 아침에 좀 들르세요.]
[나유정 : 일찍 오세요.]
[나유정 : 여보세요?]
[나유정 : 왜 답이 없으시죠?]
[이준형 : 갑니다. 이제 밥 먹었습니다.]
나는 나유정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조 팀장에게 나유정 씨 일로 출근을 바로 마포로 한다고 보고했다.
형택이 형에게서 알았다는 답변이 왔다.
나유정의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빼꼼 열리며 나유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헉···.'
그녀는 날이라도 샜는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평소 집안 복장이라고 추측되던 목 늘어난 티셔츠와 낡은 연두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위로 대충 올려 묶은 똥머리(?) 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는 내 얼굴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다시 대본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크크 흠···. 어제 좀 읽어 보셨어요?"
"네. 전부요."
"예? 그거 분량 많은데. 잠은 언제 잔 거에요?"
"못··· 잤어요."
"잠은 주무셔야죠. 피부 상합니다. 하루만 무리해도 그거 복구하는데 며칠 걸려요."
나유정이 거실 바닥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이구야. 여기 이렇게 앉아 계시지 말고 좀 누워서 쉬세요. 큰일 나요."
나는 앉아있는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아, 아니 이거···."
나유정은 손에 들고 있는 대본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예. 그게 왜요?"
"너무 재밌어요. 하아···."
"하하···. 난 또 뭐라고. 그래서 한숨도 안 자고 그거 읽으신 거에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나는 그녀의 퀭한 눈을 쳐다보았다.
"그럼 출연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끄덕끄덕···
훗···. 자기 이야기를 소재로 각색해서 썼는데 저게 그렇게 재밌나?
"알았고요. 일단 한숨 주무세요. 계약은 잠깐 눈 붙이고 오후에 회사 나가서 처리하면 되니까요."
그녀의 등을 떠밀어 방에 집어넣으려 했으나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이거 작가가 준형 씨라는 거 절대 밝히면 안 돼요. 혹시라도 진짜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깐···."
"알았어요. 알았어. 나도 그거 밝힐 생각 없어요."
나는 그녀를 방에 밀어 넣고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줬다.
"지금부터 4시간 정도 뒤에 깨울 거예요. 대본 좀 그만 생각하고 눈 좀 붙이세요."
침대에 누운 그녀가 갑자기 팔을 뻗어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진짜 절대 실제 모델이 저라고 말하면 안 돼요."
"절대 말 안 합니다. 유정 씨도 회사에 가서 제가 작가라고 말이나 하지 마시죠."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 멋쩍은 미소를 나눴다.
"우리 둘 다 비밀이 많네요. 으으음.."
그녀는 밤을 세운 게 힘이 드는지 이상한 소리를 냈고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 뜻은 이제 조용히 하고 자란 말이기도 했지만, 비밀을 지킬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녀는 코를 아주 살짝 골며 귀엽게 자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온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아 참. 하석우 실장에게 말은 해놔야겠지?"
[이준형 : 실장님. 오후에 나유정 씨가 찾아뵙겠다고 하시네요. 2시 좀 넘어서 도착할 듯싶습니다.]
하 팀장은 내 문자를 읽었지만, 답변을 하진 않았다.
'내가 급이 낮아서 대답하기 싫다 이거냐? 후후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난 어차피 댁보다 잘나가니까.'
매끈하게 생긴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히 무게 잡고 잘난 체하지만 그래 봐야 월급쟁이였다. 대한민국 회사에 이런 회사원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마도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윗사람의 작은 인정을 받기 위해 남들과 경쟁하고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
'씁쓸하구만.'
세상 살기 참 고단하다. 고단해.
* * *
"그래서···. 이 작품에 출연하시겠다고요?"
하석우 실장은 갑자기 드라마에 출연하겠다고 찾아온 나유정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쉬어봐야 뭐하겠어요. 마침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서요."
"저희야 뭐 활동을 해주신다면 고마운 일이긴 한데···. 이 작품은···. 크흠..."
첫 부문을 좀 읽어본 그의 얼굴이 왠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약간···. 유정 씨 이미지하고 좀···."
"왜요? 저 20대 초반에 이런 역할 많이 했잖아요."
"그땐 그랬죠. 그런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르신 분이 굳이 이런 류의 드라마에 출연하시려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류요?"
하 실장은 나유정이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자 그녀의 눈치를 살살 봤다.
"제가 작품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쌓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굳이 버리실 필요가···."
"혹시 제가 이제 늙어 보이나요? 아주 옛날에나 했던 역할이라고 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도 교복 입고 드라마 나오잖아요?"
"아··· 그건 시청자들도 욕하는···."
"됐고요. 연기 잘해서 이걸로 또 인정받으면 되잖아요."
'오케이! 나유정 내가 시킨 대로 잘하네.'
아직 회의 초반이다 보니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었다. 하 실장은 자신만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기획팀장과 마케팅팀장을 호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도착한 후에도 줄곧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슬쩍 한마디를 했다.
"죄송한데요. 제가 잠깐 오다가 들으니 테리우스를 캐스팅하겠다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던데 혹시 그게 이거 아닌가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야?"
"그럴걸요?"
내 말에 배우 3팀과 기획팀은 동시에 난리가 났다. 서로 전화에다가 소리치고 가관이었다. 결국, 최초 방송국에서 컨택을 받은 가수팀에서 대표로 김상효 실장 보고를 하러 들어왔다.
"실장님 알아본 결과 오전에 저희 팀으로 TVM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테리우스를 꼭 찍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런 내용이 있으면 보고를 해야지. 왜 그걸 지금까지 뭉개고 있어요? 우리가 그거 알았으면 괜히 이렇게 삽질하고 있었겠어?"
"그, 그게···. 그쪽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파악해보고 보고드리려고···."
"파악하긴 뭘 파악해요. 하아···. 일단 알았어요."
불쌍한 김 실장. 같은 실장급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땐 가수팀이 프로세스대로 잘 한 거 같은데? 하루가 지난 것도 아니고 겨우 3시간? 그 정도밖에 안 됐는데 괜히 신경질이다. 당연히 보고했을 사항인데···.
'하 실장이 선배라고 든든한 라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 대하는 거 보니 그런 것도 아니잖아? 하긴 하 실장은 관상을 봐도 딱 그렇게 생겼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 상이야.'
하석우 실장의 두 눈이 뒤룩뒤룩 움직이고 있는 거로 봐서는 분명 이해득실을 머릿속으로 따져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양반아. 딱 보면 몰라? 무조건 고해야지. 나유정이 이제 27살인데 무슨 여배우랍시고 맨날 영화랑 화장품 CF만 찍어야 해? 그리고 테리우스는 드라마에 나오면 바로 떡상각인데!
물론 이런 것들은 내가 쓴 글이 매우 재미있고 주연배우인 나유정과 테리우스에 딱 맞춘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마 남들이 보기엔 성공할지 실패할지 감이 오지 않는 작품일 것이다.
서로 작품 초반부를 복사해서 돌려보며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유정은 회의에 관심을 끊고 또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흐.. 아이돌 마니아라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걸 다 때려 넣은 거니 재미있을 수 밖에···.'
그러나 회의실에서는 유정 씨 이미지에 손상이다! 아니다! 테리우스 연준이 빼고 연기가 되겠냐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하~ 짜증 난다. 이걸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간이 커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완벽한 무념무상의 상태로 저지른 일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거기서 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석우 실장이 손을 든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준형 씨. 왜? 무슨 할 말 있어요?
"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가 있는 내 팔을 바라보았다.
에이 뭐 이판사판이다.
"흐음··· 이런 거 의논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유정 씨야 본인이 강하게 하고 싶다고 하고 촬영 기간도 짧고요. 테리우스는 일단 제의만 온 거지 쓰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방송국에서 알아서 오디션을 볼 건데 벌써 연기 운운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미니시리즈인데 들어가기만 해도 대박인데 그냥 GO 아닌가요?"
"........."
하석우 실장의 가늘어진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내 답변이 정답인 줄 진즉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는 나유정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거다.
삼고초려를 했다고 하던가? 하 실장이 직접 어렵게 복귀시킨 나유정!
이런 식으로 밖에서 일을 물고 오면 아마 그의 입장이 좀 난처해지리라. 나 같으면 편해서 얼씨구나 했겠지만 이런 업적들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야 하는 웃대가리들은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를 것이다.
"그래요. 괜찮네요. 저랑 의견이 같습니다. 약속이 잡히면 유정 씨는 저랑 TVM에 같이 가도록 하시죠."
역시나 하 실장은 나유정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는 것 같다. 굵직한 일이 생기니 마치 자기 일처럼 움직이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아~~~ 왠지 그냥 하찮아 보인다.
'그래. 맘대로 해라. 어차피 이 드라마는 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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