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5화 (15/263)

TVM에서 온 전화 (3)

'보라색 아우라가 혹시 창의력 같은 건가? 이 양반은 드라마를 제작하고 이던이는 곡을 만들잖아!'

"작가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왜 그러시죠?"

김호진 PD는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환자 같은 표정을 짓자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아···. 제가 집중을 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머리가 핑 돌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거 빈혈 아닌가요?"

"빈혈은 아닙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스카우터를 다시 OFF 시켰다.

"아···. 일단 제가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당황하셨을 거 같은데요. 저희 쪽에 사정이 생겨서 그러는 거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사정이죠?"

나는 사정을 대충 알면서 의뭉스럽게 물어봤다. 만약 오수정이 알려준 내용과 많이 다르다면 이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솔직한 걸 보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 그런 배우의 사정으로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흐음···. 일단 사정은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 작품이죠? 공모전에 넣은 지 1주일도 안 됐는데요? 제대로 읽어보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만···."

김호진 PD는 말하면서 내 말을 들으면서 숨이 차는지 물을 한잔 들이키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부터 공모전 심사가 시작되어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작품이 초반부터 화제가 되었습니다."

"화제요?"

"내용이 화제가 되었다는 건 아니고요. 작가님이 10회 분량을 다 보내셔서 그렇습니다. 공모전 요강이 대본 2회분이라 전체를 보내시는 분들은 좀처럼 없거든요."

'뭐야? 그런 조항이 있었나?'

나는 잠시 눈을 굴려 생각을 떠올려보았다. 아마도 너무 서둘러 못 본 모양이었다.

"아! 2회분이었나요? 제가 그냥 급히 제출하느라 그것까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네요."

"그래서 제가 호기심에 먼저 달라고 해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솔직히 초반 2회차만 반짝하고 재미가 확 떨어지는 작품들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읽어보시니 괜찮던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더···."

나는 그의 말이 솔깃해서 검지를 펴고 빙빙 돌리면서 더 말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일단 소재가 너무 가벼워서 좋았습니다. 에피소드도 유쾌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무게감 뺀 감동도 좋았고요."

'하긴···. 내 부업 웹소설 스타일로 썼으니 고구마도 없고 가벼운 게 특징이지. 너무 웹소설 느낌이라 마지막 부분에 감동을 살짝 넣어준 수준이고···.'

"흐음···. 더 해보세요."

"그리고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편성하기에 좋습니다. 다른 멜로 주인공들의 단순 말장난이 아니라 연예기획사와 아이돌 관련 에피소드가 자세하고 디테일해서 시청자들이 신선하다고 느낄 확률도 높고···."

"그리고 또 있지 않습니까?"

"더 말해달라고요? 왜 그러십니까? 작가님. 무슨 문제라도···."

"아뇨. 별건 아니고 장점을 알고 싶어서 그렇죠."

"흐음···. 그리고 제작비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죠. 아이돌의 경우 출연료가 비싸지 않고 공짜로 하겠다는 사람도 많아요. 공연 같은 신은 자사 뮤직넷 음악방송 촬영 시 자체 팬클럽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요."

"흐음···. 제 작품에 그렇게나 장점이 상당히 많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꼭 이 작품을 연출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PD님. 제 작품이 재미있다니 다행이네요."

"다행은요. 다 작가님이 재미있게 잘 쓰셔서 그렇죠."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뜸을 들였다.

"그건 그렇고···."

"네 말씀하시죠. 작가님."

"원고료는 얼마나 주실 건가요?"

"네? 원고료요?"

나는 그가 별다른 말을 못하도록 공격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 작품은 상금 때문에 공모전에 넣은 겁니다. 이왕이면 최소한 최우수상 정도 금액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일단 원고료부터 시원하게 당기고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돈이라도 시원하게 받으면 졸속으로 찍는다고 하더라도 억울하진 않을 터···.

PD가 감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아우라까지 있는 사람이었지만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엄청난 천재들도 상황에 따라서 삽질을 한 예를 무수히 찾아볼 수 있었다.

솔직히 스케치 잘 그려놓고 채색하면서 망하는 그림이 얼마나 많던가!

"최우수상이면 5,000만 원에 1등인데요? 심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 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을 심사 시작하기도 전에 1등을 주면 꽤 시끄러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럼 최우수상 안 주셔도 돼요. 수상자는 따로 선정하시고 원고료만 주셔도 됩니다. 다른 조건들은 타 드라마들하고 같이 해주시면 되고요."

".........."

"제가 알기엔 초보작가 입봉작이 회당 천만 원이 약간 안되는 수준이라고 하는데 저는 딱 반이네요. 상당히 저렴하네요? 그것도 10회분 분량이 전부 끝나 있는 상태고요."

".........."

김호진 PD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이 양반 아무래도 무대포로 그냥 막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 양반아! 아무리 본인이 급해도 그렇지. 날로 먹으려고 해? 오려면 기본적으로 조건은 어느 정도 윗선이랑 이야기했어야지.'

내가 이 업계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고 친구 중에 방송 쪽이나 작가도 있는데 어디서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려고?

"왜 대답이 없으세요? 뭐 어쩌시게요?"

"일, 일단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회사에 가서 일단 공모전에서 작가님 작품을 제외하고 윗선에 보고해서······."

"아니요."

"네?"

답답하네. 이 인간. 왜 윗선하고 사이가 안 좋은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딱 보니 사내 정치도 모르고 수익 이런 거도 크게 관심 없어 보인다. 오로지 자기 작품을 찍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찬 예술가 같다.

그냥 한마디 해주고 일어날까 싶다. 이 양반이 재미있게 읽었다면 다른 사람도 비슷할 터···. 공모전 수상자라는 경력도 쌓고 천천히 가도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촬영 시간도 부족하고, 배우 캐스팅도 하나도 안 돼 있고, 검증 안 된 초보 작가란 놈은 회당 5백씩이나 원고료를 달라고 하고···."

나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가방에 주섬주섬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에서 퍽이나 허락을 하시겠네요. PD님 정말 죄송한데요. 그냥 못들은 걸로 할게요. 커피마저 드시고 가세요. 저는 이만···."

나는 가방을 등에 메고 몸을 돌렸다.

"자신 있습니다."

내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김호진 PD를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떨군 채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연스럽게 아우라 스카우터를 켰다.

'으으윽······.'

김 PD의 몸에서 아까보다 강한 보라색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지? 어떻게 아우라가 이렇게 강해지지? 이게 고정된 게 아니고 변하는 거란 말인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스카우터를 껐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테이블 근처에 섰다.

김호진 PD가 뭔가 울먹이는 듯 천천히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 이거라도 못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거든요."

그는 내 얼굴을 천천히 올려다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사뭇 비장한 느낌이다. 특수 임무를 받고 사지로 들어가는 독립운동가 같은 표정이었다.

옆 의자에 메고 있던 가방을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 턱을 괸 후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비장함이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할 생각인가?'

"PD님!"

"네. 작가님."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이걸 들어주시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주연배우 캐스팅은 제가 하겠습니다."

"네? 만약 제가 그 권한을 드린다고 해도 작가님이 무슨 수로 캐스팅을 하시게요?"

살짝 귀찮긴 한데 내가 나선다면 어찌어찌 해결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일석삼조로 말이다.

"일단 제가 보내드린 메일 주소로 정식으로 오퍼를 넣어주세요. 그리고···."

나는 이 순진한 PD에게 할 일을 알려주고 자리를 떴다.

*  *  *

[여보세요?]

"유정 씨. 이준형입니다. 혹시 지금 어디세요?"

[집요. 운동 갔다 방금 왔는데 왜요?]

"제가 갖다 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들려도 될까요?"

[알았어요.]

"30분이면 갑니다. 그럼···."

나는 운전을 하며 마포로 가고 있었다. 어차피 이 역할은 나유정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말은 해보고 한번 구슬려 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덤으로 테리우스도 캐스팅하는 거지. 쓸데없는 웹 드라마보다는 TVM 미니시리즈가 훨씬 낫지. 더군다나 연준이 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를 캐스팅하는 건데···.'

내 극본에서 중소 기획사 아이돌로 나오는 무명 그룹은 주연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드라마만 뜨면 순식간에 1티어로 쭉 올라갈 기회였다.

'뭐 어떻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렇게 된 게 더 좋은 기회인가?'

굳이 내 쏠쏠한 부업을 내 본업에까지 연결을 시켜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생각을 했지만 여러 가지가 눈에 밟혔다. 번거롭더라도 내가 의도한 배우와 가수가 나오면 더 기쁠 것 같았다.

온 힘을 기울인 역작도 아니고 어차피 강한 충격을 받고 하루 만에 미친 듯이 써 재낀 글 아니던가?

지금 분량을 생각해보면 과연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스피드로 그냥 막 써내려간 글이었다. 본인도 경악한 믿을 수 없었던 미친 속도였다.

마포 나유정의 집에 도착한 나는 벨을 눌러서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간편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잘 쉬셨어요?"

"그냥 책 좀 보다가 운동 좀 하고···."

"굳이 평상복 안 입고 계셔도 된다니까요. 그냥 편하게 입고 계시지."

"나, 나중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퇴근하면서 여기 오셨어요?"

"이거 주려고요."

나는 그녀에게 김호진 PD가 출력해서 가지고 있던 대본을 들이밀었다.

"이게 뭐죠?"

"미니시리즈 대본입니다."

"하 실장님이 아무 말 안 해요? 저 당분간 작품 안 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획의도하고 시놉 한번 읽어보세요. 한 2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가 내민 묵직한 대본을 받아들더니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대본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표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슬기로운 덕질 생활. 내 아이돌은 내가 키운다?"

나유정은 제목을 보고 약간 어이가 없는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 아래 쓰여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녀는 앞의 기획의도와 시놉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며 그녀의 얼굴은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시놉시스까지 다 읽은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대본을 소파 위에 천천히 올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마치 귀기가 감도는 듯했다.

"지금 장난해요?"

"제가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입니까?"

그녀가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것 같은데 설명이 필요할 듯싶었다. 내가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그녀는 심호흡을 쉬며 화를 가라앉히려 하고 있었다.

"유정 씨. 죄송한데요. 그건 유정 씨를 비하하거나 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그냥 그날의 생각이 모티브가 돼서 즉흥적으로 써본 대본이에요."

"싫으시면 안 하셔도 상관없어요. 누가 그걸 보고 실제 주인공이 유정 씨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

"물론 제가 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큭···."

"인상 좀 그만 쓰세요. 제가 쓰긴 했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흥."

"만약 출연을 생각해보신다면 여러 남자 아이돌 그룹을 직접 만나 같이 연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자 나유정의 눈빛이 미미하게 변화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내가 다시 두 번째 펀치를 날렸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운전을 하면서 머리를 짜낸 멘트였다.

"러브 라인도 있어요."

"하..."

"키스 신도 있을 걸요."

그 소리를 들은 그녀의 두 눈이 엄청나게 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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