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M에서 온 전화 (2)
나는 양해를 구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로 그러시죠?"
뜬금없이 TVM 피디가 왜 나에게 전화를 한단 말인가? TVM이라면 일주일 전쯤 미니시리즈 공모전에 접수한 일밖에 없었다.
사실 일을 하고 작품을 쓰느라 공모전에 접수한 사실조차 아예 잊어먹고 있었다.
뭐에 홀린 듯 하루 만에 미친 듯 휘리릭 갈겨서 공모전 마지막 날에 겨우 올린 작품이었다.
그 발표가 5월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작가님. 혹시 오늘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제가 직장이 있어서요. 바로는 안될 거 같은데요. 그냥 전화로 말씀하시죠?"
[아··· 그러시군요.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면 될 것 같고요. 저희 쪽 드라마 공모전에 슬기로운 덕질 생활 이라는 작품을 투고하셨죠?]
"네. 맞습니다."
[제가 그 작품을 바로 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예? 그게 무슨···"
전화기 너머로 왠지 모르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김호진 PD라··· 처음 듣는데? 이거 신종 사기 아냐?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작이 필요한 상황인데요. 마침 작가님 대본이 눈에 띄어서 연락드렸어요.]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작요?"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슬기로운 닥터 생활은 주 1회 방영되는 미니시리즈이지만 현재 중반을 달려가고 있는 드라마였다.
후속작이라면 기껏 해봐야 한 달 반 정도가 남은 상황이고 최소한 두 달 안으로 방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네. 황당하신 거 잘 압니다.]
"일단 제 작품이 왜 갑자기 선정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뭐···. 일단 제 생각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배우들 캐스팅 문제만 해결된다면 말이죠. 예전에는 한 달 전에도 촬영 들어가고 했는데요.]
"허···"
이 양반 왠지 무대포같다.
"일단 제가 일하는 중이니까··· 흐음···."
[거기가 어디시죠? 퇴근 시간 맞춰서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여기 상암입니다. 진짜 찾아오시려고요?"
[오우! 근처네요. 한 6시쯤 뵐 수 있을까요?]
나는 일단 알았다고 이야기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뭐야 이거? 실화야?
사실 어차피 TVM이 같은 계열사기 때문에 찾아오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근처 건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내가 CA 미디어 계열사 중 하나인 XM Ent의 직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었다.
방송국 놈들의 갑질을 어디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괜히 그 사실을 말했다가 날로 먹으려고 하면 큰일이다.
케이블은 그나마 같은 계열사라고 좀 눈치를 보지만 공중파 방송은 아직도 장난 아니었다.
그냥 자주 가는 근처 카페에서 6시에 약속을 잡았다.
다시 회의실에 들어갔지만, 테리우스 멤버들과 스태프들은 아직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럴 때면 가끔 내가 나서서 의견을 좀 내기도 해서 상황정리를 해줬을 텐데 TVM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왜 그래?"
"아··· 아네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나유정이 뭐라고 해?"
"유정 씨요? 유정 씨 전화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표정이 이상해 너. 뭐를 엄청 걱정하는 그런 얼굴이야."
"형. 형은 덩치랑 안 어울리게 왜 그렇게 민감해요? 가만 보면 진짜 섬세하다니까?"
이 양반 가만 보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진짜 분위기 파악도 잘하고 애들의 감정을 잘 캐치하곤 했다.
"야 인마! 거기 조용히 안 해? 지금 회의하는 거 안 보여? 시끄럽게 할 거면 나가!"
김 실장은 뭔가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을 했는지 조용히 속삭이고 있던 우리를 향해 화풀이했다.
"이크··· 형. 나가시죠. 개미 빡쳤네요.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 그러자."
내가 형택이 형의 귀에 대고 작게 말하자 형도 동의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상에서 커피나 한잔 하시죠."
나는 커피 두 잔을 내려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형택이 형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형. 커피 드세요."
"오··· 땡큐!"
"개미가 오늘 왜 그러죠? 뭣 같은 대본이나 들고 와서···"
"그러게나 말이다. 오죽했으면 연준이가 그러겠냐."
개미 는 개 미친놈 이라는 줄임말로 우리끼리 부르는 김 실장의 별명이었다.
예전에 매니저 한 명이 개미라고 부르다가 들킨 적이 있는데 김 실장은 그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그냥 조심하라고만 했다고 한다.
자신의 별명을 진짜 일을 열심히 하는 개미 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혹시 어디서 부탁이라도 받았나?"
"쉿··· 조용히 해. 내가 뭐라고 했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지?"
"형. 요즘은 휴대폰이 들어요. 다들 몰래 녹음하죠."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고. 혹시 아냐? 개미가 여기에 안 쓰는 구형 스마트폰이라도 몰래 설치했는지···"
형택이 형이 내 얼굴 가까이 데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우! 저리 가요. 징그럽게 왜 그래요. 안 그래도 개미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너 요즘 스트레스받는다고 막 나간다? 어디 팀장한테 혼나려고···"
"그럼 형이 대신 두 탕 뛰시던가요."
"·········."
나유정 스케줄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면서 며칠간 짜증 나는 표정으로 항상 들어오니 형택이 형도 역시 나유정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았다.
무덤덤하고 강심장인 내가 이럴 정도라면 자신도 애를 먹었을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형수님은 요즘 어떠세요. 출산일이 언제였죠? 다음 주?"
"어. 다음 주 월요일이야. 유도분만 하기로 했다. 알다시피 내가 오래 못 비우잖아. 스케줄대로 딱딱 애가 나와야 하니까···"
"하이고··· 이놈의 직장 생활. 애를 낳아도 쉬지를 못하네."
"왜? 3일 휴가 쓰잖아."
"팀장님. 다른 계열사는 휴가 2주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네가 스케줄 대신 뛰던지. 나도 2주 다 채워보자."
"크흠··· 개, 개미가 가만히 있을까요?"
"흐흐··· 또 쿨하게 대신 뛰어준다는 소리는 못하지?"
"시간이 되면야 제가 대신하죠. 제가 언제 농땡이 부린 적 있습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우리는 잡담을 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나보다 몇 살이 더 많은 조형택 팀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가 나오는데 겨우 3일을 쉬다니··· 회사 사정상 그걸 또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 매니저급은 몰라도 팀장급은 위에 눈치를 보느라 연차도 잘 못 쓰는 상황.
‘뭔가 애잔하구만.’
만약 나도 웹소설이 터지지 않고 계속 매니저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면 딱 형택이 형처럼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애를 키우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애를 최소한 2명은 낳겠다는 조 팀장이었다.
‘애국자네. 애국자야.’
우리는 잡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회의실에서는 아직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적당히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6시에 방송국 PD 만나기로 했었지?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일단 확실하진 않지만 진짜로 찍는다고 하면 고료라도 확실히 당겨달라고 해야겠다.’
그러다 갑자기 대학 동창 녀석이 생각났다. 그나마 꽤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었는데 지금 TVM에서 예능쪽 작가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하니 반갑게 받아주었다.
[여! 이준형! 왠 일이야.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오수정! 오랜만이다. 잘 살고 있냐?"
[나야 항상 방송 때문에 바쁘지. 넌 요즘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 전업 작가 하다가 때려치우고 연예기획사에 들어갔다며?]
"너도 알고 있었냐? 하여간 소문 진짜 빠르네."
[야! 너 동아리 동창 모임 좀 나와라. 킹카 이준형이 안 나오니 모임이 심심하다. 심심해.]
"킹카는 무슨··· 킹카가 다 얼어 죽었냐? 방송국 다니는 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칭찬을 해줘도 뭐라고 하네. 어쩐 일이야.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혹시 네가 담당하는 연예인 방송에 꽂아달라는 건 아니겠지?]
"흐흐··· 너도 참···. 갑자기 내가 전화해서 그렇게 해달라면 해주겠니? 내가 널 잘 아는데?"
[당연하지 인마. 뭐야. 말해봐.]
"너 혹시 TVM에 김호진 PD라고 알아?"
[알지. 왜?]
"그 사람 어떠냐? 뭐 네가 아는 사소한 거라도 알려주면 좋고···"
[뜬금없이 그 양반 이야기를 왜 물어봐?]
"내가 오늘 만날 일이 있어서 그래."
[흐음··· 무슨 캐스팅 같은 건가?]
전화기 너머로 오수정이 뭔가 고민을 하는 게 느껴졌다.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뭐 아는 것 있는 거 같은데?"
[어··· 뭐 조만간 뉴스에 나올 거긴 한데··· 어디 가서 미리 이야기 하지 마라. 알았지?]
"그래. 내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
[그게 말이지···]
오수정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으로 방영될 예정이었던 지옥에서 돌아온 사나이 가 취소될 위기라고 했다.
거기 출연한 주연배우가 현재 성폭행 관련 사건으로 고소가 들어간 상태로 조만간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TVM이 자체 조사를 해보니 단기간에 끝날 사건은 아닌지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고 드라마국이 전부 비상사태라고 했다.
후속작은 거의 주인공의 원맨쇼였기 때문에 배우를 바꾸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는 상황과 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컨텐츠를 외부에서 조달하려고 해도 당장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그것마저 시원치 않고 바가지를 쓸 수도 있다는 상황에서 그 PD가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며 자체 제작을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된 거야. 너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 마라. 뭐 곧 터질테니 상관없으려나?]
"알았어. 내가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 정도 뉴스라면 벌써 기자들이 준비하고 있겠는데?"
[아무튼, 지금 거기 난리인가 봐.]
"그래. 고맙다. 그런데 김호진 PD인가 그 양반 실력은 좀 어때?"
[감각은 있는 것 같더라. 그런데 성격이 외골수라 위랑 트러블이 많은가 봐. 2년 전쯤 이적했는데 계속 엎어지고를 반복하다 보니 아직 변변하게 한 게 없는 거 같더라. 나름 그 사람도 절박할걸?]
"그래. 고맙고 언제 한번 보자고."
[그게 아니고 모임에 나오라고!]
"오케이. 모임 있으면 알려줘라. 이제부터 좀 나가던지···."
내부사정임에도 역시 동창이라 그런지 협조적으로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딴에는 어려운 친구에게 뭔가 도움이라도 돼보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쓰읍··· 듣고 나니 뭔가 더 꺼려지네. 땜빵용에 문제아 PD라··· 이거 지뢰 아냐?'
뭔가 찝찝했지만 일단 약속은 한 상태니 만나는 봐야 할 것 같았다.
* * *
테리우스 애들은 형택이 형이 집에 가는 길에 태우고 가고 나는 5시 반쯤 회사를 퇴근해 근처 2층 카페에 도착했다.
평소에 이렇게만 퇴근해도 진짜 할 만할 것 같은데 이런 생활은 아마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가볍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그냥 습관이 돼버렸다.
집에서는 PC로 카페에서는 노트북으로 사무실이나 현장에서는 핸드폰으로 글을 짬짬이 썼다.
글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TVM에 김호진 PD입니다. 이준형 작가님 되시죠?"
"안녕하세요. 이준형입니다. 저는 어떻게 알아보시고···"
"글쎄요. 딱 봐도 작가님처럼 생기셨잖아요. 카페에서 혼자 글을 쓰시고 계시고요. 이 근처는 직장인들이 많아서 여기서 공부하거나 그런 사람들 별로 못 본 거 같아서 왠지 작가님 일 거 같더라고요."
"하하···. 감이 좋으시네요."
나는 영혼 없이 웃음을 날리며 앞에 앉은 김호진 PD를 관찰했다. 평균 키에 옷은 여느 피디와 마찬가지로 평범하지만 깔끔했다.
다만 약간 마른 체형이라 그런지 얼굴에도 살이 별로 없어서 인상이 좀 날카로워 보였다. 나이는 아마도 삼십 대 초중반쯤?
살짝 어색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는데 순간적으로 눈앞으로 손이 왔다 갔다 해서 그런지 사고 후 나타나고 있는 아우라 스카우터(?)가 켜진 것 같았다.
어라?
갑자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김호진 PD의 몸에서 보라색 아우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담당하는 테리우스의 이든이에게서 나오는 그 보라색 아우라와 같은 색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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