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3화 (13/263)

TVM에서 온 전화 (1)

나유정이 살고 있는 마포의 한 아파트

나는 회사에 들러 밴을 끌고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원래 오늘은 오후에 화장품 CF 촬영 일정이 있어서 그 시간에 맞춰서 움직이려고 했는데 어제 나유정의 문자 때문에 한 시간 정도 더 일찍 도착했다.

"으···. 내가 여기에 또 오게 되다니···."

어깨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을 탁탁 쳐낸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초인종을 누르니 CF 때문에 이제 막 준비를 하려던 나유정이 문을 열어줬다.

"어···?"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왜 그러세요? 화장 안 한 여자 처음 봐요? 들어오세요."

"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예전과 변함없이 휑한 그녀의 집에서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

'원래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나중에 인테리어 소품이라도 좀 사다 줄까?'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세요?"

"집이 너무 휑해서요. 원래 이런 스타일이세요?"

"아니요. 얼마 전 이사를 해서 집기를 많이 버렸어요."

"그럼 제가 인테리어 좀 해드릴까요? 이런 거 관심 많거든요."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 준형 씨는 원래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나요?"

"하하···. 원래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걸 선호합니다. 어때요? 인테리어 관심 있으세요?"

".......... 뭐 감각 있으시면 해보시던가요."

그녀는 뭔가 체념한듯한 표정이었다.

"네. 언제 한번 일정을 짜보시죠."

"유정 씨 말씀하시는 게 왠지 좀 편해지신 거 같은데요?"

"본의 아니게 제 치부를 보여드렸는데 겉치레하는 것도 웃기죠."

"겉치레라···. 유정 씨가 왜 남들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건 말씀을 많이 하시니 좋네요."

"오늘 할 말 다한 거 같네요. 급 피곤해졌어요."

"그때 잘 못 봤는데 오늘 한번 자세히 볼 수 있겠죠?"

나는 나유정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의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안방 문을 가로막았다.

"아, 안돼요."

"어차피 한번 봤는데요. 괜찮아요."

"아. 제발···."

나유정은 정말로 창피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를 그렇게 고집했겠지. 자신의 치부를 본 사람인데···. 그녀는 온몸으로 안방 문을 사수하고 있었다.

"유정 씨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저 아이돌 매니저입니다. 아이돌이라면 전문가 못지않게 잘 알고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눈을 담담히 쳐다보았다.

'허···. 참 화장도 안 한 처자 얼굴인데 미쳤네. 속눈썹 무엇?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서 진짜 인형처럼 생겼어. 이 얼굴에 화장하면 엄청나게 화려해지고···.'

"그, 그럼 비웃지 마요."

"제가 아이돌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니까요. 우리 애들을 좋아한다는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말이 결정타가 되었는지 방문 옆으로 몸을 살짝 비켜서는 나유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안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화장품? 향수? 여자들 방에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났다. 막냇동생 방에서 나는 냄새 비슷했다.

침대는 흰색 시트에 회색 이불이 깔려 있었고 역시나 별다른 소품들은 거의 없고 필수적인 것들만 놓여 있었다.

'이불 색깔하곤···. 쯧···.'

"이, 이건 다 바꿀 거예요."

내가 침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황급히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 뭐 그러세요."

그러다 뭘 발견했는지 이불 위에 놓인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낡아빠진 연두색 트레이닝복 하의를 집어 들고 황급히 옷장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괜히 저 온다고 평상복 갈아입지 마세요. 전 그냥 편하게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유정 씨 매니저가 된 걸 떠나서 그런 사소한 일을 누구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 보는 것처럼 입 무거워요."

"보는 것처럼?"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벽면에 쭉 전시된 아이돌 물품들을 훑어보았다.

안방의 큰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선반 위에 남자 아이돌의 앨범, 굿즈, 잡지, 포스터 등 종류별로 다양했다.

'어라? 자신의 키스신 사진을 오려서 슈퍼노바 포스터에 붙여 놓은 건 치웠네? 하긴 진짜 그건 오버야. 식겁했다. 진짜.'

그녀의 컬렉션에 대한 감상을 끝마치고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잡덕이세요?"

"네? 그게 무슨···."

"웬만한 괜찮은 남자 아이돌은 다 있는데요? 여기 있는 그룹들을 다 좋아하시는 게 맞는다면 그게 바로 잡덕이죠. 보니까 본진이 있고 한두 그룹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두루두루 다 좋아하는 거로 보이는데요. 제 말이 틀렸나요?"

"네. 두루두루 좋아하긴 해요."

"잡덕이네."

"그거 어감이 너무 안 좋아요."

"그냥 그렇게 불러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 저도 걸그룹 잡덕입니다."

"정말요? 최애가 어떤 그룹인데요?"

"비밀인데 유정 씨한테만 살짝 알려드릴게요. 텐뮤지스랑, BOB..."

"그, 그쪽 계통?"

그녀를 보며 뭔가 음흉하게 한번 웃어줬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이렇다. 남과 친해지려면 자신의 허물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사교를 위해서 고대시절부터 술자리를 했을까?

술에 취해서 자신의 빈틈이나 속을 보여주고 서로 그것을 공유하고 친해지는 것이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니 유대감이 생기고 끈끈해질 수밖에···.

지나치게 완벽함을 보여주려는 사람은 인정은 받더라도 주변에 정말 친한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최 작가님 만나고 돌아올 때 차 막혔으면 그 그룹들 노래 계속 들으셨을 거에요. 보세요."

나는 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에게 내 플레이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그, 그럼 테리우스 활동하면서 음방 나가기 시작하면 걸그룹도 많이 보셨겠네요?"

"말해서 뭐합니까? 그게 이 직업의 낙이죠."

"의외네요."

"지금 제가 할 소리를 유정 씨가 그대로 하고 있는 거 알고 계시는 거죠?"

그녀는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글쎄··· 약간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만의 착각일까?

"크흠···. 오늘 오후에 CF 촬영 있다고 하던데요? 샵에 들렀다가 가셔야죠.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CF 촬영은 아니고 화장품 추가 카탈로그 촬영이 있어요. 혹시 CF 찍는 거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이제 나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푼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약간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제대로 된 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애들이 몇 개월 전에 치킨 CF 하나 찍었던 거? 그때 처음 봤어요. 처음에는 좋아하는 것 같더니 배부르니 고통스러워 하던데요."

"잠깐 계세요. 저는 이제 나갈 준비 좀 할게요."

나는 그녀가 준비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채비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를 데리고 바로 청담동의 샵으로 출발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화장품 카탈로그 찍으러 가는데 화장을 하고 가네요?"

나유정은 앉은 상태로 거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맨얼굴로 가는 줄 알았어요?"

"거기 가면 해주는 거 아니었나?"

"뭐 해줄 때도 있긴 하죠. 그런데 어쨌건 예쁘게 하고 가야 예의에요. 업계 평판도 무시 못 하거든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유정 씨 기분 좋으신가 보다. 말 많이 하시네요. 새로 온 매니저님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어제부터 유정 씨 담당이 되었습니다."

나유정을 담당하는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이 그녀의 머리를 마무리면서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인물이 훤하시네요. 서비스로 머리 만져 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런 짓 했다가는 나중에 욕먹습니다."

"왜요. 깔끔하면 좋지. 아무튼 우리 유정 씨 좀 잘 돌봐주세요. 웬일로 괜찮은 매니저님이 오셨네. 유정 씨가 말도 붙이시고···."

누가 들으면 회사에서 이상한 사람만 붙인 줄로 착각할 만한 소리였다. 내가 알기엔 다들 괜찮은 매니저들이었다.

그렇게 꽃단장을 마치고 근처의 스튜디오에 방문해서 카탈로그를 촬영했다.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오케이! 좋습니다."

"표정··· 굿! 다시 한 번 갈게요."

그녀는 포토그래퍼의 말을 들으면서 포즈와 표정을 계속해서 바꾸었다.

'진짜 예쁘긴 예쁘네. 괜히 연예인이 아니야. 흐음···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 고급화장품을 선전하는 화려한 그녀와 남자 아이돌에 집착하고 있는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가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 버렸다.

'난 그냥 할 일만 하면 된다. 나유정이 남자 아이돌 마니아건 사이코패스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게 다행인 것 같았다. 불편할 뻔한 사이를 어떻게 말로 잘 푼 것 같았다.

*  *  *

그렇게 그녀의 매니저로 일한 지 1주일이 흘렀다.

의외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회사와 어떻게 계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스케줄은 상당히 한가한 편이었다.

사실 베니스 영화제 노미네이트 정도의 이슈라면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그녀를 돌려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게 정상이었다.

'연예계 복귀 조건으로 계약을 유리하게 했나 보지 뭐.'

테리우스 매니저를 할 때보다 훨씬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나의 악인은 이제 200편 가까이 비축한 상태였다. 확실히 일과 병행하면 글 쓰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일부러 퇴근을 할 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사무실로 들어서곤 했다. 혹시나 누가 추가로 일을 시킬까 봐 나름 머리를 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실의 동료와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 누구도 나를 터치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말도 안 하는 냉정하고 차가운 그녀에게 많은 매니저가 학을 떼고 손을 들었다는 소문이 워낙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봤을 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약간 과장이 심한 것 같았다.

'아··· 나도 그녀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똑같았을지도···'

나방이 나를 살린 걸까? 살리긴 뭘 살려. 앞으로 나는 웹소설로 돈을 쭉쭉 벌어갈 텐데? 차라리 아는 척 안 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그런 음습한 마니아 따위···'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그녀의 화려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준형아. 요즘 힘드냐? 왜 그렇게 죽상이야."

"형택이 형. 괜찮아요. 일이 뭐 다 그렇죠. 그건 그렇고 새로 온 신입은 좀 괜찮은 거 같아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괜히 힘든 척 연기를 했다.

"어··· 그나마 좀 다행인 게. 애가 좀 빠릿빠릿한 것 같아."

"고문관 같이 이상한 놈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요즘에 들어오는 애들 둘 중 하나는 좀 이상했잖아요."

"그러게. 그만두는 놈들도 부지기수고. 아무튼, 내일은 연준이하고 훈이 출근하니까 유정씨 스케줄 없으면 같이 좀 봐줘라."

"알았어요. 그래도 좀 미안하네요. 제가 두 탕을 뛰어야 해서 형이 부담이 심해지셨잖아요."

"내가 지금 매니저 몇 년째냐? 그런 경우가 뭐 한두 번인가? 별의별 꼴을 다 겪어 봤어요. 이 조형택이···"

역시나 팀장급이라 말하는 게 달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나 같으면 짜증 나서 실장이랑 한판 붙었을 거 같은데 형택이 형도 김 실장을 은근히 피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다음날 테리우스의 센터 한연준과  메인 보컬 김훈이 회사 회의실로 들어왔다.

"집에서 잘 쉬고 왔냐?"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고 와서 그런지 애들이 본래의 화사한 얼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 이게 누구세요. 배신자 나유정 씨 매니저님이다."

"·········."

"한연준! 형 그만 놀려. 형이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잖아."

연준이가 나를 보자마자 배신자라고 놀렸고 그런 연준이를 훈이가 말리고 있었다.

"그냥 완전 이적해버릴까···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 안돼! 농담이야 형! 내 맘 알잖아."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아냐?

나는 오랜만에 본 연준이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이 두 명의 스케줄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기획팀, 마케팅팀, 그리고 김 실장까지 모두 회의실에 모였고 나는 형택이 형과 구석에 앉아 있었다.

현장 매니저랑 이런 업무는 상관이 없는 편이었다. 그냥 진행 상황 정도를 공유하는 정도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준이는 두 편의 웹드라마 출연 제의가 온 상태였고, 김훈은 공중파 프로그램인 복면 가요왕에 출연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살짝 얼굴들을 보아하니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였다.

역시나 한연준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대본을 슬쩍 훑어보더니 인상을 썼다.

"실장님 저 이거 안 하면 안돼요? 웹드라마는 진짜 오글거려서 못하겠어요."

"연준아. 그래도 해야 해. 그 누구냐 블랙샤크 호영이가 그걸로 확 떴잖아."

"그래서 걔랑 저랑 이제 같은 레벨이잖아요. 굳이 제가 웹드라마에 나갈 필요가 있어요?"

"요즘은 조회수만 보면 웬만한 망한 드라마에 나가는 것보다 효과가 좋아요."

회의실에서는 기획팀, 마케팅팀 직원이 합심해서 연준이를 설득하고 있었고 김 실장이 뒤에서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훈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넌 뭔데. 왜 기분이 안 좋은 거냐? 공중파 복면 가요왕이라면 무조건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무슨 문제가 있나? 흠···'

나도 나름대로 그 이유를 곰곰이 추측해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핸드폰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회의실 구석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TVM 김호진 PD라고 합니다. 혹시  이준형 작가님이신가요?]

"예? TVM요?"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았다.

TVM의 PD라는 사람이 왜 나에게 전화를 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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