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배우 담당? (3)
오랜만에 보는 김인환 대표였다. 나도 김 실장과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김 실장님. 아침부터 힘이 넘치세요.
"아, 아닙니다. 대표님."
역시나 높으신 분 앞에서는 몸 둘 바를 모르는 김 실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살짝 비웃고 있었다.
"여···. 이게 누구신가. 준형 씨 오랜만이네?"
"네. 대표님.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을 통 뵙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요즘 좀 바빴어야지."
김인환 대표는 깔끔하게 생긴 삽 십 대 초반의 사내로 CA 그룹의 방계 친척쯤 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연히 내가 입사할 때쯤 대표 자리에 앉아서 그의 출근 첫날 내 면접을 봤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는 항상 나를 보면 반가워 해줬는데 아무래도 그에게는 공식적인 첫 업무였는지 그 일이 뇌리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들이신가?"
"아, 그게···."
"제가 오늘부로 나유정 씨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김 실장과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김 실장이 말을 하지 못하고 어리바리하고 있자 대신 내가 나섰다.
"어? 그래요? 준형 씨 테리우스 담당 아니었나? 나름 잘하고 있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김 실장은 대표의 말에 더 당황했는지 자꾸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대표님. 제가 아예 담당을 바꾸는 게 아니고 신입을 한 명 뽑아서 테리우스에 배치하고 제가 같이 관리해주면서 나유정 씨까지 담당하는 건입니다."
"아. 그런 거에요? 이야···. 우리 준형 씨 능력 있네. 이제 2년 차가 두 팀을 담당하고 말이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아니긴? 나유정 씨 감당 못 한다고 손든 매니저들이 어디 한둘이야?"
"아···. 그건···."
김인환 대표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대표실로 올라갔다.
찌릿···.
김 실장이 나를 아니꼽게 쳐다보는 게 다 느껴졌다.
"가서 일봐!"
"네. 그럼···."
사실 오늘 일은 없다. 그냥 자리에 있다가 월급 루팡이나 좀 하고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용히 숨어 있을 예정이었다.
김 실장은 뭐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인지 문을 쾅하고 닫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 실장. 나한테 성질 내지 마. 대표님이 나 좋아하는 게 내 잘못이야? 내가 호감상인걸 어떡하느냐고! 흐흐흐···.'
나 스스로 어깨가 으쓱했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수 매니저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들어오자 순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일이 잘 풀렸느냐고 물어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별 말없이 엄지를 척하고 내밀었다.
'자! 이제 리얼한 백색소음 속에서 집필을 좀 해볼까?'
이렇게 터치가 없을 것 같은 날은 스마트폰보다는 그래도 역시나 컴퓨터가 훨씬 생산성이 좋았다.
나는 아침에 맡아놓은 자리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 ERP(그룹웨어)에 들어갔다.
그리고 메일 아이콘을 누르고 메일 쓰기를 클릭했다.
제목에 대강 업무 협조의 건 어쩌고를 입력한 후 예전 메일함에서 진짜 업무 관련 엄청나게 긴 글들을 복사해 넣었다.
그리고 제일 밑으로 커서를 가져다 놓았다.
"하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닥...
오늘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아 이 싸구려 번들 팬타그래프 키보드로도 글이 꽤 잘 써지는 것 같았다.
동기들하고 점심도 즐겁게 먹고 오후에도 집필 활동에 매진했더니 비축분이 꽤 모인 것 같았다.
"흐음···. 오늘 열 일했네. 좋았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5시 반이었다.
"어이쿠. 퇴근 시간이네."
역시 직장인의 기쁨은 뭐니뭐니해도 칼퇴근 아니겠는가?
나는 오늘 집필한 내용을 임시보관함에 저장했다. 예전에 같이 교육받은 전산실 동기에 따르면 개인적인 이메일 송수신은 나중에 전부 다 걸려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첨부 파일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내용 칸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일을 보내지도 않고 회사 계정에 저장해놓으면 집에 가서 열람이 가능했다.
만약 첨부 파일이라면 암호화가 되기 때문에 집에서 조회하는 게 불가능했다.
'뭐···. 꼼수지. 흐흐···.'
그리고 메일 내용의 윗부분은 누가 봐도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업무 내용이니 절대 보안상 걸러낼 수가 없는 철저한 방법이었다.
'정말 최고야."
대기업 그룹웨어라 그런지 메일에 자동 저장 기능까지 있었다. 굳이 저장 버튼을 안 눌러도 쓴 내용이 오류로 날아가는 일이 없었다.
'역시 모기업 시스템이야. 어마무시하다. 개꿀이야 개꿀. 큭큭···.'
나는 내 짐들을 정리했다. 가방을 등에 메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정말 최고의 집필 프로그램이라니까? 오타 체크 해주는 거 없는 거 빼면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글이 제일 빨리 써지는 거 같아. 진짜 이상해."
문창과 출신인 내 글에는 실제 오타가 거의 없는 편이라 워드 프로그램에 그런 기능은 사실상 무용지물이긴 했다.
"더 막히기 전에 얼른 퇴근해야겠다."
퇴근하는데 윤하영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작가님. 알려주신 사이트에 가서 글들을 출력하고 정독했습니다. 글을 쓰는데 너무너무 도움이 되네요. 왜 이런 걸 진즉 몰랐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흐음···. 일찍 끝났는데 별다방에 가서 하영 씨 얼굴이나 볼까?"
집으로 가려다 방향을 살짝 바꿔서 도로 샛길에 주차한 뒤 가방을 들고 별다방에 들어섰다.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따뜻한 거로···."
"어?"
그녀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오셨어요?"
나는 그녀에게 상체를 숙이고 작게 말을 건넸다.
"글은 잘 쓰고 있어요?"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항상 앉는 곳으로 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시간을 보니 그녀가 퇴근하려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끝날 것 같았다.
기다리는 동안 글을 쓰고 퇴근 후 같은 파스타 전문점에 들러 식사를 했다.
"작가님. 축하드려요. 계속 1위 질주 중이시던데요?"
"그래 봐야 월 500~1,000만 원 정도인데요 뭘···."
"저는 월 150만 원만 되도 소원이 없겠는걸요."
"그 정도는 저만 따라오시면 충분히 달성 가능합니다."
"그, 그럴까요?"
"물론이죠. 쓰던 거 내리고 다시 처음부터 쓰고 있죠?"
"네. 어차피 선작도 20명밖에 안되고요. 양해를 구하고 처음 프롤로그부터 다시 쓰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썼나요? 한번 볼까요?"
"잠시만요. 작가님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녀에게서 파일을 건네받은 나는 프롤로그부터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예전보다는 꽤 나아졌네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많이 사라지고 주인공이 겪는 일과 주인공에게 기대감이 조금은 느껴지네요."
"와···. 감사합니다. 작가님. 의욕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기대감에 차서 그런지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털을 깎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라? 왠지 쌍꺼풀만 있다면 외모가 1티어급으로 올라갈 것 같은데?"
나는 원래 이런 감각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옷도 잘 입는 편이었다. 특히나 심미안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었다.
전 여자친구도 홑꺼플이었는데 항상 입버릇처럼 넌 쌍꺼풀 하면 엄청나게 예쁠 거라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물론 그녀는 절대 얼굴에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어쨌건 현재는 추한 것은 더 추하게 느껴지고 아름다운 것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사고 후 능력이라면 능력이랄까?
"흐음···. 그런데···."
"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나아지긴 했는데 주인공이 너무 약해요. 회귀, 빙의, 환생 같은 것도 아니니 기대감도 좀 낮고 주인공의 현재 특출난 능력도 별로 보이지 않아요."
"회빙환은 요즘 너무 많이 나오는지라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아서요."
"흐음."
"작가님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왜 주변에 중국집 하고 치킨집이 많은 줄 아세요? 사람들이 그 맛에 익숙해서 그래요. 그러면서도 브랜드마다 맛이 약간씩 다르죠."
"네···."
나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해나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익숙한 맛을 내는 게 망하지 않는 첫걸음이에요. 만약 익숙한 맛인데 뭔가 독특한 게 들어가 있으면 금상첨화죠."
"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회빙환이고 그것을 베이스로 깔고 자기만의 뭔가를 넣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하하···. 꼭 회빙환이 아니더라도 독자들에게 초반부터 기대를 하게 하는 게 포인트에요."
"만약 눈 딱 감고 하영 씨 글에 회빙환을 넣어보시면 벌써 독자들의 초반 유입부터 달라질 거에요. 쓰기도 훨씬 편할 거고···."
"정말 그럴까요?"
역시나 윤하영은 고집이 있었다. 이런 고집은 초보작가에게 약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초보 작가가 처음부터 너무 독자들 취향만 맞추려고 하면 정말 특색 없는 작가가 될지도···.'
"다른 플랫폼은 모르지만, 달동네는 가끔 공식을 따르지 않는 작품들도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박을 내기도 하잖아요. 지금 1위 하는 작가님 작품에도 그런 거 안 나오고요."
나는 속이 약간 답답해서 그랬는지 잔을 들어 얼음이 가득한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크······."
"하영 씨. 죄송한데요. 지금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하영 씨가 그런 작가들과 비슷한 필력을 보유하고 있나요?"
"아···. 아뇨."
"물론 제가 필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흐음···. 그럼 그 작가들처럼 소재가 신선한가요?"
".........."
"하영 씨 작품은 그냥 한 잠재력이 높은 소녀가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과 에피소드를 담은 내용이잖아요?"
"네."
"물론 조사는 열심히 하셨는지 디테일이 살아있더군요. 그래도 밋밋합니다. 흡입력이 없어요. 기대감도 별로고 소재도 신선하지 않고···."
"하아···."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경험상 초보 작가들은 무조건 200화 이상을 목표로 작품 하나를 완결 지어보는 게 가장 좋아요."
"그런 게 목표라면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제 생각대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자가 거의 없는데 200화를 쓰기가 진짜 어렵습니다. 쓰다 보면 자괴감이 들 거고 점점 의욕을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아...."
"작가가 정말 취미로 쓰지 않는 한 남들에게 널리 읽혀서 자기만족을 얻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우연히 첫 작품이 잘돼서 독자들이 따라온다고 해도 200화까지 가면서 그... 뇌절이라고 하죠? 독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도 엄청나게 많아요. 거기서 연독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죠."
"맞, 맞아요. 그런 작가들 많이 봤어요. 욕먹고 연중 하는···."
"그걸 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접 겪어봐야 해요. 그래야 뭘 해야 하고 뭘 안 해야 하는지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론서를 보면 더 이해가 빨라져요. 아아~ 내가 그때 그래서 독자들이 댓글로 난리를 쳤구나. 이러면서요."
간혹 초보인데 처음부터 히트작을 내는 경우가 있긴 한데 제 경험상 그런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 전문가이거나 평소에 장르 소설을 엄청나게 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작가님. 죄송해요. 괜히 제가 우겼네요."
"아. 저도 죄송합니다. 설명충은 독자들의 이탈을 불러오는 지름길인데···. 제가 괜히 열을 냈나 봅니다."
"아니에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습니다. 작가님."
그렇게 그녀의 작품에 대해 감평을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9시가 넘은 상황.
생기 넘치는 여성 작가 지망생과 같이 토론을 하니 글에 대한 의욕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자! 열두 시까지 쭉 달려볼까?'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는데···.
"띵~"
핸드폰으로 나유정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 할 말 있지 않나요? 내일 오전에 집에서 봬요.]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왠지 입맛이 썼다.
"나유정 이 남자 아이돌 마니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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