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9화 (9/263)

갑자기 회사가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3)

현재 시간은 12시 45분. 깔끔하게 약속 시각 15분 전에 도착했다.

'역시 장성 운전병 출신! 시간은 칼 같이 지키지.'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적하지만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었다. 운전해서 와보니 경치도 좋고 접근성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마당도 널찍해서 주차하기도 편했다. 이 외제 차는 다 좋은데 주차하기가 영 껄끄러웠으니까.

나유정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사이드미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 경치를 한번 쓱 훑어보는 것 같았다.

'허 참···.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이건가?'

한 폭의 드라마 같은 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차 안의 짐은 안으로 옮겨 드릴까요?"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 내었다. 그녀는 뭔가 입을 씰룩거리는가 싶더니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허허~ 아주 영애님이셔. 귀족가의 여식···. 이런 캐릭터를 츤데레로 넣으면 괜찮겠는데?'

차 안에서 짐을 꺼내 나유정을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꽤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는지 고풍스러웠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식당이었다.

내가 카운터에서 이름을 말하자 종업원이 예약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최하나 작가는 벌써 도착해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유정아! 여기야. 일찍 왔네?"

"작가님. 안녕하셨어요?"

드디어 나유정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야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나왔으니 신기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직접 육성을 들으니 감회가 좀 다르다고 할까?

"짐은 여기다 놓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대화 나누세요."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최하나 작가가 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새로운 매니저예요?"

"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작가님. 오늘 나유정 씨를 담당하고 있는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완전 담당은 아닌가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매니저분이 키도 크고 훤칠하시네."

"하하···. 감사합니다. 작가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전이라면 정말 실제 동작으로 당황함을 표현했을지도 몰랐지만, 말만 그렇게 하지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그녀가 시청률 제조기 최하나 작가이건 폭격기건···. 나에겐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요즘은 그녀도 슬슬 성적이 예전만 못한 상황이었다.

비록 데일리노블이지만 나는 1위 작가다. 꿀릴 게 전혀 없었다.

농담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 그녀에 비비지 못했다.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말이었다.

예전처럼 주눅이 들거나 당황하지 않는다는 걸 호기롭게 말한 것일 뿐···.

"매니저님도 식사 아직 못하신 거 아니에요? 그냥 같이 드시지?"

"저도요?"

"뭐 어때요? 같은 회사 식구 아닌가? 여자끼리 먹는 것보다는 훤칠한 훈남이 있으니까 분위기도 살고 좋네."

만약 내 성별이 여자였으면 문제로 삼아도 될 발언이었으나 나는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사람이다.

"작가님. 정말 자꾸 그러시면 저 정말인 줄 알고 착각합니다."

"응. 착각해도 돼. 정말이니까. 준형 씨 얼른 여기 앉아요."

최하나가 바닥의 방석을 손으로 팡팡 내리쳤다.

"그럴까요?"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이런 식당에 점심이라면 아마 최소 인당 7~8만 원은 넘을지도 몰랐으니까. 어쨌건 공짜는 진리 아니겠는가.

그래도 매니저라 눈치는 봐야 되니 나유정의 표정을 살짝 살폈다.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어쩔 수 없는 듯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두 명과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상 위에는 꽤 많은 수의 반찬이 올라왔다.

"이곳 한정식이 좋은 점이 쓸데없이 많이 음식을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진짜 좋은 것만 주거든. 코스로 들어올 건데 진짜 괜찮아."

"반찬만 먹어봐도 알겠는데요. 맛이 범상치가 않네요."

"준형 씨가 먹을 줄 아네. 유정아. 너도 많이 먹어. 또 깨짝거리네. 팍팍 먹어."

최하나 작가는 꼭 엄마처럼 그녀를 다그쳤다. 머리를 질끈 뒤로 묶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꼭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리게 했다.

'이분 나이가 마흔이었던가?'

근 10년 이상을 드라마에서 탑을 달리고 계신 분이었다. 나유정과는 아마도 '조선 궁중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작가가 나유정의 영화 데뷔작 '내가 사랑한 그녀'를 보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차기작 주인공으로 낙점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나유정은 그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신들린 연기를 펼치며 조선 궁중스캔들을 압도적인 시청률 1위로 만들며 기대에 부응했다.

뭐 물론 거의 5년? 6년 전쯤 된 이야기였다.

나는 시차를 두고 들어오는 음식을 맛있게 먹느라 그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유정아. 우리가 작년 이맘때쯤 봤던가?

"네 선생님. 벌써 1년이 흘렀네요."

"그래. 지금 활동하니까 얼마나 좋아. 예전처럼 얼굴도 좋아졌네."

"선생님이 그때 따끔하게 혼내주셔서 정신을 차렸어요."

"내가 뭘 한 게 있니. 네가 상처를 훌훌 털고 맘을 다시 잡고 다시 일어선 거지."

"아니에요. 진짜 그때 작가님 아니었으면 지금도 집에만 있었을 거에요."

"그래···. 뭐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쑥스럽네. 그나저나 아쉽겠어.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놓친 거 말이야. 난 네가 탔으면 했는데···."

"저는 그냥 후보에 오른 것만 해도 좋았어요."

"네가 가만 보면 작품 복은 있는 것 같아. 오랜만에 복귀해서 영화를 찍었더니 그 작품이 황금사자상을 타질 않나···."

"운이 좋았어요. 최만식 감독님께서 영화를 너무 잘 만드셔서···."

"그래. 그 양반이 참 영화는 기가 막히게 뽑지. 그런데 너무 그런 소리만 하지 마 유정이. 너도 잘했어."

".........."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돼. 영화제 측에서 괜히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겠니?"

"맞습니다. 진짜 소름 돋는 연기였습니다. 전 영화 보면서 진짜 유정 씨가 신들린 줄 알았어요."

된장찌개를 한술 뜨던 내가 나도 모르게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갑자기 두 여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눈치를 봤다.

'배우 매니저들은 그냥 이럴 때 조용히 입 닫고 있나?'

애들하고 밥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던 버릇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그렇죠? 준형 씨가 뭘 좀 아네. 나도 유정이 연기 보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어. 진짜야."

"전 시나리오보다 연기가 더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작년에도 여우주연상이 아시아 여배우여서 그런 거 감안해서 이번에는 유럽 쪽 손을 들어줬을 거에요."

"그런 거야? 자세히 몰랐는데 그랬구나."

"맞을 겁니다.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 녀석이 말해준 겁니다."

"어? 준형 씨 혹시 그쪽 전공한 건가?"

숨길 게 뭐가 있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어설프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떨 생각은 없었다.

"아! 제가 J대 문창과 출신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두 여인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와~~ 갑자기 후배님을 만나버렸네? 나 거기 나온 거 알고 한 소리지?"

"하하···. 제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선배님."

나는 최하나 작가에게 말을 하면서 시선은 나유정을 향해 있었다.

'어이 나유정 씨 집사 무시하지 마시지요. 학벌 은근히 좋으니까···. 큭큭···.'

"그런데 어쩌다 매니저를 하고 있어? 물어보면 실례일까?"

벌써 물어봐 놓고 딴소리하긴···.

"아! 제가 연예계 관련 소설을 쓰다가 리얼한 현실을 좀 파악해보려고······."

"뭐? 그게 정말이야?"

"물론 농담입니다."

"푸훗···."

나의 뜬금없는 드립이 어이가 없는지 나유정이 입을 가리고 푸흣 웃고 말았다.

"싱거운 사람이네. 자기 인생을 그렇게 시니컬하게 비꼬는 거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

"뭔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네. 그렇죠. 사람들은 다들 각자 개인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최하나 작가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다 한마디 했다.

"당신 눈빛이 살아있어. 마음에 여유가 보이네. 이런 사람은 둘 중 하나지."

"둘 중 하나요?"

"그래. 뭔가 능력을 숨긴 실력자이거나 부모님이 조물주 위 건물주거나!"

오! 이 여자 날카롭다. 역시 업계의 탑은 다른 걸까?

*  *  *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밥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즐겁게 대화를 하며 먹어서 그런지 기분은 무척 좋았다.

오후에 한 잡지사를 들러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역시나 나유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여전히 도도하군. 도도해.'

슈퍼노바의 곡은 이미 끝나고 테리우스와 블랙사크의 노래가 연달아 흐르고 있었다.

'흐음···. 조금 있으면 걸그룹 노래만 주구장창 나오는데···. 괜찮으려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도로가 뻥뻥 뚫려서 그녀는 중간 부분인 걸그룹 최신곡만 들었을 뿐이다. 뒤쪽으로 가면 내 최애 그룹인 텐뮤지스나 BOB의 섹시한 곡들이 그냥 주르륵 나왔을 텐데···.

사실 들려줘도 무방하긴 했다. 뭐 어때. 내 취향만 공개되는 거지.

아파트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나는 차에 실려 있는 최하나 작가의 선물을 들고 그녀를 따라 집으로 올라갔다.

거실로 들어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유정 씨. 일정이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라?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녀가 인사를 하다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아···. 네···. 그럼 전 이만···."

나는 그녀에게 살짝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복도를 지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 했다.

"꺄아아악~~~"

집 안쪽에서 나유정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신발을 휙휙 벗어 던지고 집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불이 켜진 채 안방 문이 열려 있었고 나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방에는 유정 씨가 벽에 붙어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마구 가리키고 있었다.

"저···. 저···. 저기······. 벌레···."

아무래도 오전에 나올 때 방충망까지 열어놓은 모양이었는지 손가락 반 마디만 한 나방이 들어와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쩝···. 깜짝 놀랐잖아.'

나는 가볍게 나방을 손으로 쳐서 죽이고 티슈를 뽑아 처리한 후 손을 닦았다.

"괜찮으세요? 그냥 나방입니다."

언젠가 그녀가 벌레를 엄청나게 무서워한다고 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제야 심호흡을 하면서 놀란 가슴을 달래는 중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안은 밖의 거실과 완전 딴판이었다. 나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훑어보았다.

'뭐, 뭐야 이거···.'

놀랍게도 방에는 온통 남자 아이돌 포스터와 그들의 앨범, 콘서트장에서 파는 굿즈들이 벽면에 가득했다. 심지어 같은 회사 테리우스의 포스터까지도···.

슈퍼노바 포스터에는 영화에 나왔던 그녀 자신의 키스 장면 사진을 잡지에서 오려 붙여놓기까지 한 상황!

나는 황당함을 넘어 경악하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변해버렸다.

마치 여사친이 샤워하는 장면을 실수로 본 것 같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아···. 음··· 크흠···. 저, 저는 이제 그만 가, 가 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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