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회사가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2)
"그래. 3팀!"
"실장님. 혹시 3팀이 아니고 나유정 씨 말씀하시는 거 아니세요?"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김상효 실장의 굵은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면서 나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는 못마땅하다는 시선.
평소 같으면 그냥 참고 더는 상대를 안 했을 텐데, 1위를 질주 중인 작품 생각을 하자 갑자기 이 양반이 만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그의 업무 지시에 지극히 이성적으로 답변했다. 월 오백만 원이 통장에 추가된 효과일까? 기존 월급의 2배가 더 늘어났을 뿐이지만 내 자신감은 그 이상으로 높아진 것 같았다.
"왜 가수팀이 배우팀 일까지 해야 합니까? 거기도 전부 다 바쁜 건 아닐 텐데요."
"뭐?"
김상효 실장은 평소 같지 않은 나의 태도에 약간 당황을 한 것 같았다.
"배우팀이 언제 저희 바쁠 때 도와준 적 있습니까? 제가 테리우스 한참 바쁠 때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애들 케어했을때도 그런 도움은 받지 못한 거 같은데요?"
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은 채 조곤조곤 말을 했다. 아무리 이 인간이 밉기로서니 굳이 직장 상사와 싸워봐야 득이 될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무실에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근직 직원들이 아닌 척하면서도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을 게 뻔했다.
'통장에 월 오백만 원이 추가됐다고 해서 완전 돌아이가 될 순 없지. 월천킥이면 또 모를까.'
"배우 매니저팀은 같은 회사 아냐? 가수팀만 XM 이냐고!"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니 이제는 '회사를 위해'라는 대의 같은 걸 내세우는 김 실장이었다.
"실장님. 지금 가수팀이 아니라 XM의 실장님으로 업무 지시를 하시는 건가요?"
"그래. 맞아."
그의 얼굴에 네가 뭐 어찌할 건데? 라는 표정이 스쳐 갔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야죠."
나는 이 인간하고 더는 드잡이질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분명 입사 선배인 배우팀 하석우 실장에게 자기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쳤을 게 뻔했다.
수첩을 재킷 상의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을 챙겼다.
"3팀으로 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죠?"
"그래! 바로 가봐."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비릿한 표정. 난 왜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날까?
조용히 나가려다 몸을 돌려 김 실장에게 한마디 했다.
"실장님. 앞으로 저희 바쁠 때 배우팀한테 지원 요청 좀 해도 되죠?"
"뭐 인마?"
"다 같은 XM 이잖아요. 바쁠 때 서로 도와야죠. 아! 물론 배우팀 여력이 있을 때요. 수첩에다가 파견 나간 근무시간 적어놔야겠네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당황하는 김 실장의 답변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그가 그런 요청을 공식화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봤다. 위에 눈치만 살살 보고 아래 직원들 말은 무시하는 게 일상인 사람이었다.
나가다가 내근직인 지원팀 순규랑 눈빛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사이다 급은 아니었지만 시원한 물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순규를 보고 왼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날렸다. 그녀는 우웩하는 표정을 장난스럽게 지어 보였다.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배우 3팀으로 가서 업무 지시를 받았다. 오늘 할 일은 역시 예상대로 배우 나유정의 1일 임시 매니저였다.
주차장에서 고급형 밴을 끌고 나유정이 사는 마포의 한 아파트로 출발했다.
블루투스로 차 오디오에 연결해서 최신곡을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남자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다 보니 아이돌 노래들은 신곡이 나오는 족족 빼먹지 않고 듣는 편이었다.
이제는 스물아홉이 되었지만 듣보잡 아이돌 그룹과 그들의 노래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남자인지라 남자 아이돌 노래보다는 여자 아이돌 노래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제 전 세계 초인기 케이팝 그룹 슈퍼노바의 앨범이 발매된 상황! 나는 이번에 그들의 앨범을 들으며 곡들을 체크하기로 했다.
달리는 차 안에 트랜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한 볼륨으로 조절해놓고 사무실에서 가져온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싸! 날씨 좋고! 기분 좋고!, 노래 좋고!"
오늘따라 도로가 뻥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한강 뷰가 멋진 마포의 어느 고급 아파트였다. 차를 등록해놨는지 아파트 입구의 차단기가 자동으로 열렸다.
"오우!"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나유정 씨의 번호로 문자를 남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유정 씨를 담당할 매니저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오늘 최하나 작가님과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제가 좀 일찍 도착했으니 천천히 준비하시고 지하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차의 시동을 끄고 스마트폰 노트 어플을 켜서 글을 좀 쓰려는 찰나, 답변 문자가 도착했다.
[올라오세요.]
정말 간결한 답변이었다.
"뭐야. 처음부터 단답형이네?
나야 아이돌 매니저니 그냥 숙소에 쳐들어가서 발로 애들을 깨우고 등짝 스매싱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배우들 매니저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찾아 나유정의 집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기초화장만 한 것 같은 나유정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준형입니다."
꾸벅···.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 보니 꽤 화려할 것 같았던 여배우의 집이 의외로 단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그냥 차에서 기다리는 게 편한데···. 굳이···."
나유정은 차가운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상자 두 개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녀는 들어야 할 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짐의 존재를 알려주고 큰 방으로 들어갔다.
띵~
[안방은 들어오지 마시고요. 준비는 거의 다했으니 일찍 나가요. 들를 데가 있어요.]
'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문자로 통보한다고?'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무덤덤하게 답변을 달았다.
[편한 대로 하세요. 전 소파에 앉아 있겠습니다.]
언제 준비가 끝날지 모르니 글을 쓸 수는 없고 그냥 인터넷 기사나 검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별다른 이슈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하품을 하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음···. 첫인상이 진짜 차갑네. 성격이 원래 그런가? 집도 약간 휑한 것 같고···. 그나저나 나유정은 실물이 진짜 예쁘네. 실물 갑. 실물 갑 하던데 이유가 있었구나.'
같은 회사였지만 배우들은 회사에 들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녀를 오늘 처음 봤다.
그녀 앞에서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충격이었다.
정말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자연적으로 풍기는 사람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유정 씨는 빛이 안 나네? 아차차···. 내가 아까 비주얼 센터라는 연습생을 보고 기능을 꺼놨었지?"
나는 기능을 다시 켤까 생각했지만, 그냥 운전에 방해될지 몰라 관두기로 했다. 그녀는 이미 탑티어 스타인데 그 재능을 알아서 뭐하겠나 싶었다.
'잠깐! 아니지. 나유정을 보면 연준이랑 그 걸그룹 연습생의 아우라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있겠구나.'
나는 눈앞으로 손을 휙휙 가져다 대고 황급히 기능을 되살렸다.
그녀가 준비를 다 끝마쳤는지 안방에서 핸드백을 메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으윽···. 내 눈···.'
내가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고 있자 나유정이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말없이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정신을 수습하고 이내 바닥에 있던 상자를 들었다. 그리고 나유정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안.
이미 아우라를 보는 눈은 OFF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거실에서 본 나유정의 아우라 색깔은 역시나 추측대로 황금색이었다.
하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아우라가 뻗어나 올 줄 꿈에도 몰랐다.
'딴에는 연기 천재라 이거지? 그럼 색깔이 같은 연준이랑, 그 연습생도 연기에 재능이 있는 거겠네.'
나유정!
현재 27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 사극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 역할로 출연해 인기를 얻은 아역 연기자였다. 그 당시 어쩌면 주인공보다도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각종 CF에 출연해 상당한 부를 거머쥐었다.
한동안 TV에서 뜸하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어 성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영화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예산 영화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스코어인 팔백만 관객을 동원한 "내가 사랑한 그녀"에서 나유정은 4차원 주인공 역할로 열연하여 어려움 없이 1티어 스타 반열에 합류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별명은 정변의 화신.
우스갯소리로 아역 연기자들에게는 역변, 정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 대부분 아역배우가 성장을 하면서 외모가 달라져 주로 역변을 하는 것과는 달리 나유정은 정변, 아니 어릴 적보다 훨씬 예뻐져 나타났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정변의 화신이었던 것.
'정말 화려한 외모야.'
그녀는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 영화에서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쳐 연기력을 인정받은 후 드라마 주연을 하면서 CF계를 평정했었다. 그 일이 있기까지는···.
[지하 1층입니다.]
엘레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들고 있던 상자를 밴에 실었다. 운전대에 앉으니 스마트폰으로 문자가 왔다.
[여기로 가주세요. 주소······.]
또다시 문자로 대화하는 그녀였다.
'뭐야. 또 문자야? 아주 도도한 여잘세.'
나도 굳이 말을 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문자로 답변했다.
[알겠습니다. 목적지 접수했습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아까 블루투스로 페어링 해 놔서 그런지 시동을 켜자 슈퍼노바의 신곡이 차 안에 흐르고 있었다. 볼륨을 살짝 내리고 리어 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듣고 싶은 노래 있으세요?"
".........."
그녀는 나를 천천히 응시하더니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음···. 왜 매니저들이 어려워하는지 알겠네. 차가워도 너무 차갑군.'
자신이 담당하는 연예인과 유대감이 없다면 매니저는 그냥 운전기사 겸 잔심부름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유정 씨. 난 다른 매니저들하고 달라요. 난 당신한테 잘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쩔쩔맬 생각도 없는 웹 소설 1위 작가이자 임시 매니저라고···. 하하···.'
듣고 싶은 음악이 없으면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기로 했다.
'훗···.'
나는 말을 하기 위해 줄여놨던 볼륨을 다시 적당한 수준으로 맞췄다.
슈퍼노바의 훌륭한 보컬이 내 고막을 즐겁게 했다. 예전에는 아이돌 음악을 듣지 않았는데 직업이 된 후로는 거의 중독이 되어버렸다. 우리 테리우스 애들 곡도 괜찮았지만, 슈퍼노바의 곡은 정말 너무 취향에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나는 극히 대중적인 귀인듯했다.
내비게이션에 유정 씨가 알려준 주소를 찍고 밴을 출발시켰다.
10분을 달렸는데 그녀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후후~ 말을 안 하면 나야 편하지 뭐. 우리 애들하고 다니면 시끄러워서 진짜 고막이 터질 지경인데 조용하니 좋네. 운전하면서 스토리 구상이 되잖아?'
물론 운전하면서 전방은 잘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아무런 의견도 안 줬으니 그냥 내 맘대로 합니다. 오늘은 슈퍼노바의 노래나 듣자고요. 아가씨!'
마치 집사가 된 것처럼 속으로 대사를 읊었다. 노래는 약간 거슬릴만한 볼륨 크기였는데 나유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완전 꿀이네. 선곡은 내 맘이군. 좋네. 시커먼 놈들은 항상 각자 좋은 노래를 찾았다며 서로 들려준다고 난장판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나유정의 매니저로 전직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터치 안 하고 딱 각자 할 일만 하니 좀 건조하긴 해도 오히려 깔끔한 것 같았다.
나야 앞으로 작가의 길을 탄탄하게 걸어갈 사람인데 스타고 뭐고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다들 똑같은 인간일 뿐···. 오히려 의례적으로 말을 안 걸어주니 더 좋은 것 같았다.
차가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수제 향초 가게 직원이 무슨 꾸러미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꾸러미를 건네받고 차에 실었다. 그리고 최하나 작가와 점심을 하기로 한 식당으로 출발했다.
여전히 그녀는 얼음처럼 무표정이었고 차에서는 계속해서 아이돌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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