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 각성? (2)
나만 보면 깐족거리는 김실장에게 사이다를 날려주는 장면을 상상하니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야 인마, 넌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어. 너 거울 안 봤냐?"
문으로 들어온 내 사수 형택이 형이었다. 그는 손에 싸구려 주스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런 건 뭐 하러 사 와. 좀 있으면 우리 엄마가 더 좋은 거 가져올 텐데...."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그냥 예의라고. 넌 지금까지 나한테 뭘 배웠냐? 응?“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많이 안 그러는데 예전만 하더라도 빈손으로 가면 싫어하는 사람들 많았다. PD나 작가분들 소소하게 뭐라도 좀 드시라고 하면 얼굴이라도 기억해 주고 그랬었지."
".........."
"어우~ 들어오자마자 꼰대 소리 지리네."
메인 래퍼 창민이가 보호자용 베드에 앉으려다가 질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형택이 형은 아직 서른 초반인데도 꼰대 같은 말을 자주 해서 핀잔을 듣곤 했다.
"창민이 너는 그 성질 좀 죽여라. 넌 말하는 걸 한번 뇌로 걸러야 돼."
형택이 형은 박스에서 주스를 꺼내더니 뚜껑을 따서 자기가 먼저 마시기 시작했다.
"그, 그건 나 줄려고···."
"어, 그래. 미안. 자 옜다. 100% 오렌지 주스야."
그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주스 뚜껑을 따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이거 짝퉁 오렌지 주스잖아. 실제로 들어간 농축액이 10%도 안 될걸? 다 액상과당하고 첨가물이지."
"아냐. 여기에 100% 오렌지 주스라고 쓰여있잖아."
"그건 다른 과일을 안 넣고 오렌지즙만 썼다는 뜻이야. 거의 콜라 급으로 몸에 안 좋아."
"기껏 생각해서 사 왔더니만···. 내놔 인마!"
그는 손을 뻗어 내 주스를 뺏어 가려고 했다.
"에이~ 형. 나 콜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왜 그래."
"하여간 쓸데없는 것만 많이 알아요. 넌 좀 네 일에 도움되는 것 좀 공부해봐라."
"매니저 일에 무슨 공부 할게 있다고?"
"왜 없어? 엉?"
형택이 형이 흥분했는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 매니저 형들. 너무 시끄러워요. 저 독서 중입니다. 이거 너무 재밌거든요?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방해 좀 그만···."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연준이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화가 난 듯 말했다.
"어이고야. 톱스타 나셨습니까요. 너 인마. 내일부터 스케줄 뛸 준비나 해."
"아니! 형 나 팔 부러진 거 잊어먹었어요? 무슨 회사가 이래요? 형들 이거 진짜 악덕 기업 아닌가요?"
"·········."
테리우스 멤버들은 연준이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내 말이 맞지 않으냐며 형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어우. 부담스러워."
메인보컬 훈이가 연준이의 눈빛을 받고 고개를 휙 돌렸다.
머리도 안 감은 것 같은데 저런 외모라니. 아닌 게 아니라 테리우스의 센터 한연준은 너무 부담스럽게 잘생기긴 했다.
누나들의 마음을 저격하는 시원스런 얼굴과 저 초롱초롱한 눈빛에 뽀얀 피부. 그리고 키도 183㎝나 됐으니까.
우리 연준이하고 얼굴로 비빌 수 있는 건 케이팝 슈퍼그룹인 슈퍼노바의 에반과 요즘 정체를 드러낸 천재 프로듀서 케이 정도 되려나?
"연준아. 오늘 방송 찍고 왔잖아. 네가 없으니 비주얼에서 우리가 살짝 꿀리더라. 좀 무리가 되더라도 활동 잘 마무리하자."
리더인 영관이 연준이를 살살 달래는 중이었다.
"어? 어떤 팀 나왔는데?"
"블랙샤크 애들 나왔어."
"흠~ 블랙샤크라면 그럴 수 있지. 거기도 다들 얼굴 보고 뽑았잖아. 특히 그 누구야. 웹드라마 대박 난 멤버 있잖아."
"호영이?"
다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거 같자 내가 대신 알려줬다.
"맞아. 걔는 좀 눈이 가더라. 연기도 좀 잘하는 거 같고···. 에이 안 되겠네. 내가 부상 투혼 좀 발휘해야지.
테리우스가 어디 가서 외모로 꿀리고 다니면 안 되지. 명색이 얼굴로 뽑은 남돌 1위 아냐?"
연준이는 역시 나밖에 없는 거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마음을 바꿔 먹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밥 먹여주냐? 넌 춤 연습이나 더 하고 그런 소리를 해라. 얼굴로 뽑은 남돌 1위가 좋은 소리로 들리냐? 실력 없다고 돌려 까는 거잖아."
래퍼 창민이가 얼굴 이야기에 과민 반응을 하고 있었다.
메인 래퍼 창민이는 수려한 외모 때문에 실력에서 디스카운트를 받는 래퍼였다. 얼굴이 너무 곱상해서 래퍼로써 뭔가 이질감이 들었으니까.
본인도 그걸 아는지 그런면에서는 약간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다. 물론 욱하는 성격도 있었고.
"아니, 누가 나를 멤버로 넣으래? 기본도 안된 나를 무작정 가운데 꽂은 게 회사지 내가 언제 한다고 했어?"
"어휴, 저놈 말이나 못 하면···."
창민이도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막내 연준이에게 지쳤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얼핏 싸우는 것 같지만 서로 엄청 사이가 좋고 친해서 허물이 없어서 그런 것 뿐이었다.
"에이, 창민아. 솔직히 우리도 초반에 연준이 덕 좀 봤잖아. 그나마 이제 일 년 지난 그룹이 이 정도 인지도를 가진 건 우리랑 블랙샤크 정도밖에 없을걸? 심지어 최고기획사인 SJ 딥보이스도 2년 이상 지하에서 헤맸잖아."
역시나 중재를 하는 건 영관이 몫.
"..........."
그건 맞는 말이었다. 테리우스는 완전 쌩 무명 시절, 연준이의 외모 덕을 본게 사실이었다.
그의 외모는 여성팬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고, 의외로 실제로 보면 키도 커서 반전 매력까지 있었으니까.
나에게 처음 배정된 팀이 바로 테리우스였다. 테리우스는 나랑 같이 커왔다고 해도 무방한 녀석들이었고, 멤버 전원이 다들 인성이 좋았다.
같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기 같은 느낌이랄까? 우리는 정말 훈련소 전우조 같은 그런 사이였다. 물론 내가 테리우스 멤버들보다 나이가 몇 살은 위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나는 퇴원해서 어떤 웹소설을 써볼까 곰곰이 생각 중이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사고 후 뭔가 능력을 얻은 것 같긴 한데 그게 나한테도 적용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후천적 서번트 신드롬이라는 웹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가 있었다. 머리에 사고를 당한 후 특정 분야에서 천재가 되는 클리세인데, 혹시 나도 그런 능력을 얻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후천적 서번트 신드롬을 겪는 사람들에게 눈에 헛것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에휴~ 살아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쯧~'
사실 우리가 당한 사고는 상당히 큰 사고였다. 비록 다친 게 가벼워서 그렇지, 만약 운이 조금만 안 좋았어도 정말 끔찍한 일이 될 뻔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찰나,
"준형이 형. 준형이 형."
"으응?"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혹시 그거 생각 중이야?"
연준이가 손을 들어 타이핑을 하는 시늉을 했다. 또 웹소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아, 아냐 인마. 그냥···."
나는 다른 멤버와 형택이 형이 내 비밀을 알아챌까 봐 연준이의 말을 급하게 잘랐다.
"아니 뭔데? 너 혹시 다른 곳에 원서 넣으려고?"
형택이 형이 지레짐작하며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너 만약 사표 낼 거면, 나한테 무조건 먼저 말하고 내라."
"그건 또 왜?"
"내가 먼저 그만두려고. 너 없이 이 자식들 어떻게 케어하냐?"
"형···."
"왜 좀 감동했냐?"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나유정 씨 매니저 지원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니? 어떤 놈이 그런 헛소리를 해?"
형택이 형은 뭔가를 들켰는지 얼굴이 벌게져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형. 유정 씨는 형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덩치는 무슨 마블리 저리 가라면서···"
"네가 어떻게 알아. 한 번도 본적도 없으면서?"
"뭐야. 진짜 손든 거 맞나 보네. 와 배신감 오진다."
메인 보컬 김훈이 베드에서 벌떡 일어나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하네. 우리는 버리는 건가?"
"믿을 사람이 진짜 없구나. 이제는 준형이 형 밖에 없나 봐."
모두가 합심해서 형택이 형을 공격하고 있었다.
"야 이놈들아. 내가 명색이 이제 아빠가 되는데, 너희 데리고 전국을 누벼야겠냐? 엉? 1년을 해줬으면 좀 놓아줄 때도 된 거 아냐?"
"우와~ 이제 본심 나오시네. 나유정 씨가 좋으면 좋다고 하지. 무슨 애 핑계를 대냐? 너무하네."
멤버들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형택이 형을 계속 놀려먹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나유정 씨 건으로 말을 잘 돌린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연준이를 바라봤다. 자꾸 아우라가 눈에 어른거려 짜증이 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쓱 눈가를 훔쳤다.
'어라?'
연준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아우라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손바닥을 들어 눈을 한번 가렸다가 다시 내렸다.
'또 보이네. 뭐야. 이거 껐다가 켜는 방식인가?”
나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연준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게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쉿!’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갔다 대고 나서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발설하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연준이는 내 동작을 보더니 괴상한 얼굴로 ‘나는 모르겠는데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 저 녀석은 엽기적인 표정을 지어도 잘생겼네. 세상은 진짜 불공평해.’
나는 아직 이 아우라에 적응이 안 됐다. 머리가 살짝 어지럽자 천장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감든 말든 계속 누군가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멤버 5명과 전담 매니저 2명, 총 7명은 누군가 하나가 삐지거나 화를 낼 때까지 서로를 골려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마치 서로를 놀려먹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어? 그런데 한 명 어디 갔지? 생각해보니 이든이가 없네?’
직업병도 이런 직업병이 없었다. 이제는 항상 멤버 수를 체크하는 게 버릇이 된 것이다.
“형택이 형. 이든이는 어디 갔어? 숙소로 바로 갔나?”
정이든, 테리우스의 리드보컬이자 차가운 4차원 캐릭터를 담당하고 있는 약간은 음습해 보이는 냉미남이었다. 실제로 말수도 적고, 항상 혼자 음악을 듣거나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는 편이었다.
“아냐. 같이 왔어. 여기 병원 뒤쪽이 공원처럼 잘 돼있더라. 잠깐 음악 좀 들으면서 산책 좀 하고 들어온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아, 난 또 어디 흘리고 왔나 해서~”
“내가 너냐? 다 큰 애들을 흘리고 다니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정이든이 귀신처럼 문을 통과하면서 나를 보며 손을 들었다.
“그, 그래 왔냐?”
그는 귀에 무선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노래를 듣고 있는게 분명했다. 이든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아마도 머리는 괜찮은지 물어보는 제스쳐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입만 벌린 채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뭐야. 저 보라색 아우라는···.’
내 눈에 이든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왜 다들 색깔이 다른 거지? 뭔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달라서 그런 건가?”
나는 매니저였지만, 웹소 작가였기 때문에 내가 얻은 능력에 대해서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건 사골급 클리세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내 능력의 정확한 실체에 대해 추정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뭐 방송국에 가서 다른 사람을 보면 알게 되겠지. 특성을 비교해보면 되는 거잖아?’
이든이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걱정이 됐는지 앉지도 않고 계속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줬다. 그러자 그는 안심이 된 듯 메인보컬인 훈이 옆에 가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형들 너무 시끄러워. 나 독서해야되니까 얼른 숙소로 가. 응?”
연준이는 지금 읽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 너무 재미있는지 시끄럽게 구는 멤버형들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알았어. 인마. 안 그래도 좀 있다 갈 거야. 넌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러 올 거니까 준비 다 하고 있어.”
“아 씨~”
“그리고 준형이 너는 내일 퇴원하면 며칠간 쉬어라. 혹시 모르잖아. 아무래도 머리를 다쳤으니 후유증 같은 거 조심해야지.”
“알았어요. 형. 연락드릴게요.”
우리의 대화는 병원으로 들어오시는 엄마 때문에 황급히 종료됐다. 역시나 우리 엄마는 몸에 좋은 것들을 잔뜩 싸 들고 오셨다.
“어머. 이런 거 몸에 엄청 안 좋은데 누가 사 왔어?”
엄마는 짝퉁 오렌지 주스를 보더니 역시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형택이 형과 테리우스 멤버들은 우리 엄마의 끝없는 잔소리를 아는지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응? 다들 일은 다 본 거야? 숙소로 가려고?”
“네. 어머니. 준형이 괜찮은 거 같은데 이제 가보려고요. 며칠간 휴가를 줬으니 어머니께서 잘 좀 보살펴 주세요.”
“아휴~ 우리 형택이는 어쩜 이렇게 싹싹하니. 우리 준형이가 반만 닮았어도...”
“왜요. 준형이 형도 괜찮은데요. 차분하고. 누구처럼 호박씨도 안 까고~”
래퍼 창민이가 형택이 형을 노려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크, 크흠... 자자 이제 다들 숙소 가서 쉬어야지? 촬영하고 피곤한데?”
형택이 형은 멤버들을 챙겨서 금세 사라지고 나는 엄마한테 1시간 동안 잔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주치의에게 내 상태를 들었다. 극소량의 출혈을 동반한 뇌진탕이라는 소견으로 수술은 필요 없으며 쉬면 저절로 낫는다는 진단을 내려줬다.
그렇게 나는 퇴원 절차를 밟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직행해서 컴퓨터를 켜고 내가 몇 개 말아 먹었던 소설들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과일을 가져다주며, 또 그런다며 등을 후려치셨지만 나는 오늘 꼭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실험으로 난 나에게 생긴 능력의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일단 글이 엄청나게 빨리 읽어지고, 또 빨리 써졌다.
게다가 읽어보면 이게 잘 써진 글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일종의 통찰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이게 흥행이 될 것인지, 그저 그런지 아니면 망할 건지 어느 정도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쓰다가 만 소설들은 다 망조로 보였으니까.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망조가 든 작품을 엄청난 속도로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 미친 속도로 글이 좌르륵 써지기 시작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