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에필로그 5: Road to Stalingrad
3일간의 모스크바 투어는 어쩐지 싱숭생숭했다.
“참… 세월이란….”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역사 속에 묻히고, 내가 모르던 어린 사람들마저 다 늙어 버린 미래.
원래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 살아왔다지만 10년이 넘도록 쌓고,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스탈린의 기억들은 묵직하게 나를 짓눌러왔다.
눈길 두는 곳마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생소한 미래에 떨어진 과거인의 감정이 이러할까?
세계 최고의 선진국 겸 초강대국의 수도가 그저 옛스럽고 고즈넉하지만은 않겠지만 70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건너뛴 듯하니 컬쳐쇼크로 다가올 만도 했다.
‘창백한 죽음은 가난한 자의 문과 왕의 궁전을 똑같이 두드린다.’
강력한 소비에트 권력을 휘두르던 스탈린과 그 수하들, 후임과 후후임 서기장까지 죽었다. 마치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소련의 젊은이들이 대조국전쟁에서 무수히 죽어 간 것처럼.
무상한 권력, 무상한 세상. 어쩐지 내 안에 아직까지도 남은 스탈린은 스몰렌스크에 있는 기념관, 아들들이 그리운 것 같았다. 스탈린을 버리고, 세르고 베리야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걸어 들어간 스베틀라나조차도.
소련에 공헌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저 크렘린 벽 묘지에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의 묘지만큼은 없었다. 내게 존경 비슷한 감정을 품었던 흐루쇼프는 그 하나만큼은 내 부탁을 들어준 것 같았다.
‘나를 크렘린 벽 묘지나 영묘 같은 휘황찬란한 곳에 묻지 마시오. 그저 작은 유골함 하나에 내 잿가루를 담아 어딘가 시골 초등학교 근처, 수수한 비석 아래 묻어 주시오. 어린아이들이 내 비석 근처에서 뛰놀 수 있게. 나는 항상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생전에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적었소.’
‘다만 자그마한 오두막을 하나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가끔 누군가가 내 무덤에 온다면 잠시 쉬다 갈 수 있도록. 방문객들에게 나무 한 그루씩을 심도록 하는 것도 좋소. 한 그루씩 심기운 나무들은 언젠가는 함께 숲이 되어 자라날 것이오. 우리 소련 인민들이 함께 성장하듯.’
* * *
거의 70년이 지나 돌아온 모스크바. 옛 모습이 남아 있기는 하다지만 옛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새로 지어지는 마천루들 사이에 초라하게 남아 버린 미래도시.
그리고 그 미래도시의 수많은 건물들 중에서 가장 미래적인 것은 바로 이 역사(驛舍)였다.
“오… 대단한데….”
모스크바 외곽에 지어진 유리궁전 같은 이 건물 전체가 철도역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철도망이 모스크바 중앙역에서 전용 선로를 통해 <모스크바 고속철>로 모여들었다.
“여러분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이 역사는 소련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고속철도의 중앙역입니다. 2001년 도입된 초전도체 기반 자기부상 열차는 현재 소련의 주요 도시들을 잇는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최대속도 시속 750km/h를 달성하여….”
“와….”
“이 역사를 상공에서 볼 경우 소련의 국장인 낫과 망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열차들은 레닌그라드, 키예프,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의 주요 도시들로 향합니다.”
“으음….”
그걸 왜 그렇게 만들어…?
모스크바 곳곳에도 사이버펑크스러운 낫과 망치며 붉은 별이 널려 있다 싶었더니 이런 고속철도 역까지 그렇게 만들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전반적으로 내가 알던 것과 비교해 보면 경직되고, 음침하고 낙후된, 우리가 알던 소련―러시아의 분위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차라리 미래의 뉴욕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사실은 내가 알던 그 어떤 도시와도 달랐다.
깨끗하고 정돈된 도심과 그 안에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엄청나게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는 아니었지만, 구걸하는 사람도 소매치기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서는 알아채기 어려운 문제들이 어느 시대에나 그랬던 것처럼 소련과 모스크바에도 산적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잘 해결을 했는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일까?
* * *
“좌측을 보시면 소련 과학기술의 결정체! 자기부상 열차를 보실 수 있습니다.”
또 이제 뭐가 나올까? 놀라울 정도의 정숙성을 자랑하는 초음속 여객기, 만화에서나 보던 초전도체 자기부상 열차… 막말로 핸드폰 빼고는 다 잘 만드는 것 같았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자기부상 선로와 열차는 마치 SF 영화에서나 보던 그 모습이었다.
마치 물방울처럼 유선형으로 잘 빠진 열차 한 대가 LED 전광판을 몇 번 깜빡이더니 말 그대로 쏜살같이 출발했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더라면 워낙 조용해 저 열차가 출발하는지 아닌지도 몰랐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가속해 시야에서 사라진 열차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자니 발전한 과학기술이 체감되었다.
‘이걸 볼 때마다 좀 회의가 들긴 한데….’
주머니 속의 묵직한 벽돌 때문에 자꾸 바지춤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붙잡으며, 스탈린그라드 여행단은 미래도시로 가는 터미널 같은 역사를 지나 승강장으로 향했다.
“여행단 여러분들은 각자 배정된 좌석에 착석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보기엔 스탈린그라드보다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가 볼 게 훨씬 많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어쩐지 스탈린그라드로 간다는 것이 대단히 즐거워 보였다.
자기부상 열차에 올라타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너무 기대가 된다는 듯 자기네들끼리 속삭였다.
“내가 그런 데를 다 가 본다니….”
“나도 진짜 신기해. 어떻게….”
‘???’
스탈린그라드는 카스피해―볼가강의 수운과 흑해―돈강의 수운이 연결되는 수운의 요지이자 대규모 공업도시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이래로 제1 도시와 제2 도시의 역할을 해온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비하면 그저 시골 깡촌에 불과했다. 차라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하르코프나 우즈벡의 타슈켄트 같은 곳이 훨씬 크고 중요했지.
어쩌면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 때문인지, 소련 정부가 어지간히 스탈린그라드를 밀어주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터졌기에 스탈린그라드가 흥한 것일 수도….
하지만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열차는 지금 볼고그라드, 볼고그라드 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엥?”
볼고그라드? 거기가 스탈린그라드인데….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전광판을 들여다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도상에서 원래 스탈린그라드가 위치해 있어야 할 곳에 볼고그라드라는 이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열차는 볼고그라드가 목적지가 아니었는지 속력을 줄이지 않고 쾌속하게 역을 지나쳐 남하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던 승무원을 붙잡았다.
“저… 저기, 그… 이 열차가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열차의 목적지는 카자흐스탄입니다.”
“예?”
뭐지? 승무원은 러시아인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 버렸다. 카자흐스탄? 거길 왜 가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볼고그라드를 그냥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리낌없이 농담을 하고 웃으며 껄껄댔다. 나만 모르는 건가?
애써 용기를 내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스탈린그라드가 어디 있는 거죠?”
“음? 어디냐니?”
아저씨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냐는 듯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 * *
[셋, 둘, 하나… 발사!!]
[우리 왕복선은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로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띠를 꽉 매어 주시고 이륙의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으아아아아악!”
사람들은 몸을 뒤흔드는 우주선 발사의 충격과 중력가속도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초음속 여객기를 타고 올 때보다도 훨씬 빠르고 더 과격하게, 바이코누르 우주기지가 창밖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여행은 그저 소련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행성’ 화성의 대지 위에 소련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개척도시 ‘스탈린그라드’. 소련 우주과학기술의 승리이자 인류의 지평을 넓힌 전진을 선전하는 것.
우주왕복선의 조종사는 승객들에게 즐겁게 외쳤다.
“저기 보시면 세계 최대의 우주정거장, 미르―6이 보일 것입니다.”
우주의 끝없는 어둠을 배경으로 몇 개의 은색 구조물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다 우주정거장인가?
조종사는 소련의 놀라운 과학기술력을 선보이는 것이 그저 자랑스러운지 우주 배경에 소련이 설치해놓은 수많은 구조물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다들 고개를 드시면 그쪽 방향에서는 마찬가지로 세계 최대의 우주망원경인 코룔로프 망원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들 코룔로프 박사의 이름은 들어 보셨습니까?”
미르―6 정거장, 코룔로프 망원경. 이름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 물건들이 왕복선 바깥을 스쳐 지나갔다.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달을 한 바퀴 돌며 가속을 얻어야 합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달의 뒷면을 직접 본 적이 없으시겠지요? 다들 사진으로나 보셨겠지만….”
이번 기회에 눈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조종사는 그렇게 외치며 우주선을 한 번 더 가속시켰다.
우주방호복 안에서 아찔하게 눈이 돌아가는 감각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롤러코스터라도 타듯 즐겁게 소리를 질렀다.
“몇몇 사람들은 나치의 잔당들이, 특히 끝까지 유해를 찾지 못한 히틀러가 달로 도망쳤다고 생각합니다만… 저희가 달을 돌아본 결과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도 직접 눈으로 보시지요. 하하하하!”
달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달 뒤편의 자그마한 기지들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련이 세운 월면 개척기지들이 옹기종기 달 뒤편의 바다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한 지구는….
‘아름답다….’
우주는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르다. 흰 구름들과 푸른 대양,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대륙들까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실제 역사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이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만큼은 알 것 같았다.
어두운 우주공간을 쏜살같이 날아, 별들의 대해를 지나면서도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종사 역시 승객들을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하, 저도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감동스럽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지구에서 우리 모두 평화롭게 함께 잘 살 수 있으면… 아! 승객 여러분! 오른쪽을 보십시오!”
새카만 저편에서 붉은 점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행성’….”
“저곳이 바로 화성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지인 ‘붉은 도시’ 스탈린그라드가 위치한 곳이지요. 그럼….”
붉은 지표에 자그마하게 보이던 도시는 눈 앞으로 점점 다가오며 거대하게 팽창했다.
인간이 지구에서 가장 멀리 발을 내딛은 이곳, 스탈린그라드. 입 밖으로 무슨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가슴 속에서 함성이 끓어 나올 뿐.
“소비에트 우라! 우라! 우라!”
《나, 스탈린이 되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