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에필로그 3: 백 투더 퓨처
53년, 혹은 54년이나 55년쯤 되었을까?
“억…!”
갑자기 찾아온 천둥 치는 듯한 두통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희미하게 주변에서 사람들이 의사를 찾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이 내 의식은 희미해졌다.
“헉! 헉… 헉….”
숨을 헐떡이며 깨어난 곳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곳.
내가 스탈린의 몸 안에 들어가기까지 살던 작은 고시원 자취방이었다. 후덥지근한 자취방 안에서 뻘뻘 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이… 이게 무슨… 꿈인가?”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41년부터 50년대까지 거의 10년이 넘는 꿈을 그렇게 생생하게 꿀 수도 있나? 아니면 나는 그저 그런 꿈을 꾸었다 생각하는 것뿐일까?
꿈이라면 정말 재미있는 꿈이었다. 10년이 넘도록 세계 최강의 권력자로 군림하며 세상을 내 마음대로 뜯어고쳤던 것이 재미있지 않으면 뭐가 재미있을 수 있을까? 그것이 일장춘몽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허무할 따름이지만.
하지만 곧 그 생각은 바뀌어야만 했다.
“…저게 내 방에 있었나…?”
방구석에 한 무더기 대충 던져 쌓아 놓은 옷가지들이 어쩐지 다르게 보였다.
“이게 뭐지…?”
대충 파헤쳐 보니, 내가 원래라면 입었을 리가 없는 옷가지들이 나왔다. 인민복 비슷한 디자인들을 대체 왜 입겠는가?
방 안에서도 은근히 달라진 것들이 있었다. 150만 원을 주고 비싸게 맞췄던 내 컴퓨터는 어딘가 디자인이 많이 후져 보였다. 모니터도 원래 있던 것보다 작아 보였고, 결정적으로…
“뭐야 씹….”
핸드폰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이 벽돌은 뭐지? 솔직히 벽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스마트폰 비슷한 것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내가 21세기에서 알았던 그 ‘슬림형 핸드폰’ 같은 것과는 확실히 다른 두께였다.
핸드폰을 보니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진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내 컴퓨터 키보드며, 핸드폰 위에 붙어 있어야 할 로고가 키릴 문자인 것부터가 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게 확 체감되었다.
“씨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우우웅. 저런 인민복을 입고는 나가고 싶지도 않아 일단 컴퓨터를 켰다.
“세상에….”
부팅화면에 뜨는 <окно(창문) 10>이라는 글자부터가 충격적이었다.
내 원래 기억과 스탈린의 기억이 둘 다 남아 있어 키릴 문자를 읽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이 세계가 뭔가 바뀌었다는 것은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구글도, 크롬도, 윈도우도 없는 세상이라니? 거기다 저런 패션 테러리스트 같은 옷을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세상이라니.
다행인 점은 SSD나 광랜 같은 건 개발이 되었는지 인터넷 속도만큼은 원래에 못지않게 빨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알아보기 위해서 검색을 하려다가 뭘 어디서부터 알아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얼어붙은 것을 빼면.
“하….”
위키피디아 같은 게 존재하기는 하려나? 영국이 그 짝이 났는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여전히 출판을 하고 있으려나?
컬쳐쇼크 덕에 앉아 있기도 어질어질했다. 일단 이 후덥지근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 옷가지를 뒤졌다.
“이건 한 벌 있네….”
으음. 어쩐지 청바지를 보니 이 세계에서 살아온 내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저걸 사려고 얼마나 열심히 생활장학금을 한 푼 두 푼 아껴 모았던가?
‘…생활 장학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대학 등록금은 원칙적으로 무료니,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겐 생활비 조로 생활 장학금을 지급한다…
으음. 좆같은 대학 등록금이 없어졌다니 그건 좀 긍정적인 변화 같은데.
원칙적으로는 생활비며 학업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했지만 거기서 간신히 한두 푼씩 모아 산 프랑스제 청바지는 내가 제일 애지중지해온 패션 아이템… 인걸로 기억이 났다.
일단 학교 도서관에 가 보자. 도서관에서 역사 파트를 뒤지면 뭔가 좀 알 수 있겠지?
처음 스탈린 몸에 들어갔을 적처럼 온갖 기억이 뒤섞여 쏟아지는 바람에 어지러워 비틀거리면서도 옷을 대충 입었다.
밖으로 나온 풍경은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생소했다.
‘편의점이 없네….’
고시원 1층에 있던 편의점도 없고, 그 자리에는 대신 영 후줄근해 보이는 잡화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도로 양편으로 있던 건물들도 어딘가 위치가 어긋나 있거나, 영 다른 간판들이 달려 있었다.
학교로 가 보자. 학교로….
이렇게 바뀐 세상에서도 원래와 비슷한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도 그 위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속이 답답하게 타는 것 같아 일단 뭘 좀 마시고 싶었다.
“어디 볼까….”
원래 편의점 자리에 있던 잡화상점에 들어서자 이 역시 생소한 풍경.
냉장고에는 이것저것 음료수들이 있었지만, 내가 알던 익숙한 것들은 없었다. 코카콜라가 그새 망한 것일까?
대충 호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콜라 비슷해 보이는 걸 사서 한 통을 까자 시원한 그 맛이 느껴졌다.
“크으으….”
아, 어쩌면 소련이 코카콜라를 인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약초 향 비슷한 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내가 아는 콜라의 그 맛이었으니.
아무튼 정말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고 싶었다.
* * *
“…? 이게 다 뭐지…?”
일단 학교로 가는 길은 원래와 비슷한 것 같았는데, 위엄찬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날 가로막았다. 원래 이 자리는 공원이었는데….
좀 더 걸어가자 졸졸 흐르는 개천이며, 돌로 된 다리까지 보였다. 안 그래도 머릿속에서 지금 세계의 기억과 저쪽 세계의 기억이 뒤섞인 탓에 도서관 건물이 어디인지도 기억을 못 하겠는데, 이 모습을 보자 더 혼란스러워졌다.
원래 연극을 하는 소극장들이며 대형 상권으로 각종 프랜차이즈들이 쫙 깔려 있던 이 동네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옛날식 대학가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 캠퍼스가 있던 개천 저편을 바라보자,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아….”
지나가던 학생들이 뭐 하는 촌놈인가 싶어 흘끗흘끗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 동양에서 가장 거대한 대학건물이라고 했지?’
소련이 60년대에 지어주었다는 본관 건물은 그야말로 웅장한 크기로 사방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위 ‘스탈린 양식’의 마천루는 대학건물이 아니라 마치 어디 제국의 박물관 같은 느낌을 풍겼다.
대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도서관은 저 본관 한쪽 구석탱이에 있다.
빨리 가서 알아봐야지 하는 생각에 앞뒤 안 가리고 뛰는데, 옆에서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도서관 가냐?”
“…엥?”
내 친구놈, 원래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동기로 대학 생활을 함께해 온 놈이 내가 도서관을 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내 행실이 여기라고 크게 바뀔 리는 없었으니 도서관을 가는 게 충격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나 잠깐만… 좀 볼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던가. 근데 너 씨, 축하턱은 내야 한다? 낄낄낄.”
“???”
축하턱? 그건 또 뭘까.
아무튼 도서관은 좀 시원했다. 사서의 눈치를 보며 콜라를 한입에 다 들이키고, ‘역사’ 라벨이 크게 붙은 서가로 가서 책을 한 무더기 꺼내자 다시 눈치를 주었지만.
“아… 보고 다시 꽂아둘게요….”
크흠. 일단 <소련 약사(略史)>를 꺼내어 목차를 보자 달라진 게 확 실감이 났다.
“…?”
목차는 심플하게 레닌 시대, 스탈린 시대, 흐루쇼프 시대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만 흐루쇼프까지는 내가 아는 이름이지만 그다음에 나온 이름이 생소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페트로프? 페트로프는 누구야?”
고르바초프 이후의 서기장은 모를 만도 했지만… 페트로프라는 이름은 너무 흔해서 누가 누구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페트로프… 붉은 군대의 이등병 소총수에서 시작해 서기장에 오르다.”
역사 서가에 다시 가 보자 ‘레닌 평전’ ‘스탈린 평전’ 옆에 ‘페트로프 평전’이 꽂혀 있었다. 겉면에는 웬 순박해 보이는 장년 아저씨의 얼굴이 박혀 있었는데 본 듯 만 듯,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세계의 기억 때문일까? 평전을 대충 펼쳐 보아도 익숙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확실히 브레즈네프와 비슷한 사람도 아니었고.
“엥?”
그리고 읽다가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눈길이 확 끌렸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스리마일 발전소 사고?”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적힌 생년이 우리가 아는, 핵전쟁을 막은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와 다른 것으로 보아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서기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출셋길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터진 스리마일 폭발사고 구호를 위해 출동하다.
원자로의 멜트다운 때문에 미 동부가 방사능 지옥이 될 뻔한 것을 막아 낸 것은 소련에서 파견한 특공대가 방사능과 열기 때문에 지옥처럼 변한 지반을 파헤쳐 증기폭발을 막아 낸 덕분이다….
한 챕터 전체가 ‘스리마일 전투(Battle for Three mile)’ 당시 소련이 옛 혈맹을 지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다루었다. 아마 이들이 없었으면 강줄기로 연결된 미 동부 지역과 북대서양까지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거라고.
“이는 맥아더 정권의 대표적인 실책 중 하나로 임기 중 소련이 이루어낸 과학기술적 성취를 모방하려는 무리한 시도 끝에….”
그리고 여기서 맥아더가 등장했다. 생각해 보면 뱅가드 로켓의 무리한 발사도 있었고, 자기네도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는 매카시도 있었다.
그 결과물이 현실의 체르노빌 수준으로 폭발한 스리마일이라니…. 내가 닦달한 덕분에 원자력이라면 편집증적으로 안전을 도모했기에 소련 체르노빌은 애초에 설치되지도 않았고, 터지지도 않았지만 미국에서 훨씬 크게 터져 버렸다.
‘그리고 이후 미국은 스리마일 폭발사고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6차 국공내전에 개입하며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 스리마일 폭발사고는 그렇다 쳐도 6차 국공내전? 이 자식들은 대체 얼마나 치고받고 싸워 댄 거지?
세상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것 같았다. 이게 1980년대의 일인데 6차 국공내전이면 얼마나 치고받았단 말인가?
곳곳에서 모르는 전쟁 이름, ‘6차 국공내전’이니 ‘3차 일본내전’이니, ‘볼리바르 독립전쟁’, ‘파나마 탈환전쟁’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세계 평화는 내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도래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뀐 세상에 태어나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고 여전히 전쟁을 한다니.
그렇게 씁쓸함을 곱씹을 때쯤, 바지 허리춤에 대충 찔러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뭐지? 꺼내 보니 이상한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여행권 당첨자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