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296화 (296/300)

# 296

에필로그 1: 제20차 전당대회

흐루쇼프는 훤히 벗겨진 이마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기장 동지, 제가 진짜 이걸 해도 되겠습니까?”

“이제 나는 서기장 아니라니까?”

“….”

아마 죽는 날까지 나를 서기장이라고 부를 것 같긴 하지만 흐루쇼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기… 아니, 크흠…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 말고, 가급적이면 주가슈빌리 동지라고 부르는 게 좋지 않겠나?”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소련 공산당 내 그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게 되었다. 서기장 자리도, 그보다는 조금 덜 사용되었지만 명목상 국가원수인 소련 장관회의 의장 자리도 다 내려놓았다.

나는 이제 그저 공산당의 늙은 평당원 이오시프 베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로 돌아왔다.

‘스탈린’은 말 그대로 소련 권력의 상징이었다. 내가 그 권력을 내려놓은 이상 나는 더 이상 스탈린이 아니다.

주가슈빌리, 주가슈빌리. 그 생소한 이름을 흐루쇼프는 입 안에서 몇 번 굴려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니키타 흐루쇼프 동지가 제20차 전당대회 개회사를 낭독하시겠습니다. 모든 당원들은 기립하여 흐루쇼프 동지를 환영하여 주십시오!”

“잘 하고 오게.”

“…감사합니다. 스… 주가슈빌리 동지.”

뚜벅 뚜벅 뚜벅.

새로운 소련 권력이 단상에 올랐다. 입단속을 어느 정도 한 바람에 사람들은 흐루쇼프가 개회사를 낭독하러 오르는 것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하지만 감히 스스로 신성불가침이 된 지도자 스탈린이 점찍은 후계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차마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소련의 인민 여러분! 그리고 공산당 당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 시대에 앞서 소련의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열렬한 박수가 사그러들자 흐루쇼프는 준비한 개회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제20차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당의 지도부와 당직자를 선출하는 자리였다. 당의 지도부, 즉 서기장 및 정치국원들을 새로 뽑아 새 시대를 대비하는 것.

하지만 당정일체인 소련에서 당의 권력 이동은 조금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에서 당은 곧 정부였다. 서구식으로 따지면 당 서기장은 그저 당직자들의 수장이었지만, 소련에서는 사실상 국가원수니 이 자리는 총선 겸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곳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앞서… 우리는 함께 수많은 역경을 겪고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먼저 간 당의 선배들과 동지들을 위해 짧게 묵념합시다.”

“일동, 묵념!”

인터내셔널가가 낮게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남은 고참 당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 스탈린의 손으로 보내 버렸으니.

모든 식순에는 다 치밀한 고려가 깔려 있었다. 아마 지금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흐루쇼프가 진행할 점진적 탈―스탈린화를 겪다 보면 눈치를 챌지도 모르겠다.

“저는 이 자리의 개회사에서 우리 소비에트 연방과 전 세계 사회주의 공동체들이 앞으로 나갈 길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불이 꺼지고, 흐루쇼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무대 뒤편에 위치한 스크린에는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이쯤 되면 가장 둔한 자들도 차기 권력자가 흐루쇼프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을 것이다. 감히 자기가 뭐라고 소련 공산당이며 세계 사회주의 세력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가! 그걸 하려면 최소 다음 서기장 정도여야 가능했다.

[셋… 둘… 하나…]

[꺄르륵 꺄륵]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나오기 시작한 영상에선 아이들이 푸르게 펼쳐진 언덕에서 활짝 웃으며 뛰놀았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은 흰 구름이 떠가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뛰어갔다. 그 위로 행복하게 웃는 ‘모범적 소비에트 가정’의 얼굴이 겹쳐지고, 호탕하게 웃는 노동자들, 군인들, 농민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 착취자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실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인민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소련 공산당이 나아갈 노선을 이렇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두두두두두둥 쾅!

웅장한 배경음악이 울려퍼지며, 웃는 사람들의 영상들이 사라지고 한 줄의 문장이 스크린에 올라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인민에게는 풍요를! 사회에는 자유를! 세계에는 평화를! 소비에트, 우라! 우라! 우라!”

“우라! 우라! 우라!”

* * *

“잘 있으시게. 다들.”

“…주가슈빌리 동지!”

“흐루쇼프 서기장 동지도 앞으로 노고가 많으실 테니 건투를 바랍니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노선이 발표되고 스탈린에서 흐루쇼프로 서기장 직위가 이양된 제20차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는 떠날 것을 선택했다.

단순히 권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을 떠나는 것을.

“아, 오셨습니까! 스탈린 씨!”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건… 두 번째로군요!”

그리고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러 온 반가운 얼굴. 그 사이 햇빛에 타서 구릿빛으로 얼굴이 시커매진 월리스가 있었다.

내가 집짓기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 제안을 월리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자기가 물려받은 농장과 가산을 털어 <해비태트 포 휴머니티>라는 단체를 창립한 그는 세계 곳곳 낙후되고 가난한 곳에서 집짓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도 이제 한 사람의 기부자이자 봉사자로 저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고.

“저는… 이제 스탈린 말고 본명인 주가슈빌리로 불러 주시지요.”

“그러는 게 좋을까요? 아무튼… 갑시다!”

월리스는 대통령일 때보다 지금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그의 성정에는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인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독선적이고 네 편 내 편의 구분만큼은 확실한 맥아더라면 상상도 못 했겠지만, 미국의 도덕성을 상징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소련이 지금 내세우는 차별 반대, 성평등, 세계 평화 등을 실천하는 파트너가 바로 누구였던가!

아무튼 월리스를 모시고 왔던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날 향해 손을 흔들던 정치국원들이 점 같은 크기로 작아지고 아름다운 모스크바도 점점 작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월리스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그런데 진짜 가능하시겠습니까?”

“무엇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집짓기지요! 저도 해 봐서 아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랍니다! 하하하하하, 스… 아니, 주가슈빌리 동지처럼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은….”

오래된 친구처럼 농담을 던지는 월리스는 나 같은 틀딱은 집을 짓는 게 제법 어려울 거라며 낄낄 웃었다.

“호오… 한번 가서 봅시다. 제가 인민의 스타하노프 운동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죠.”

“예? 하하하하하!”

비행기는 기수를 틀어 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식민 열강이 갈가리 찢어 네 것이요 내 것이요 싸워 댔던 눈물의 대륙 아프리카를 향해.

‘그러고 보니 아직 슈바이처 박사는 살아 있을 텐데….’

한번쯤 만나보고 싶기는 했다. 평생을 그렇게 헌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기도 했고.

다만 그래도 나은 점이라면 이 세상에서는 프랑스에서 공산당이 집권하고 식민지를 놓아 준 덕택에 서아프리카 지역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다는 정도? 영국이며 포르투갈이며 벨기에가 끝까지 못 놓겠다고 싸우는 남아프리카는 여전히 지옥도 비슷한 곳이었지만.

“지금 해비태트 운동은 전 세계 16개 국가에서 집짓기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더 확대하고는 싶지만 자금이나 이런저런 쪽에서 여력이 부족한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기야 하겠지. 상임이사국이라고 꺼드럭거리면서도 유엔 분담금을 까먹는 맥 모 씨 덕에 유엔 재정이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거기에 진행되는 사업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천연두, 소아마비, 한센병, 말라리아 박멸사업은 말 그대로 인류가 치러 온 전쟁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백해의 아르한겔스크에서 남미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까지 설치된 지역 진료소들은 질병이 발생하면 즉시 지정된 보고체계를 통해 제네바의 WHO 중앙으로 보고했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을 훈련시키고 배치하여 자료를 집계하는 것만 해도 수억 달러의 예산이 들어갔다. 아무튼 이렇게 질병 발생을 찾아내면 실제 역사에서 그랬듯, 유행지역의 가장자리부터 포위섬멸하듯 백신을 접종하고 전파를 차단해 박멸하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질병을 이 지구상에서 박멸했다! 이 얼마나 역사적인 일일까?

WHO는 선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소련 역시 그 1등 공신으로 이름을 올리기 위해 협조했고. 그러니 해비태트 사업처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고’, ‘덜 간지나는’ 일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다만 총재님이 워낙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덕에 부족한 자금으로도 어찌어찌 꾸려나가는 중입니다.”

“예? 총재는 월리스 씨 본인 아니셨습니까?”

“아니, 이거 주가슈빌리 동지가 모르는 일도 있었습니까? 하하하하!”

총재라니? 자기 전 재산을 쏟아부은 전직 대통령을 제치고 총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릴 수 있었다.

“…제 소개는 제가 직접 하려 했습니다만, 각하. 선수를 치시다니요.”

“미안합니다, 마셜 원수. 하하하하!”

“마셜 원수?!”

깡마른 체구에 까마귀처럼 까악대는 목소리.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비행기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전 미국 육군원수 조지 마셜은 스윽 하고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스탈린 동지.”

“의외로군요… 마셜 원수.”

“마셜 원수 말고… 그냥 조지라고 불러 주시지요.”

마셜은 쓰게 웃었다. 맥아더에게 축출당한 이래로 그는 더 이상 미국 육군 원수라고 불리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럼 저도 이오시프라고 불러 주시죠. 허허허.”

“다들 저만 빼놓고 이러기입니까? 그럼 저도 헨리라고 불러 주시고 조지는….”

“아니오. 월리스 씨. 당신은 저를 마셜 총재라고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쩝. 월리스는 혀를 차면서도 낄낄 웃었다.

“그나저나 지난 대전의 용사들이 이렇게 다시 모였군요. 사실상 미국과 소련의 전쟁 총책임자들 아니십니까?”

그러게. 마셜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다.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미국의 사기적인 보급과 병참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 20만도 안 되던 잡병들을 800만 명의 병력과 6만 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한 대군으로 만들어 낸 사람. 모든 승리의 뒤에는 원활한 보급이 있었듯 미국의 승리 뒤에는 마셜이 있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싸우러 갑시다. 조지, 당신이 우리 후방을 맡아 준다면 참 든든하겠군요.”

“예? 무엇과 싸운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이 세상에 만연한 가난과 절망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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