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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94화 (294/300)

# 294

294화

국회의 탄핵안 논의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 국회 앞 유니온 스퀘어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농성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세운 ‘새로운 자유의 여신상’은 꽃다발을 걸고 진짜 여신처럼 시위대 위에서 사람들을 자비롭게 굽어보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단식을 시작한 스물한 명의 대학생과 노동자들, 공산당 활동가들은 이제 슬슬 하나둘씩 의식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물과 소금만을 마시며 며칠을 굶어 온 이들의 몸은 앙상하게 마르기 시작했다.

눈빛만큼은 좀 더 빛났지만.

[미합중국 정부는 지금 시간부로 계엄령을 발효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미합중국 정부는 지금 시간부로 계엄령을 발효합니다.]

하지만 곧 어디 있는지 모를 스피커에서 싸늘한 소리가 들려오자 시위대는 얼어붙고 말았다.

“계, 계엄령?”

“그게 뭐여? 이게 무슨 소리여?”

[불법 폭… 시위대들은 지금 즉각 해산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시위대들은 지금 즉각 해산하십시오.]

“개소리 집어치워! 맥아더가 내려올 때까지 우리는 여기를 지킨다!”

“우우우! 꺼져라! 꺼져라!”

“대체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동안 경찰들은 시위대에게 친절하게 대해 왔다. 경찰이라고 모두 맥아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고, 또 젊은 대학생들에게 동정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게 아니라 해도 굳이 평화적으로, 국회의사당 앞 공원을 점거농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폭력사태를 벌이지 않는 시위대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최소한 시위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전차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할 때까지는.

[현재 미합중국의 안보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련의 지령을 받은 미국 공산당은 불온세력과 시위대를 동원하여….]

“지금 전차 소리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전차라니… 설마….”

시민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시위 농성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국민의 손으로 옹립된 민주 정부가 어찌 감히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겠습니까! 보십시오! 경찰들도,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우리의 편입니다!”

“옳소! 자유의 비밀은 용기뿐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폭도들은 해산하라! 폭도들은 즉각 해산하라!]

빠바밤 빰빠빰!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의지로 무장한 사람들도, 어디선가 뜬금없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당황하고 말았다. 전차 엔진의 굉음 사이에 간간이 섞여 들려오는 말의 푸르릉거리며 우짖는 소리.

기병들의 선두에 선, 딱 봐도 고집불통에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자가 군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7연대! 전원 착검!”

* *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스탈린에서 흐루쇼프로의 권력 이양은 그저 나 한 사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가졌던 강력한 권위를, 흐루쇼프는 행사하지 못한다. 스탈린은 소련의 창업공신이요, 소련 관료제를 창조해 낸 창조주지만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후광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나만큼의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다.

하여 내가 그 앞길을 정리해 주어야 했다. 국내외에 널린 ‘작은 스탈린’들, 즉 권위주의적인 골수 스탈린주의자들을 내 손으로 쳐내어야 흐루쇼프가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그들과 씨름하며 보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헝가리의 라코시 마차시,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몽골의 허를러깅 처이발상. 이 셋은 내가 미리 손을 쓰도록 하지. 자네는 천천히 나머지 소위 ‘스탈린주의자’들을 쳐내거나 손에 쥐도록 하게.”

“예! 예! 서기장 동지….”

“그리고… 자네가 사용할 수 있는 패들은 적지 않네. 문화적 개혁―개방과 자유화, 생활 수준의 전면적 향상, 마지막으로는….”

딸꾹. 흐루쇼프는 너무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문화적 개혁개방이라니! 이 말을 스탈린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뭐, 애초에 미국 영화를 수입하고 ‘자본주의 물건’들을 소련 내에 쭉쭉 뿌린 것부터가 문화적 자유화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말하고 예술을 할 자유를 점점 더 풀어 나가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훨씬 더 자유로운 곳이 될 것이다.

“계속 듣게. 마지막으로는… 굴라그 수감자들의 석방과… 부끄럽게도, 내가 숙청한 자들을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복권시키도록 하게.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은 필요할 걸세. 하지만 만약 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잘 써먹도록 해.”

“!!!”

“스스로 평가해 보자면, 내가 한 일은… 잘 쳐주면 공이 7, 과가 3일세. 누군들 공과가 없겠냐만, 내가 저지른 일들이 워낙 크니 그걸 잘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자네 시대는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네. 이것도 한번 읽어 보게.”

흐루쇼프는 황송하다는 듯 내가 준 문서 뭉치를 받아들었다.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음. 내가 한 자 한 자 직접 쓴 내용이네. 필요하다면 내가 은퇴하기 전에 내가 썼다는 사실을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공증을 하도록 하지.”

꿀꺽. 그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실제 역사에서는 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직접 발표하며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맹공했던 문건이다.

이걸 직접 들은 사람 중 몇은 심장마비에 걸렸고, 또 몇은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고 하지만, 스탈린이 직접 썼다면 어떨까?

마르크스가 어떻게 ‘개인 숭배’를 비판했고, 스탈린주의 체제가 얼마나 과격하게 필요 없는 피를 흘리게 만들었는지를 문건에서는 다루고 있었다. 대놓고 스탈린을 깎아내렸다간 흐루쇼프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테니 어느 정도 비판의 고삐는 쥐고 있었지만 결론은 똑같다.

‘스탈린은 무과오의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본인 스스로까지 인정해 버린 수많은 과오들이 있는데 어찌 스탈린의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겠는가?

어쩌면 이 세계의 미래 학자들은 전기 스탈린주의와 후기 스탈린주의를 분리해 생각할지도 몰랐다. 편집광적으로 날뛰며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잡아 가둔 전기의 스탈린과 독소전을 계기로 대오각성해 온건하게 돌아선 후기 스탈린으로.

그 어떤 해석을 소련 정부가 조장하든 간에 한 가지만은 확실하면 됐다.

“모든 정치는 인민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내가 시행했던, ‘많이 과격한’ 정책들은 실상 인민을 위했다기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핑계로 저지른 일들이지.”

이제 이런 말에는 익숙해졌는지 흐루쇼프는 가쁜 가슴을 진정시키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쩐지 불쌍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할 경우 숙청이 예정된 사회에서는 죽지 않기 위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 이겨서 정권을 되찾고, 보복당할 염려가 없다면 권력이양의 과정은 훨씬 부드러워진다.

다만 현재의 소련처럼 극히 경직된 사회에서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은 심한 진통을 동반했다. 구체제의 권력자들은 새로이 바뀐 체제에서 밀려날까 봐, 처벌당할까 봐 변화에 극렬히 저항하고 더 빠른 개혁을 원하는 급진파들은 계속 속도를 낼 것을 주장하며 양쪽에서 권력을 뒤흔든다.

양쪽을 적절히 조율하며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어려웠다. 그나마 실제 역사의 등소평은 당 원로의 권위도 가지고 있었고, 모택동의 문혁이라는 실책 덕에 자기 뜻대로 개혁을 끌고갈 수 있었다.

‘천안문으로 스스로 자폭하고 말았지만.’

그나마 성공적으로 사회주의에서 개혁개방을 했다는 중국도 천안문 6.4항쟁이라는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그 이후 인민을 짓밟아 본 경험은 중국을 더 타락시켰고.

* * *

기병대가 신속하게 시위대를 짓밟은 데 비해 전차의 대오는 쉽게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지 못했다.

[3중대! 3중대! 빨리 동쪽을 봉쇄하지 않고 무슨 일인가!]

“….”

‘새로운 자유의 여신상’은 기병돌격으로, 잔혹하게 군홧발 아래 짓밟혀 흰 조각만을 남기고 산산이 부서졌다.

시위대는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치면서 저항했지만, 우악스러운 해병대 병사들은 그들의 양팔을 꺾어 바닥에 눕혔다.

그들은 이들이 모두 소련의 지령을 받은 폭도로 교육을 받았고, 미국의 안보를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하는 이들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전차병들 역시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없었다.

‘저 사람이 공산당 간첩에 폭도라고?’

“장… 장애물이 있어 진입이 불가능하다.”

[장애물을 우회할 수는 없나?]

한 명의 평범한 남자는 수 대의 전차를 막고 그냥 서 있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팔에는 갈색 봉투를 든 평범한 남자가.

“우… 우회를 시도하겠다.”

전차는 쿠르릉거리며 그를 피해 지나가려 했지만,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 남자는 번번이 전차가 움직이는 길로 움직여 진로를 가로막았다.

깔아뭉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켜 주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전차들은 도저히 진격할 수 없었다.

“어… 어! 어!”

남자는 이제 전차로 저벅저벅 다가와 전차 안의 병사들에게 말을 걸려 했다. 큐폴라 밖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저 순박할 뿐.

[당장 떼어내고 진격해라! 명령이다!]

“….”

“이봐요! 나는….”

전차장은 도저히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뭐가 진실이지?

아무리 보아도 무력하게 짓밟히는 저 시위대들은 ‘폭도’가 아니었다.

공산당, 소련의 간첩인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보아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 마주치는 이웃 아저씨 같은 얼굴. 아득하게 멀리서 무슨 말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진격하라! 진격하라! 당장 진격하라!]

마침내 다른 병사들이 와서 뭐라 뭐라 외치는 평범한 남자를 질질 끌어갔다. 흰 셔츠의 남자는 발버둥을 치면서 저항했지만 훈련된 병사들 몇 명의 완력을 혼자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갈색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며 음식물들이 굴러 나왔다. 사과, 베이컨, 팬케이크 가루… 어쩌면 그는 진짜로 평범한 미국 가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나가다가 시위대의 구호를 보고 합류한.

어쩌면 저조차도 다 위장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죄책감이 들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위장. 전차의 궤도가 남자가 흘리고 간 봉투와 내용물들을 짓이겨 버렸다.

“…장애물은 제거되었다. 진격하겠다.”

[신속히 폭도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

곳곳이 불타고 부서진 집기며 천막들이 난무했다. 잔인무도한 역사로 유명한 7기병연대는 여신상을 무너트린 이후 자근자근 밟아 가며 부숴트렸다.

머리가 깨진 채 누운 사람들, 필사적으로 기병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해병대가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의식을 잃고 실려 갔다.

“맥아더의 개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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