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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93화 (2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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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이 새끼들, 미쳤군.”

항상 그랬듯, 웬만한 보고들은 맥아더의 책상보다 우리 정치국의 책상 위에 먼저 올라왔다. 이번 미국에서 맥아더 탄핵안 제출로 터진 시위에 대한 정부 대응방안 문건 역시 그러했다.

“미국 국방부에서는 뭘 하는 거야? 이런 계획을 만들었다고? 거기에는 똑바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놈도 없나?”

“서기장 동지, 송구하지만… 지난 대전에서 공훈이 있었던 장군들이 대부분 맥아더와 갈등을 빚었었기에 숙청당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맥아더의 심복들이 채웠기에….”

크흐흠. 그러면 ‘나’도 좀 할 말이 없다.

스탈린이 했던 짓을 맥아더는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소련은 지독하게 통제가 안 되는 군부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은 너무 통제가 잘 되어 문제였다는 것.

그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군부를 가지고 이제 맥아더는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병사들이, 일선에서 자기네 국민들이며 이웃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할 병사들이 그러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본토에서 동원 가능한 가장 강력한 무력인 주 방위군도 가만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지 우리와 저기가 바뀐 것 같지 않나?”

“크흠, 서기장 동지… 위대한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절대로 인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하게나.”

그래.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인민해방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인민을 이승에서 해방시켜 버렸고,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비를 가두고 결국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붕괴시켰다.

내가 죽고 나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꼬라지는 볼 수 없다.

다행히도 소련에서는 군 내 보수파의 8월 쿠데타를 시민들의 힘으로 막아 내기는 했다. 그다음에 나온 것이 꼴통 옐친과 독재자 푸틴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시기였던 것이 문제지.

정치장교니 뭐니 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군을 통제하려 했어도 수십 년간 고이고 썩어 버린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네들끼리 손을 잡았다.

그 이너서클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도록, 어제까지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이들이 서기장이 되는 것을 꿈꿀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게 된 순간 소련의 몰락은 시작됐다. 당서기의 아들은 당서기가 되고 노동자의 아들이 노동자가 되는 나라가 자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정치국원들의 눈이 내게 쏠렸다. 이렇게 뜸을 들이려는 게 아니었는데.

최대한 빠르게, 당연한 것처럼 해치워 버리려 했건만….

“이제 나도 은퇴해야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됩니다!”

“에헤이… 대머리, 앉아.”

“넵.”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죽는다. 죽지 않더라도 늙고 노쇠하며 판단력이 흐려진다.

내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잡고 있으면 몇 년이나 더 잡을 수 있을까? 이제 슬슬 실제 스탈린이 죽었던 시점으로부터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권력을 꽉 틀어쥐고 놓지 않으면 소련이 훨씬 나은 곳이 될까?

아니면 떠나갈 날을 알고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이 더 좋은 선례를 남길까?

스탈린은 사실상 소련의 창업자나 다름없었다. 레닌은 소련이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으며, 스탈린 같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여러 볼셰비키들 중 가장 리더십 있는 자였을 뿐이다.

이제 선례를 만드는 것은 내 손에 떨어졌다. 향후의 권력 이양 방식이 숙청 혹은 죽음이 되지 않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물갈이가 가능하도록 하려면 나 역시 모범을 보여야 했다.

“미국은 이제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맥아더와 어떻게든 그 권력을 탈취해오려는 정치세력들 간의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네. 의회 광장의 시위대를 향해 전차까지 끌고 간 이유가 뭐겠나?”

“….”

“그 와중에, 우리가 평화적인 권력 이양 과정을 거치는 것이 얼마나 선전 효과가 있을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나? 내가, 이 늙은 몸이 언제까지 살아 있을 것 같나? 그때까지 날 혹사시킬 셈인가?”

“서기장 동지께서는… 10년은 더 사실 겁니다!”

10년은 무슨. 고증대로라면 2년이고 건강관리를 했으니 몇 년쯤 더 줄까?

“그럼 10년 동안 이렇게 일만 하며 살라는 말인가?”

“그… 그것은 아니지만, 서기장 동지가 안 계시면 소비에트 연방은 누가….”

아까 한번 입을 다물게 시켰던 흐루쇼프가 벌떡 일어났다. 내 눈치를 보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네. 대머리.”

“아…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라고.”

“예?”

다른 정치국원들은 대충 예상했다는 눈치였다. 그동안 흐루쇼프를 많이 갈구면서도 경공업이니, 국민생활 향상 같은 실무력과 정치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배치한 것에서 의중을 파악했을 것이다.

왜 흐루쇼프였는지는 몰랐겠지만. 이 자식이 과연 스탈린을 성공적으로 현인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냥 지도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머리가 굳고 배짱이 부족한 다른 정치국원들보다는 나았다.

“자네가 다음 서기장이네. 내가 그동안 휘둘러 온 권력을 온전히 자네가 다 손에 틀어쥐지는 못하겠지만.”

“어… 어째서 저입니까?”

왜 너냐고?

하지만 다른 정치국원들은 그럭저럭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쉬울 수도 있겠지. 서기장이라는 권력을 저 자리에서 꿈꾸어 보지 않은 자가 누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수긍하는 것 같았다. 하루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늙어서까지 매일같이 서류작업에 매달리며 휘두르는 것이 절대권력이라면 지금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하지만… 저는…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서기장 동지께서 지금의 소련을 만드셨는데… 동지께서 있으셔야 합니다! 못난 제가 무엇을 할 수나 있겠습니까?”

“내가 말했지만, 내가 영원히 살겠나?”

“….”

“소련은 자네나 내가 만드는 게 아닐세. 인민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지. 이제 곧 사회로 쏟아져 나올 젊은 학생들, 좀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노동자 농민들, 그런 친구들이 자네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려 줄 거야.”

길은 알려 줄지언정 방법은 알려 주지 않겠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선에서라면 시행착오도 겪어 보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피드백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고, 점점 그렇게 좀 더 나은 길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다 정권이 뒤집히고, 소련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면?

‘진짜로 붕괴한다면 딱 그 정도 체제라는 거지.’

마르크스가 고안하고, 레닌이 설계한 이래로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사회실험 소련. 이 실험은 결국 실제 역사에서는 실패라고 판명 나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져 버렸다. 수많은 꿈과 희망을 안고.

내가 이 세계에서 그동안 해 왔던 것은 수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던 실험의 일부를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그걸 거치고서도 똑같이 실패한다면, 자본주의가 제 모순을 드러내 자멸하기도 전에 사회주의가 또 한 번 패배한다면 어쩌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한 망상임을 증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21세기를 거의 20년간 살아가면서 겪은 그 불행들이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것이 싫었다.

세계 인구가 다 같이 비만이 될 정도로 많은 식량을 생산하면서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는 것. 최고 선진 국가라는 미국에서도, 아니면 대한민국에서도 아픈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

그게 정말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그것보다 나은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스탈린이라는 역사상 최강의 권력자는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좀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스탈린은 대단한 통치자였지만 그만큼 많은 실책도 저질렀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독소전쟁, 그리고 이후의 냉전까지….’

한때는 혁명의 열정에 불타던 국가였던 소련은 그렇게 천천히 식어 회색빛 관료제의 제국이 되었다. 스탈린이 발탁했던 수많은 인재들은 자유고 평등이고 평화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제 잇속만 채우고자 하는 버러지들이 되었다.

“흐루쇼프, 내 한 가지만 이야기하지.”

“예! 서기장 동지. 경청하겠습니다.”

“국가가 인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세. 인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수많은 과오들 중 하나가 바로 둘을 착각했던 것이지.”

“어찌 그것이 과오라고….”

“과오가 아니면 뭔가?”

“서기장 동지께서는 공업화를 신화적인 성공으로 이끄셨습니다! 대조국전쟁은 또 어떻습니까! 이는 인민들의 희생과 동지의 지도로….”

역사서는 아마 스탈린의 이름을 기록하며 업적을 써 내려갈 것이다.

‘공업화의 성공’

‘대조국전쟁의 승리’

‘초강대국으로의 도약’

하지만 저 거대한 모스크바 신도시는 누가 건설했던가? 책에는 아마 지시한 스탈린의 이름만 적혀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혼자 손으로 벽돌을 쌓았나?

또 대조국전쟁은 누가 승리했는가! 스탈린 혼자서? 취사병 한 명쯤은 있지 않았을까?

사서(史書)의 페이지마다 승리와 위업들이 나온다. 승리를 위한 돈과 피땀은 누가 지불했을까.

“흐루쇼프. 그 모든 것은 누가 했나?”

“서기장 동지께서….”

“내가 내 손으로 땅을 파고, 총기를 생산했나? 적병을 겨누어 쓰러트린 적은 있었나? 아니, 땀 흘려 노동한 적은 있었나?”

“….”

다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의 생명이 생명이 아닌 숫자로 보이는 시기가 온다.

한 번쯤은 겪어 보았겠지만 실제로 모든 일을 끌어가고 만들어 가는 것은 바로 인민. 저기 어딘가에서 평범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승리는 위대한 철인 지도자 누구가 여러분들에게 가져다준 것이 아닐세. 나는 그저 인민의 위대한 의지를 잠시 대표했을 뿐이고, 자네들 역시 잠시 대표를 하다 또 새로운 물결이 오면 자리를 내주면 되네.”

“그 말씀은….”

“한 10년 정도만 해 보게. 그리고 인민의 평가를 받게나.”

“아… 알겠습니다.”

내가 대강 얼개를 정해 둔 것은 정치국원들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 그리고 최소 10년마다 물갈이가 가능한 모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끝없이 연령대가 올라가기만 한 공산당 정치국은 소련을 보수화, 노후화시켰다. 일정 연령, 내가 정한 바로는 65세가 넘어가면 보직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만 일하도록 하고 은퇴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얼핏 들으면 실제 중국 공산당이 취하고 있는 방식과 유사할 수도 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소련은 최소한 중국보다는 더 부유하고 의식이 성숙한 국가라는 것.

“미래는 저 밖의 젊은이들의 손에 있고, 또 자네들 손에 달려 있네. 소련을…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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