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292화
[미국 공산당 존 레닌, 대선 출마 선언]
먼저 52년에 시작될 대선 레이스를 위해, 공산당의 유일한 국회의원이자 전국적인 진보의 스타로 떠오른 존 레닌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제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많은 분들이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겠느냐, 비전을 내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레닌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했다. 지지자들은 <레닌은 살아 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휘두르다가도 그가 말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침묵하며 그의 연설에 집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시했던 뉴 딜! 일하는 정부! 이 역시 매력적인 비전입니다. 그 이후 월리스 대통령의 평등사회 비전 역시 제게는 참신하게 다가왔습니다. 맥아더 씨는… 크흠흠… 아무튼 저 역시 비전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말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맥아더가 나오자 사람들은 한번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제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 그 사회는 평등 사회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진짜로 평등한 사회! 정부가 진짜로 시민을 위해 일하는 사회! 정의가 피부색을 차별하고, 교육이 소득을 차별하는 이상 평등한 사회는 말뿐이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구호를, 비전을 실현시킬 작정입니다.”
“와아아아아! 레닌! 레닌! 레닌!”
“레닌은 살았고! 레닌은 살아 있고! 레닌은 살아 있으리라!”
열광적인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레닌은 손을 흔들었다. 붉은 깃발을 흔드는, 전국에서 몰려온 수만 명의 미국 공산당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이즈음 미국 공산당의 당세는 전국적으로 100만 당원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대선에서 한 자릿수 득표율, 1% 이상을 내보겠다는 각오로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수는 중도로의 외연 확장이었다.
“우리는 맥아더와 매카시를 탄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단은 바로 맥아더와 매카시의 탄핵이었다.
* * *
“뭐? 이 검둥이 개자식들이… 탄핵?”
“그, 그렇습니다.”
“하원은 뭘 하는 거야! 제길!”
뱅가드 로켓의 발사 실패,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맥아더의 재촉이 알려지자 여론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맥아더 때문에 날려 먹은 세금이 얼마입니까! 인도에서, 중동에서, 그리고 일본 놈들에게까지 퍼 줬더군요? 빨갱이들에게 퍼준다고 비난하던 걸 들었는데… 우린 아예 진짜 전쟁을 했던 놈들에게 퍼주는 꼴이 됐네요.”
“뱅가드를 빨리 쏘게 하겠답시고 수만 달러를 들여서 그 비싼 로켓을 날려 먹다니… 하느님 맙소사. 그런 판단을 내린 무책임한 인간이 대통령이라니!”
“탄핵? 좋습니다. 빌어먹을 매카시가 대통령 자리에 발을 디뎌 볼 수 있다는 것만 빼면.”
잘못하다가 맥아더와 함께 날아가게 생긴 공화당은 내부에서도 당론을 어찌해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탄핵에 참여한다고 우리가 책임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탄핵이라는 최악의 참사만큼은 막고 다음 대선에서 정상적인 후보를 내세운 후 맥아더 일파를 숙청하는 게….”
“당장 손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저들이 저지른 짓을 면피할 수 있습니다! 제길, 이걸 왜….”
맥아더를 손절하고 탄핵에 합류해 책임을 피하느냐? 아니면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을 배출한 당이라는 오명만은 피하느냐?
어느 쪽을 골라도 공화당은 파멸 비슷한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중진들은 골머리를 앓으며 당의 미래를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민주당으로 건너가야 하나….’
‘아니면 공산당이 탄핵안을 가장 먼저 들고나온 것을 빌미로, 매카시처럼 빨갱이 몰이를 해 버리는 걸로… 빨갱이도 맞는데!’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아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맥아더의 거듭된 실책에 쌓인 국민적 분노는 거대했고, 단순한 정치적 술수 몇 가지로는 뒤집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분! 여러분! 잠시만 주목해 주십시오!”
“무, 무슨 일인데 그렇습니까?”
중진들이 뻑뻑 담배를 피우느라 너구리 소굴로 만들어 둔 회의실 안으로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이 자리에 낄 정도는 아니라도 공화당에서 제법 책임 있는 자리를 맡은 인물이, 이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달려오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대규모로 시위가 터졌습니다!”
* * *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민중의 함성이!”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는 인민의 노래가락이여!”
Do you hear the People’s song. 못 들으려 해도 못 들을 수가 없는 쩌렁쩌렁한 노랫가락이 시내에 울려 퍼졌다.
“맥아더를 탄핵하라! 탄핵하라!”
“탄핵! 탄핵! 탄핵!”
이미 수천 명의 군중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법률상 대통령의 탄핵은 국회의 표결로 가능했다. 그 국회의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시작된 대학생들의 작은 시위는 퇴근하기 시작한 넥타이 부대와 주부들의 합류로 점점 커져 가기 시작했다.
“탄핵! 탄핵!”
빵! 빵! 도로를 막고 선 시위대들에게 경적을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퇴근길에 시위를 본 운전자들은 빵빵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게 지지를 표하기 시작했다.
빵 빵 빵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어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즉석에서 만든 포스터와 플래카드들이 순식간에 대오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쟁 없고, 맥아더도 없는 세상>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경찰들은 눈치만 보면서 시위대 대오를 그냥 보내주고 있었다. 횃불이나 총기 같은 본격적인 물건들이 없기도 했기에, 시위대는 오히려 경찰들과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팸플릿을 나누어주며 퇴근 이후 참여를 독려했다.
“아저씨도 퇴근하고 오시죠?”
“하, 하하하… 그럴까…?”
시위대 사이에서 올라온 맥아더의 사진이 천천히 불타며 재가 되어 갔다.
그것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맥아더가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으드득… 저 빨갱이 놈들이….”
“….”
“당장 경찰에 진압 명령을 내리게! 아니, 경찰이 아니라… 군대를 동원하도록 하지.”
“예???”
아무리 생각 없는 맥아더의 예스맨들이라 하더라도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근대 국가는 폭력의 독점으로 탄생했다. 대내적 폭력은 경찰이, 대외적 폭력은 군대가 나누어 가졌고. 이 원칙을 어기고 국내의 문제에 국외의 적들에게 총질을 하게 훈련시킨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각하… 그것은….”
“저놈들은 그냥 폭도일 리 없네! 단 10%만이 진짜 폭도고, 나머지는 시위꾼들, 공산당이 투입시킨 빨갱이 간첩들이야! 저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선동당할지 모르는데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란 말인가?”
맥아더를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대공황 당시 후버 정권을 무너트린 사건, 보너스 아미(Bonus Army) 진압이 떠오른 탓이다. 맥아더는 그때도 비슷한 말을 하며 밀린 임금과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는 전직 퇴역군인들을 전차와 기병대를 동원해 밀어 버렸다.
오직 10%만이 진짜 시위대다. 맥아더는 그 때도 그렇게 주장했고, 소련에 대한 편집증적인 공포가 확산된 지금에는 아예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았다.
‘아니 설마, 진짜 전차를 투입하지는 않겠지?’
아까 맥아더가 보인 분노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슬슬 자기 모가지들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미합중국에서 전차를 보내 국민들을 밀어 버린다니! 나치 독일도, 파시스트 일본 제국도 자국민에게 그런 적은 없었다.
만약 진짜 그랬다가 맥아더와 엮이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랐다. 각료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사무실에 급히 연락이….”
“윽,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 결정을 내린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만고의 역적이 될 수도 있다. 기회주의자와 맥아더의 권력을 보고 빌붙은 예스맨들은 하나둘씩 조용히 제 살길을 찾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는 당 쪽에 이번 시위에 어떻게 대처할지 협조를 구해 보도록… 히익!”
쾅! 맥아더는 당 이야기가 나오자 탁자를 쾅 두들겼다.
“그 빌어먹을 기회주의자들이 당장 반박과 반대를 내지 않은 것은 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렇겠지! 다 한통속이야!”
“….”
아닌 말도 아니다. 공화당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맥아더를 손절해야 가장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는지를 고민 중이란 걸 아는 각료들은 애써 눈치를 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경호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각하! 저 시위대가 아예 국회의사당 근처에 진을 치려고 합니다!”
“…개만도 못한 빨갱이 놈들.”
아예 그들을 빨갱이로 치부해 버린 맥아더는 치를 떨며 팔걸이를 탕 내리쳤다.
“다 끌어내! 후버 데려와! 그놈들한테 무슨 죄목이든 붙여서 일단 유치장에 처박아 두라고 하라고. 그래야 좀 조용해지겠군.”
“아… 알겠습니다.”
창밖에서는 펜 쿼터를 지나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드문드문 보였다. 저놈들이 다 어디서 숨어 있다가 몰려나온 간첩들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현장, 현장 한번 연결해 보게.”
“예, 각하.”
국회의사당 근처에는 백악관이 사태를 온전히 감시하기 위해 배치해 둔 카메라가 있었다. 두 명의 덩치 큰 요원들이 낑낑대며 대형 스크린 TV를 가지고 들어와 전자기기들을 좀 만지작거리자 금방 TV가 켜졌다.
“…저놈들이?”
“아… 저게… 무슨….”
화면에는 거대한 흰 조각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각도를 어림짐작해 보면 조각상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백악관.
한 손에 횃불을 들고, 한 손으로는 백악관을 가리키는 그 여인의 상 근처에서 사람들은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감히 자유 미국의 상징을 저렇게 마음대로 해!”
디자인은 누가 보아도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한 손으로 책을 드는 대신 전장으로 이끄는 여신처럼 백악관을 가리키는 것만 빼면.
이것이 맥아더의 분노를 더 자극한 것 같았다. 빨갱이들 주제에! 반미국 세력들이 감히 위대한 미국의 상징을 저렇게 능욕하다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는 국방장관을 손짓으로 불렀다.
“예? 각하?”
“…동원해.”
“누, 누굴 동원하라굽쇼?”
“귀먹었나! 1해병사단하고 2기갑사단 동원해! 2일 내로 주 방위군과 2개 사단 동원해서 저놈들을 밀어 버리지 않으면 자네부터 모가지를 날릴 거야. 알겠나? 그리고….”
“예, 예….”
국방장관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명령은 명령이었다.
“패튼 그 자식 불러. 멍청하긴 하지만, 빨갱이 폭도 놈들 때려잡는 데에는 그놈이 제일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