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290화
나세르와 이집트인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은 이후는 빠르게 해치울 수 있었다. 애초에 국유화와 집권을 소련이 뒤에서 밀어주며 CIA 첩보망까지 뿌리 뽑아 준 이란의 모사데그는 소련을 버리려야 버릴 수도 없었다.
식민모국 영국을 박살 내준 데다 바로 위에 붙어 있어 알아서 잘 보여야 하는 이라크 역시 마찬가지. 워낙 소국이면서 영국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새로 붙을 구석을 찾는 쿠웨이트도 우리와 하하호호 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가장 문제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따로 있는 사우디였다.
“아하, 반갑습니다.”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통칭 이븐 사우드 국왕에게서 받은 인상은 늙은 여우 같다는 느낌이었다.
700년이나 메카를 통치해 온 무하마드 직계 하심가를 몰아내고 메카와 메디나의 두 성지를 차지했으며, 황량한 아라비아반도를 석권한 남자. 사막 땅 아래서 검은 황금인 석유가 펑펑 터져 나오자 그는 아라비아반도의 사실상 지배자인 영국과 거리를 두면서 미국과 손을 잡았다.
이제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고, 원자력 발전 덕에 석유의 수명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는지 이 자리에 나온 늙은 여우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도 언뜻언뜻 비릿한 웃음을 내비쳤다.
“반갑소이다.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은 알라의 뜻이 아니겠소?”
내가 그리 너스레를 떨자, 이븐 사우드는 통역을 듣고는 제법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소련인들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쉿! 이건 비밀입니다. 하하하, 특별히 말씀드리는 것이니 비밀로 해 주시지요.”
“흐허허허허… 이거, 이거, 알겠습니다.”
이슬람교의 교리상 같은 유일신을 믿는 형제 종교인 기독교인은 이교도들 중에서는 좀 나은 존재다. 반면, 무신론자들은 최악의 존재들이었고.
그래서 나는 까짓거 연기를 좀 해 주기로 했다. 어린 시절 신학교를 다닌 스탈린이 가슴 속에 약간은 정교회 신앙 비슷한 게 남아 있다고 하면 뭐 어떤가! 우리 측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쉿 하며 윙크를 해 보였다.
“당신들도 조용히 하시오. 알겠소?”
“예! 서기장 동지!”
자, 이 늙은 여우에게는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할까?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나세르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인 산업화와 국민교육을 보여주었다. 언제든지 국왕의 친위쿠데타로 나가떨어질 수 있는 모사데그에겐 권력 안정성과 지지도를 주었다.
제 나라 미래 산업을 키울 돈과 기술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다둥이 아빠, 아들만 45명인 이자는 소련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저… 저것은 무엇입니까?”
“무엇 말이시오? 아!”
빙고. 이븐 사우드 국왕 역시 사람인지라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그가 가리킨 것은 해안가에 서 있는 거대한 굴뚝 같은 구조물. 바로 우리 원자력 발전소였다. 크림반도에 전기를 공급하는 겸, 흑해 함대에 배치될 핵추진 함선용 원자로를 연구할 겸, 루마니아며 터키에 수출도 할 겸 겸사겸사 세워둔 발전소는 늙은 여우에게도 신기해 보이는 것 같았다.
“저것은 우리 원자력 발전소요. 저기서… 대충 석탄 1천만 톤 정도 되는 전기를 연간 생산하지요. 허허허허.”
“1천만 톤이라면….”
“석유로는 5천만 배럴쯤 될거요.”
끄응… 이븐 사우드 국왕은 불편한 신음을 토했다. 저 자그마해 보이는 원자력 발전소 몇 기가, 사우디 전체의 석유 생산량을 상회하는 양의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이 자리에서 스탈린이 허언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대략 일간 1백만 배럴(연간 3,500만 배럴)쯤 생산하는 에너지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석유의 쓸모는 에너지뿐만이 아니지만….’
물론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속은 좀 더 복잡했다. 석유는 널리 알려졌듯 에너지로서뿐만 아니라 다른 쓸모들이 훨씬 많았다.
석유를 직접 퍼먹는 것은 주로 차량 같은 운송수단.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에는 석유가 아니라 주로 값싼 석탄이 사용되었고,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천연가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석유는 단순히 이런 에너지원 이상의 무엇이었기에.
현대 사회의 필수품인 플라스틱 생산에서 시작해서 약품이며 아스팔트에 이르기까지 석유가 제공하는 탄소 사슬은 현대 문명을 지탱했다. 그 석유가 있는 한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사우디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것을 아는 이븐 사우드 국왕은 전전긍긍했다.
“그것 참… 대단하구려!”
“허허허허허, 저기서 생산하는 전기는 여러 용도로 쓰이지만… 적잖은 부분이 흑해의 바닷물을 담수화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해수 담수화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오, 그게 무엇이지요?”
“말은 간단합니다. 저어기 보이는 대규모 공장 같은 시설에서, 바닷물을 걸러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민물로 만드는 것이지요.”
꿀꺽. 이번엔 늙은 여우가 침을 삼켰다.
땅 자체는 넓기는 하여도 주변에는 걸프만과 홍해로 온통 짠물에, 검은 황금이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그저 황량한 사막뿐인 사우디는 수자원이 항상 부족했다. 철천지 앙숙인 하심 왕가의 요르단은 중동 국가 중 풍부한 수자원을 틀어쥐고 사우디를 곯려 줄 정도였다.
그런데 짠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 민물로 만들다니! 그것은 말하자면 바닷물에서 황금을 뽑아내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것이 어떻게….”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오. 우리 기술자들이 잘 알겠지요.”
“크흠… 그렇습니까?”
뭐 나도 배운 가락이 있어 대충은 안다. 소위 증발식이니 역삼투식이니 하는 방식들이 있는데, 공통점이라면 둘 다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잡아먹는다.
“다만 우리 원전의 막대한 발전 용량이 저 플랜트를 지탱한다는 것은 알고 있소. 원래는 저 에너지 단가를 맞출 수 없었는데 원전이….”
“그… 원전이라는 것을 우리도 좀 몇 개 가질 수 없겠습니까?”
늙은 여우가 욕망을 숨기지 못하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암, 좋습니다! 다만 이제 오펙에서 뭘 어떻게 할지 논의하고 난 이후에 확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즉 너희가 오펙에서 자꾸 깽판을 치려 들면 국물도 없다는 소리다. 사우디는 지금 에너지 분야에서의 우세를 발판삼아 차세대 에너지도 장악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려면 소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이제 그 늙은 눈 안에 제대로 꾹꾹 눌러 써 주고 있었고.
“솔직히 유가가 3달러도 안 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런 푼돈으로 무엇을 어떻게 개발하겠습니까?”
“크흠…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 석유들은 합작사의 소유라….”
이 시대 물가로 국제유가는 대충 2.8달러쯤. 2010년대 돈으로 하면 대략 20~30달러 사이였다. 석유 쇼크가 유가를 한때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렸는가 생각하면 오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븐 사우드가 원하는 원전이며 담수화 플랜트를 던져 줄 수 있었다.
우리는 또 개발하면 되니까!
다만 패는 숨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 미국과의 협정 덕에 원전을 설치해 주기 어려울 것처럼, 혹은 그거 가지고는 안 되는 것처럼.
늙은 여우가 몸이 달아 헥헥댈 때 오펙에 끌어들여 꿀맛을 잔뜩 보여주면 아마 정신 못 차릴 거다. 특히 아비와는 달리 사치에 도가 튼 그 자식들이라면 더더욱!
노 국왕의 꿈과 희망을 지나, 우리가 탄 리무진은 회의석상에 이르렀다.
“이븐 사우드 국왕, 입장하십니다!”
짝짝짝짝짝짝. 사람들이 나와 이븐 사우드가 입장하자 다같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연장자 존중을 내심 바랐는지 국왕은 제법 흡족해 보였다. 내가 뒤에 있는 만큼 호가호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야?
사회주의 국가답지 않게 화려한 이곳은 급히 공수한 아랍식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다들 편안히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종교적 금기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수많은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해 두었고.
사람들은 고맙게도 입을 떡 벌리고 예상 외인 소련의 화려함에 놀라 주었다.
“허… 이거 대단하군요?”
“아마, 유가를 조금 더 올리면 여기 계신 모두가 이것 이상은 가능할 것입니다. 하하하….”
그 말에 나세르는 살짝 고개를 찌푸렸다가 피식 웃었다. 나는 저런 모습이 좋았다. 본인이 사치를 하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기보다 마지막 한 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국민들의 번영에 쏟아붓는 자세.
반면 22명의 부인과 45명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돈을 석유 쓰듯 쓰는 사우드 국왕은 클클댔다.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 자식들은 창업 군주가 필사적으로 세운 국가를 형편없이 좀먹어 버리고 말겠지.
“현재 석유의 가격은 배럴당 2.77달러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제 몫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덜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격을 후려칠 수 있지만 우리는 생산량을 줄여 반격할 수 없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함께 생산량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옳소!”
나세르가 총대를 메고 시동을 걸었다. 암, 그렇고 말고.
석유의 고정가격제는 철저히 산유국들에게 불리했다. 시간이 갈수록 인플레이션은 심해지는데 가격은 고정이라니! 그리고 달러로만 거래가 된다는 사실도 이들에게 압박이었다.
“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건단 말입니까? 목표한 생산량까지 감축하더라도 그 합의를 깨고 달콤한 이득을 취하려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고양이 목의 방울이라… 그럼 우리 소련이 하면 되겠군요.”
“예???”
늙은 여우 사우드 국왕은 이 체제의 허점을 꿰뚫어 보았다. 생산량 감축을 하면 유가가 오를 때까지 장기적으로 손해를 본다. 유가가 올라도 생산량 감축 쿼터를 누군가 어기면 그만큼 손해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
이는 석유 외 다른 산업이 부족한 중동 국가들에게는 치명타라 할 만했다. 그래서 더더욱, 꼭 석유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소련이 앞장을 서야 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오. 당장 국내용으로는 그닥 많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 오펙의… ‘형제’들이 빠르게 경제개발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알고 있소. 우리보다 여러분들에게 돈이 더 필요하지 않겠소?”
“그, 그렇습니다만….”
“또, 우리가 여러분의 산업화에 조력하겠소이다. 여기 이집트처럼 똘똘한 학생들 수백 명씩을 유학시키면 꽤 가져가는 것이 있을 것이오. 아니면 아스완 댐이나… 원자력 발전소나… 크흠.”
각국 정상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 정도 관대한 조건이라면….
그들은 다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한 단계씩 도약해 훨씬 더 풍요로워진 자기네 나라를.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역병과 수탈밖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산업화를 돕겠다 한다.
그럼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좋습니다!”
“우리 역시 동의합니다.”
실무적인 부분에서 몇 퍼센트를 감축하니 마니 하는 것은 실무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어차피 소련 국부펀드가 그동안 쌓아 둔 자금력이라면 오펙을 좌지우지하며, 우회적으로 투자해 뉴욕 선물거래소에 월가의 승냥이들이 쌓아둔 자금을 작전으로 빼 올 수 있었다.
“아주 좋습니다.”
말 그대로, 아주 흡족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진짜 검은 손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