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289화
“서기장 동지, 이 건은 직접 결재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뭔가? 아….”
오래간만에 몰로토프가 서류 뭉치를 가지고 와 내게 내밀었다. 미국이 자중지란으로 조용한 요즘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더니, 웬걸?
“유가 담합? 우리가 이걸 할 정도가 된 건가?”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새삼스럽게, 미국 영향권을 이탈해 우리 손에 들어온 나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중동에서는… 이집트,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에… 사우디도 참여하는군? 남미에서도 베네수엘라가 참여하고?”
“예. 사우디의 국왕 압둘아지즈는 기본적으로 친미 성향이기는 하지만, 현재 유가를 부양하는 것이 자국의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원자력이라는 에너지가 존재하는 이상 영원히 석유에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유가를 올려 얻은 자금을 기술 개발에 투자할 생각인지….”
“그 사람도 대단히 현명하기는 하군. 벌써부터….”
실제 역사에서 사우디가 저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 2010년대 후반 아람코(사우디 국영 석유회사)의 상장이다.
그걸 60년, 아니 70년은 일찍 깨닫다니. 역시 창업군주의 감과 배짱이라는 것은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실제로 죽은 연도가 53년이니 오늘내일하는 노인네겠지만, 이렇게 대담하게 소련에 베팅을 할 줄이야.
“베네수엘라는 어떻게 미국 손에서 빼 온 건가?”
“그쪽 동네 군부정권은 곧 선거를 추진해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정치지형을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잡아 둘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걸 위해 국민들에게 뿌릴 자금으로 석유를 비싸게 팔 계획인 듯합니다.”
“흠, 그러한가.”
그렇다면 지금은 좀 인기를 끌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원래 국민의 불만이라는 것은 높이 올라가서 떨어질 때, 낙폭이 클 때 터져 나오는 법.
군사정권이 석유 특수를 누릴 때는 높은 성장률이며 풍족한 재정, 그리고 혜택을 볼 수 있는 상층계급 덕에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지나가고 나면 부패로 해 먹은 것들이며, 높아진 인플레이션과 빈부격차 때문에 스스로 고꾸라지기 십상.
미국의 코앞에서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석유를 생산하는 베네수엘라는 반드시 우리가 손에 쥐어야 했다. 그래야 자체 생산하는 석유로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미국이 휘청일 수 있지.
유가가 휘청이면 미국은 휘청이는 수준이 아니라 고꾸라지기 직전까지 간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썩창난 도로 사정과 토 나오도록 넓은 국토 덕분에 전 국토에 열심히 철도를 깔아 온 데다 개인 자동차 보유비율도 아직까지는 낮았다.
하지만 미국은 철도 인프라도 허술한 데다 자동차 소유 비율도 훨씬 높았다. 석유 위기가 터지면? 자동차를 한 대씩은 가지고 있는 웬만한 집안들이 다 유가에 허리가 휘고 유통업계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부랴부랴 철도를 놓으려고 해도, 그게 다 돈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이면 아마 미국과 소련의 국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게 비벼 볼 만한 수준이 되지 않을까?
“내가 바란, 예상한 바로는 우리 국력이 55년까지 미국의 80%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일찍 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가능합니다!”
어차피 인구 측면에서는 소련이나 미국이나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소련이 더 많았다.
대조국전쟁 당시 훨씬 덜 죽은 이들이 베이비붐을 일으키고 있어 소련 인구는 이제 2억을 바라보는 상황. 반면 미국은 베이비붐을 일으켜야 할 젊은 귀환병 세대를 다시 전쟁으로 내몰고 있었다.
1.5억 인구의 미국이라면 소련은 2억 정도 인구. 미국의 대부분 동맹국들은 인도 전쟁의 여파로 흔들리며 미국의 중력장에서 벗어나고 있는 반면 소련의 동맹국들은 유럽 에너지―철강 공동체와 오펙으로 더욱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미국이 혼자 세상을 주무를 만한 힘이 있어도, 소련 역시 미국을 저지할 정도는 된다.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으로 흔들리는 틈에 바싹 돈을 벌고 사회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개혁책을 도모한다!
어차피 스탈린의 늙은 몸은 그 계획을 본격적으로 해 보기 전에 죽어 나자빠지겠지만….
내가 이 늙어빠진 몸뚱어리를 이끌고 소련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들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 그럼 한번 해 볼까?”
* * *
“어서들 오시오! 반갑소이다.”
“!!! 스탈린 서기장?!”
첫 유가 담합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저 실무자들의 건조한 논의로만 맡겨 둘 수는 없었다.
담합이란 것은 성질상 누구 한 명이 빠지면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승냥이 떼들이 설치는 국제 외교가에서 담합을 하려면, 특히 다자간 담합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신뢰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신뢰는 최소한 만나 봐야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각국의 정상들을 소련의 수많은 행사들이 진행되어 온 흑해의 휴양도시 얄타로 불러들였다.
대부분의 굵직한 회담이며 세계적 행사가 이곳에서 진행된 만큼, 저들도 우리가 얼마나 이 회담에 신경을 쓰는지를 알아줄 것이다. 특히 미국 손에서 빼 와야 하며, 20세기 초반의 풍랑을 온몸으로 겪어 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이라면 더더욱.
이들은 내가 직접 나와 맞이해 줄 줄은 모른 것 같았다.
“영, 영광입니다.”
“아! 나세르 동지! 반갑소! 반갑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수에즈 전쟁을 겪으며 우리 소련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나세르였다. 심플한 사막형 군복 차림에 몇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우리 의장대들이 일제히 팡파르를 불었다.
비행장에서 서기장이 직접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나세르는 헐레벌떡 달려왔다. 2인자이자 최고 심복 사다트까지 데리고 온 것을 보면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시다니….”
“허허, 아랍 혁명의 영웅을 내 어찌 홀대하겠소이까? 자… 이쪽으로 드시오.”
덩치 큰 NKVD 경호원들이 철통처럼 우리를 둘러쌌다.그나마 좀 덜 곰같이 생긴 한 명이 정중하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고, 나는 상자를 열어 시가 한 대를 꺼내어 나세르에게 권했다.
“한 대 피우시겠소? 최상급 시가요.”
“음… 이런 자본주의자들의 물건을 저희가 써도 되겠습니까?”
나세르는 황송하게 시가를 받아들면서도 그렇게 주저했다.
“허허허, 자본주의자들의 물건이라니! 카스트로 동지가 쿠바 혁명에 성공한 이후 이제 시가는 자본주의자들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이 되었소. 걱정 말고 한 대 피우시오.”
“아! 그렇습니까!”
역시 끽연만큼 남자들 사이의 벽을 허무는 데 좋은 것이 없었다. 이집트 측 사절단들에게도 쿠바산 최고급 시가를 하나씩 권하고 나도 하나를 빼 물자 분위기가 금세 좋아졌다.
“이집트의 산업화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소. 아스완 댐이 빠르게 완공이 되어야 수자원 통제와 전기 공급이 가능할텐데….”
“예! 소련인 기술자들이 스타하노프적인 노동 규율을 보여 주며 이집트를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말, 그 영국인들과는 다르지요…. 다 서기장 동지의 특별한 배려 덕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아! 하나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소.”
내가 무슨 고급 물건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소위 ‘의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영국 식민지였던 데다가 영국과 전쟁까지 치른 나세르를 태우는데 영국제 롤스로이스 같은 것을 사용할 수는 없었으니, 우리 소련 기술자들이 심혈을 들여 만든 신형 방탄 리무진에 태우고 우리는 뻥 뚫린 도로를 달렸다.
나세르는 흘끗흘끗 창밖을 보다가 거대한 건축물 하나를 보고 탄성을 흘렸다.
“아! 저 곳은….”
“그렇소. 하하하하, 우리의 미래가 자라는 곳이오.”
이집트는 소련의 1급 우호국 중 하나로 수많은 학생들을 소련의 대학들에 유학을 보내 왔다. 조국의 미래를 짊어졌다는 사명감 하나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만리타향에서 고학(苦學)을 하는 학생들은 어떤 마음일까?
“한 번쯤 만나보고 저들을 위로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이집트 학생들은 우수하오.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오. 노력하는 태도가 아주 돋보이고… 근면하고 성실한 이들이오.”
식민 지배자들은 그렇게 말했다.
너희는 무지하다! 너희는 게으르다! 그래서 백인의 선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결코 그런 이들이 아니었다.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쳐도 올라갈 수 없는 식민제국의 굴레 아래서 인간은 타성에 젖지만, 미래가 주어졌을 때 인간의 잠재력은 최대한으로 발휘되었다.
나세르 본인도 아마 영국인들에게 그런 멸시를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창밖에 꽃다발을 들고 모인 학생들이 보이자마자 나세르의 짙은 눈이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나세르 대통령 만세! 만세! 스탈린 서기장 만세!”
“환영합니다! 대통령 각하!”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수백 명에 이르는 이집트 학생들이 미리 대통령의 방문을 예고받고 모여 있었다. 다들 잘 먹고 잘사는지 뺨은 통통하고 안색은 좋아 보였다.
나세르는 단상에 오르자, 일단 이집트 국가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여! 오, 어머니의 땅이여!”
“나의 희망, 나의 야망이여!”
차츰 커지던 국가의 소리는 후렴구에 이르자 점점 목 메이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의 조국! 나의 조국! 나의 조국! 그대의 사랑은 나에게 관대하리…!”
국가 제창이 끝나자 나세르는 손수건으로 코를 팽 풀고는 연설을 시작했다. 아랍 최고의 연설가답게 대본도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여러분, 만리 타향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진실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수많은 나라 학생들이 여기 와 공부하는데 그중에서도 이집트인들이 제일 잘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순식간에 좌중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세르 역시 벌게진 눈을 닦더니 단상 아래로 학생들을 향해 내려왔다.
“학생 여러분! 공부하는 동안 가족과 고향 생각에 괴롭겠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까지 찾아왔는지를 명심하며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이 아니더라도 우리 후손들에게만큼은 번영의 터전을 닦아 줍시다!”
나세르는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나는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무엇을 했나 가슴이 아픕니다. 내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고학하는 일들이 없도록… 반드시! 반드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나세르는 학생들의 손을 한 번씩 맞잡았다. 강철 같은 이집트의 군인 출신 정치인들도 가슴이 아픈지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그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도 나세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울지 맙시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듭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저 제국주의를 이기는 길은 오직 더 많이 노력하고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뿐입니다. 우리가 함께한다면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