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288화
“휴우… 이젠 출근해야겠네.”
“잘 다녀와 여보!”
영 맞지 않는 제복을 입고 니콜라이는 그의 보금자리, 조금 커진 흐루숍카를 나섰다. 손에는 큼지막한 아이스 흐루쇼프가 가득 든 보온병 하나를 들고서. 카티아는 언제나처럼 문간까지 나와 떠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다녀오세요!”
“응 그래 스타스. 유치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벌써 훌쩍 자란 그의 아들, 어린 스타니슬라프도 엄마 옆에 꼭 붙어서 나가는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언제 저 핏덩이가 저렇게 자랐나? 카티아는 매일 뜨개질을 하며 스타스의 새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곤 했다.
뭐, 투스타 장군의 월급 정도 되면 자식들 옷을 못 입히는 일은 없겠지만 카티아의 바지런함은 여전해서 남편과 자식들의 옷가지 정도는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장군 동지께 경례!”
“음, 음.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
“감사합니다 동지!”
그의 부하들은 오늘도 군기가 바짝 들어 니콜라이에게 경례를 했다. 과히 부담스럽지만 표를 내면 낼수록 아랫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것을 아는 니콜라이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이미 한번 화들짝 놀라 보았기에 니콜라이 앞에서 엄숙 근엄 진지한 태도만을 보였다. 그의 눈길이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할 정도로.
물론, 저지른 짓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허… 참… 거세 장인이라니….’
* * *
일의 발단은 이러했다.
“여어! 이쪽 신입 아니쇼? 우리 지금 술 한잔하는데 가서 한잔 같이합시다!”
“?!?!?”
집 근처에서 카티아의 심부름 삼아 식료품을 한 바구니 사 들고 낑낑대며 들어가던 니콜라이는 한 무리의 반쯤 취한 군인들과 마주쳤다.
KFC의 치킨버거를 우물거리면서 피해 가려고 하는데,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던지 덜컥 팔을 잡고 잡아끌자 니콜라이는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저 말입니까?”
“아니, 부대에서 확실히 본 얼굴인데….”
아, 봤겠지.
계급장을 보아하니 그와 동년배인 대위에서 소령 정도의 젊은 장교들이었다. 실제로 새로 배치받은 근무지에서 본 것 같기는 하여 니콜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에 젊은 얼굴에다가 번쩍거리는 훈장이 아니라 카티아가 만들어 준 스웨터에 두터운 외투만 입고 있으니 설마 장군 동지 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웃은 니콜라이가 정중히 거절하려 했지만 반쯤 취한 군인들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가즈아아아아!”
“마시고! 토하자!”
‘안 돼! 둘째 만들 거야!’
니콜라이는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인도에 있는 동안 술이 그리웠기도 하고, 젊은 장교들이 무슨 생각이나 하는지 알아볼 겸 따라가기로 했다.
“그… 럼, 딱 한 잔만 합시다.”
“이야아아아아! 한 잔 더! 한 잔 더!”
역시, 군바리들이 술 잘 먹는 건 변함이 없구나. 병사 시절에도 후방으로 휴가를 나올 일이 있으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퍼먹던 게 어제 같은데, 어쩌다 보니 장군까지 되었다. 솔직히 대충 이쯤 되는 대위들하고 같이 있으면 알맞겠다 싶은데.
술집에 들어오자 퉁퉁한 주인장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름까지 다 아는 것을 보아 어지간히 자주들 왔다 싶었다.
“여어! 키로프 대위! 마르코프 소령! 아니 어제도 그렇게 마시더니… 이쪽은 누구시오? 초면이구려.”
“아, 음… 저, 저는 이번에 새로 부임한 대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입니다.”
아들 미안해. 니콜라이는 아들의 이름을 대며 사람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했다. 술집 주인장은 붉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코밑을 쓰윽 훔치더니 니콜라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건 군인이 아니라… 뭐 어디 극장 배우처럼 생겼는데 대위님이셨소? 하하, 기분 나빠하지 마시오. 보통 군인들은 험악하게 생겼는데… 대위님은 순해 빠지게 생겼어서 말이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뭐, 경력이나 관록이 부족하다는 것은 니콜라이도 알고 있었다. 그의 상관인 중늙은이 중장은 배에 10kg쯤 비곗덩어리를 붙이면 인격이나 관록 면에서 나아 보일 거라고 했지만, 그 양반은 뚱뚱한 윗대가리를 아래에서 어찌 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군복을 정복으로 쫙 차려입고 있으면, 가슴팍에서 번쩍이는 수많은 훈장들 덕에 그를 무시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 뭐라던가, 인도의 네 뭐시기인가 하는 양반이 준 무슨 차크라인가 뭔가 하는 것까지 달고 있으니 가슴팍에 공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계급장과 훈장부터 보는 군인들의 특성상 젊다고 해도, 아니, 젊으니만큼 저 훈장을 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 한잔합시다!”
“아, 고맙습니다.”
“자… 그럼… 우리 페트로프 대위의 무운장구를 위하여! 건배!”
“건배!”
그사이에 벌써 독한 보드카 한 잔씩을 든 이들은 부어라 마셔라를 시작했다. 니콜라이도 아까 먹던 치킨버거를 대충 꺼내 안주 삼아 먹으며 보드카를 들이켰다.
“크… 이 맛에 내가 산다니까!”
“다들 여기 자주 오십니까?”
“그러어엄! 페트로프 대위도 자주 오시오. 주인장 인심도 좋고… 요리도 그럭저럭 잘하고….”
음, 여기는 안 와 주는 게 좋겠군. 니콜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장은 그럭저럭 잘하는 게 뭐냐면서 벌컥 화를 냈지만 진짜 화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아니, 그나저나… 우리 그 새로 부임한 소장 동지하고 어째 성이 똑같으시오?”
“예?”
“하기사, 워낙 흔한 이름이니… 하아… 거 참,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난 그 양반이 참 부럽소.”
그 양반 당신 눈앞에 있는데. 벌써부터 자기 뒷담화가 나올 줄 몰랐던 니콜라이는 허허 웃으며 보드카만 들이켰다.
“어휴, 그 양반 가슴팍에 훈장은 다 봤소? 무슨 그런 번쩍번쩍하는 게 수북하게 달려 있는지 얼마 안 가서 가슴 확대술이라도 받아야 하겠소. 으하하하하!”
푸웁, 한창 마시던 중 뜬금없는 소리에 니콜라이는 입 안에 든 보드카를 뿜고 말았다.
“뭐? 뭐요? 아니 그런 걸 왜… 성전환 수술입니까?”
“푸하하하하! 처음 들으셨소? 가슴에 공간이 모자라니까 이렇게… 불룩하게 만들면 훈장을 달 공간이 더 생기지 않겠소?”
마르코프 소령이라는 자는 두둑한 자기 가슴의 살집을 끌어올려 마치 여자 가슴처럼 만들면서 낄낄 웃었다. 다른 군인들도 맞다면서 박수를 팡팡 치며 술집 바닥이 꺼지도록 웃어 댔다.
“하, 하, 하하… 거, 거 참 재밌군요….”
“프하하하핫… 그 양반에 대한 유머가 한두 개가 아니지.”
“!!!”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이 유머를 카티아에게 전달했다가는 아마 스타니슬라프가 손자를 볼 때까지 길이길이 전해질 것 같아 니콜라이는 이 유머는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양반 어깨에 달려 있는 별 두 개가 사실 뭔지 아시오?”
“…뭡니까 그게?”
“푸흡, 푸하핫, 그거 사실 불*이라 하오.”
???
니콜라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또한 널리 알려진 유머인지 이미 다른 장교들은 배꼽을 붙잡고 탁자를 쾅쾅 두들기며 웃겨 죽으려 했다.
“그 양반이 인도에서 맥아더의 *알을 뜯어온 거세 장인 아니겠소? 그래서 한 짝은 위에서 가져가고 한 짝은 계급장 대신해서 달아줬다고…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맥아더의 불*이라니!
“그게 왜 *알이랍니까?”
“오, 그건 대단히 많은 공통점이 있는데… 자, 보면 남자한테 소중하고, 꽉 쥐면 비명이 나는게 뭐요?”
“당연히….”
“그렇소! 자, 맥아더가 비명을 지르게 하고 싶으면 그 소중한 걸 꽉….”
마르코프가 털이 부숭부숭하니 난 주먹을 꽉 쥐자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이도 이제 대충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새로운… 새로운 유머들이 많군요. 다들, 소장 동지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겠습니다.”
“암! 그래도 배때기엔 기름만, 머리통엔 똥만 들어찬 다른 돼지 같은 장교들보단 낫지. 그래도 그 양반은 배때기엔 기름은 없지 않소?”
있긴 좀 있는데. 어쩐지 찔려 배를 슬쩍 만져본 니콜라이는 그래도 매일 술을 마시느라 술배에 똥배가 나온 저들보다는 낫다 싶어 안도했다.
“흐음… 고급 장교들이 많이 좀 문제가 있습니까?”
“어디든 안 그러겠소. 그 누구냐, 포포프 대령은 상습적으로 병사들 부식비에 손을 대고… 이바노프 중령은 예전에 여군 간호사를 추행했는데 윗선에 아는 놈이 있는지 그냥 넘어갔고….”
부대의 실무를 맡은 중간 관리자급들이라 이런 내용은 샅샅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두 새ㄲ… 사람이 아니로군요.”
“에휴, 도둑놈이 한둘이오?”
다른건 몰라도 부식비에 손을 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내 허쉬! 내 커틀릿! 내 치킨!!!
좆 같은 군대에서 낙이 되는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부식을 건드려?
“저는… 이만 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
“에헤이, 페트로프 대위, 뭘 그렇게 샌님처럼 그러시오?”
“하하하… 퇴장 벌금 삼아서 지금까지 나온 건 제가 다 내고 가겠습니다.”
“우라! 우라! 페트로프 우라!”
물론 이들의 만류는 곧 열렬한 환호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먹은 걸 다 내준다면 지금까지 먹은 만큼 더 먹을 수 있다!
어지간한 술고래들인지 독한 보드카가 몇 병이나 탁자 위에 뒹굴었지만, 이들의 주량을 채우기엔 한참 모자란 듯 했다.
“저는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좋소! 다음엔 내가 사리다!”
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니콜라이는 빌어먹을 부패 장교들의 이름을 머리에 새기며 돈을 지불하고는 술집을 나섰다.
* * *
“그래서 여기 포포프랑 이바노프가 누구요?”
“예! 장군 동지! 대령 포포프!”
“중령 이바노프!”
다음 날 아침, 니콜라이는 인민영웅 훈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이 달린 정복을 차려입고 전체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어제의 그 대위 소령들은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하느라 니콜라이가 어제 그 ‘페트로프 대위’인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포포프 대령. 당신이 병사들의 부식비에 손을 댔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걸 좀 보고 말하면 될 것 같소.”
간부회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니콜라이가 발치에 두꺼운 문서 뭉치를 던지자 포포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쭈뼛쭈뼛 문서 뭉치를 집어 들었다.
“끌고 가게!”
“아, 아닙니다! 저만 먹은 게 아니라… 살려주십시오!”
순식간에 헌병들이 들이닥쳐 포포프를 끌고 갔다. 이바노프도 뒤끝이 많이 구린지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렸다.
“이바노프 중령. 당신은… 아니다, 이미 증언을 확보했으니 나머지는 헌병에게 말하시오.”
“그게 그… 그 여자가… 으아아악!”
덩치 큰 헌병 네 명이 다시 걸어와 이바노프의 사지를 붙들고 끌고 갔다. 간부회의는 싸늘하게 조용해져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릴 지경이었다.
“여기 켕기는 자들이 꽤 많을 거요. 헌병대에서 조사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그래도 모두가 부패한 자들은 아니었다. 특히 어제의 마르코프 소령 같은 사람은 밤에 급히 알아본 결과 병사들에게 제법 평판도 좋고 능력도 있다고 했다.
어차피 그가 끌고 가야 할 부대니, 얼어붙은 분위기라도 풀어 보려고 니콜라이는 농담을 던졌다.
“누구 말마따나, 내 어깨의 별 두 개가 맥아더의 불* 두 짝이라고 하던데, 허헛… 사실은 한 짝만 맥아더 것이오. 떼오기 전에 준장으로 승진하기는 했으니.”
“흐끅?!”
이제야 어제의 젊은 대위를 알아본 듯 술을 진탕 마시던 장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뭐, 사실 아무래도 좋소. 자아… 그리고 어제 제보받은 바로는 장교들이 술 먹느라 뚱보가 되어 체력 문제가 심각하다던데….”
정복 상의를 훌훌 벗어 던지자 약간 군살이 있기는 하지만 꽉 짜인 근육질 상체가 드러났다. 곳곳의 흉터를 본 이들은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켰다.
“구보로 해결합시다! 군가는! 우리는 인민의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