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287화
인도에서의 대패는 미국의 군사적 자신감을 크게 실추시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해외 군사개입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또 저 꼬라지가 날까봐.
“소련의 붉은 그림자가 구대륙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드리우고 있소! 이걸 막지 않으면 우리 미국이 가진 정당한 운명(Manifest Destiny,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 어떻게 침해될지….”
“그러다간 또 인도 꼴 날 일 있소?”
냉소적인 사람들은 중남미의 미국 지배권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그렇게 반응했다. 조금 더 예의 바르고 양식 있는 사람들은 조금 더 긴 설명을 붙여 주었다.
“각 국가의 국민들은 자기네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개입해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슨 사상을 믿든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가끔은 사족이 붙기도 했다.
“또 빨갱이들이 세상을 장악하고 휘두르고 있단 음모론입니까? 제발, 매카시처럼 굴지 좀 마십시오.”
* * *
“남미에서의 공작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서기장 동지.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등에서는 다음 선거에서 공산당이 단독으로 1위를 차지하거나 포함된 연합전선이 1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군사정권들이 합법적인 선거를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만….”
“스페인 때와 다를 것이 없군.”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공화파와 국민파는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며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결국 총선에서는 공화파가 승리했지만, 이에 불복한 국민파, 우파 세력들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미안한 일이지만,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은 공화파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온갖 트롤링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민파와 반대로 공화파는 몇 번의 실책으로 주력이 될 수 있었던 수만 명의 전투노조원이며 막대한 양의 무기를 그대로 적군 손에 넘겨주었다. 이들은 결국 몸을 사리던 소련 때문에 결국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다 침몰하고 말았다.
이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남미에서는 철저하게 공산당이 좌익 연합전선에 복무할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미국이 조종하는 군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소련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으니, 정권교체가 성공하면 그 즉시 우리 영향권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 렇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여단 병력들은 북일본 등의 주둔지에서 추가적인 군사훈련을 받으며 세계 어디든 파견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남미에서 자체적인 군 조직 양성은 잘 되고 있나?”
“예! 그 역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알겠네. 언제까지나 우리가 고문단을 파견할 수는 없어. 덜미를 잡힐 경우….”
이번에 인도에 파견한 고문단은 인도 혁명군의 군대를 지휘하여 멋지게 나토군에게 한 방 먹여 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정글에서 소부대들이 충돌하는 게릴라 작전에서도 백 퍼센트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NKVD가 양성한 특수임무부대들이야 다 위장에 신분세탁에 되어 있지만 우리측 장교가 생포되어 모든 걸 분다면?
그건 그야말로 외교적 대참사가 될 것이다. 이제 매카시의 음모론은 점점 힘을 잃고 있지만, 다시 동력을 얻어 재선까지 가능해질 수도 있고.
결국 남미 국가들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단순히 소련이 보내 주는 장교들과 무기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기존 부패하고 권위적이며 친미 사상에 찌든 군부를 제거하고 새로운, 문민 통제가 가능한 무력조직을 창설해야만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기장 동지. 현재 페루에서는 ‘부사령관 게바라’가 이끄는 해방군 조직이….”
“…누구라고?”
“아, 예. 그… 실질적으로 사령관인데 민중이 사령관이고, 자기는 그저 부사령관이라고 자칭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름이… 에르네스토 게바라라고….”
* * *
“오늘도 이렇게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페루 해방군에서 조그마한 직책을 맡고 있는 체 게바라입니다. 오늘은 우리 남미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이 시기, 혁명가들이 선택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라디오였다. 중동의 나세르부터 시작해서 쿠바의 카스트로까지 수많은 민족주의 좌파 정치가들이 라디오를 선전 수단으로 삼았다.
단파라디오 방송 세트와 수신기 같은 것들이 소련의 대량생산에 힘입어 싼값에 풀리자, 고등학생 서클들부터 본격적인 혁명정당에 이르기까지 자기네들의 주의주장을 알리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인기를 끄는 것이 바로 ‘부사령관 체 게바라’의 방송이었다.
“우리 남미 대륙의 대지는 수많은 선물들을 인민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습니다. 이 땅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데에도 왜 우리는 이토록 빈곤하고 궁핍합니까?! 수많은 여인들이 폐병에 걸려 비참하게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왜? 작고 환기가 되지 않는 집 안에서 나무를 때는 것이 폐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남미의 전 인구가 풍족하게 쓰고 남을 만큼의 석유가 생산됩니다. 콜롬비아에서는 막대한 양의 석탄이 잠자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풍부한 수자원으로도 엄청난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것들은 우리를 위해서 쓰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미국은 헐값에 우리에게 주어진 풍요를 약탈해 갑니다. 저들은 육중한 차를 굴리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석유를 가져가며 푼돈을 던져 줍니다. 식량을 생산한다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옥토는 사철 저들이 아침으로 먹을 과일을 생산하기 위해 황폐화됩니다.”
왜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한가? 왜 변혁이 필요한가?
부사령관 게바라의 팬들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이 방송을 들려주고는 했다. 수많은 원주민들과 혼혈들이 누리는 인간 이하의 삶! 땀 흘려 풍요를 일궈 내려 하여도 수탈당하는 비참한 운명!
불타는 심장과 차가운 머리로 조근조근 읽어 주는 그의 방송은 수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대중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혁명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현실의 굴레, 현실과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부족, 복잡하고 어렵게 쓰인 고담준론들까지.
하지만 이런 라디오 방송들이 대중화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언어를 얻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편하게 사상과 현재 시국이며 뉴스들을 설명해주는 다른 방송들도 제 몫을 했다.
“저도, 그 누구도 여러분의 해방자가 아닙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여러분 스스로를 이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 땅의 형제 여러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피를 토하듯 호소했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해방군’의 방송기술자들은 매일 보는 모습이면서도 또 한 번 감탄했다.
“…정말 부사령관님은 대단하시네….”
“그러게요. 어떻게 저렇게 잘 생겼으면서 말도 잘하지?”
해방군은 다종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료봉사를 시작했던 깡촌 마을 출신의 원주민들, 나름대로 이상을 품고 농촌으로 내려왔던 대학생들, 마을 근처 공장이나 광산의 노동자들….
다들 체의 인간적 매력에 반해,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며 ‘민중 해방’에 투신했다.
지금은 무슨 군대라기보다는 잡부조직에 가까울 정도로 빈곤한 농촌 마을의 자립을 돕는 수준이었지만, 이렇게 체가 일하면서 짬짬이 쓴 원고를 가지고 방송을 할 때만큼은 소련 혁명을 이끄는 볼셰비키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알레이다, 너는 저런 취향이야?”
“그럼 저런 취향 아닌 여자도 있어요?”
친구 에르노를 그냥 보낸 것이 꺼림찍했는지, 본국으로 귀국했다가도 계속 찾아오는 알베르토는 체에게 푹 빠진 여자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방송이 끝나고 한창 생활 총화를 하던 와중 웬 낯선 사람이 스윽 나타나 총화가 진행되던 모닥불 가에 앉았다.
“…? 누구십니까?”
“해치지 않습니다. 하하하.”
엄청나게 큰 덩치에 딱 보아도 군인 출신으로 보이는 절도 있는 행동거지의 사내는 씨익 흰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적의가 없다는 듯 양손을 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후다닥 일어나 각자의 총기를 잡으려 했다.
“허허… 진짜 안 해친다니까요? 자….”
“????”
하지만 사내는 너희들 따위가 나를 어쩌겠냐는 듯, 껄껄 웃으며 가방에서 뭔가 묵직한 것을 꺼냈다. 사람들이 막 총구를 당기려는 찰나, 그는 그 묵직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보여주었다.
“돈…?”
“예. 그렇습니다. 진짜배기 달러지요. 여기서도 달러가 유용하지 않습니까?”
“이걸 왜….”
저걸 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워낙 이상적이고 금욕적인 터라 돈이란 것 자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체를 제외하면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돈만 있으면 마푸체 마을에 그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고….”
“히메네스 아저씨네 아들이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병원비로 나가는 것도….”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덩치 큰 남자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돈뭉치를 잡고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이걸 받으면 무얼 해야 합니까?”
체가 경계 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묻자, 남자는 아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처럼 하시던 대로 하면 됩니다! 단… 저희가 돈을 드렸다는 이야기는 어디 가서 안 하시면 좋겠군요.”
“지금처럼?”
“예. 지금처럼, 인민을 위해 하던 일을 계속해 주시면 됩니다. 돈이야 그런 사업에는 항상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외의 요구 조건은 없습니까?”
“요구 조건이라… 흠… 살아남으십시오. 죽지 마시고.”
남자는 턱을 긁다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항상 좋은 자들은 일찍 죽습니다. 비겁한 자들이 살아남고….”
‘비겁한 자’를 이야기할 때, 그의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체는 떨떠름하게 돈뭉치를 받아들고는 물었다.
“이건 그래서 누가 주는 겁니까?”
“글쎄요? 누구겠습니까?”
“….”
딱 보아도 1만 달러는 넘을 것 같은 거금을 이렇게 마구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 경제관념이 그다지 좋지는 못한 체였지만 이 정도 돈으로 할 수 있는 그 모든 사업들을 생각하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서기장 스….”
“쉿!”
추측하는 이름을 말하려 하자 부리나케 두툼한 손마디를 입에 가져가 댄 덩치 큰 남자는 씨익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튼 잘해 보시오. 뭔가가 더 필요하다면 거기에 쓰여 있는 방식대로 신호를 보내고….”
“…고맙소이다.”
무얼 그런 걸 가지고! 호쾌하게 껄껄 웃으며 남자는 떠났다. 돈뭉치들을 남기고.
‘해방군’의 멤버들은 어두운 밤, 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며 이 돈으로 할 일들을 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