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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86화 (286/300)

# 286

286화

“필리핀의 도망자를 위해 5만 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캘커타 안에 포위된 병력들 중 최선임자이자 6군단의 지휘관인 폴 프레데릭은 결국 항복했다.

미군이 결국 인도 반군의 ‘레버리지’, 즉 그들이 손에 쥘 수도 있는 포로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대규모로 캘커타 시가지를 폭격할 수도 있다는 소문은 지휘관의 결정을 유도하기에 충분했다.

프레데릭은 미군 최대의 수치요, 역사상 최대의 불명예가 되었다. 그 어떤 전쟁에서보다도 많은 숫자의 포로를 적성국가의 손에 넘겨준.

“그자야말로 미국을 음해하려는 어두운 세력이 군대에 침투시킨 프락치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배후로부터 중상했습니다! 반미국적, 반애국적인 시도에 맞서 단결합시다!”

매카시는 연신 그렇게 외치며 맥아더 정부의 책임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영 좋지 못했다.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이 이미 ‘모든 책임을 통감하며’ 사퇴했다면 맥아더의 책임이 아닐 것은 또 무엇인가? 프레데릭이 남겼다는 말이 알려지면서 맥아더의 인기는 더욱더 추락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도망자’. 맥아더는 스스로가 영웅적으로 분전하면서 필리핀에서 후퇴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일본군 손에 2만 명이 넘는 포로를 넘겨준 것은 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등하다고 선전에 선전을 거듭했던 소련군을 상대로도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진 일본군에게 패배했다면 미군은 무엇이 되는가? 맥아더가 저지른 일들은 계속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매카시가 아무리 이것이 모두 음모라고 외쳤어도,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찰 뿐.

그리고 수만 명의 포로를 손에 넣은 인도 혁명군, 아니, 인도 연방 공화국은 이제 맥아더의 고환을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승전국으로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동안 인도에 미친 피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이번 침략을 진두지휘한 미국에 대하여 인도 공화국은 10억 달러의 배상금과….”

“저, 저, 저 무슨…!”

“또한, 2세기에 가까운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7억 달러의 배상금 및 인도 공화국 영토 내부 영국 정부와 영국인들이 소유한 모든 자산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 인도를 침략한 여타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 대하여….”

인도는 이제 포로들을 손에 쥐고 막대한 규모의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평화협정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인도인 협상단들은 딱 하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무슨 말을 하든 들은 척도 않고 자기네 요구사항들만 주욱 읽어 내려갔다.

그 와중에 게릴라들은 더 신이 나서 후퇴하는 패잔병들을 습격하질 않나, 이래저래 협상단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참다못한 한 고위 외교관 하나가 벌떡 일어나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제기랄! 우리 손에 캘커타와 봄베이와 델리 같은 도시들이 불타 버려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협상이란 것을 하기 싫으면 그냥 말을 하시오. 미국에겐 핵폭탄이 있소이다. 당신네들이 모조리 말라 죽도록 전 국토에 열핵병기를 떨어트리면….”

“그럼 당신네들 포로도 모두 죽겠지요. 우리 도시가 하나 사라질 때마다….”

하나 사라질 때마다, 당신네 포로들이 그 아래 있을 것이다. 인도인 관료가 받아치는 말에 미국 외교관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또… 당신들은 우리와 평화협상을 해야 소련과 평화를 지킬 수 있지 않소? 인도의 민중은 그대들이 핵폭탄을 쏘아 댄다면 그저 불타 죽겠지만… 소련은 아닌 것으로 아는데?”

“!!!”

이로써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졌다. 인도에 핵폭격이 가해지면, 소련 역시 이를 그저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만치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뭔가 사전 협상이 다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스탈린은 분명 배후에서 인도 반군의 싸움을 지원했다. 이 정도로 인도군이 대승을 터트릴 줄은 몰랐겠지만.

그렇다면 인도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불태울 때, 과연 스탈린이 손 놓고 가만있을까?

소련 본토가 폭격당한 게 아니니 미 본토에 폭격을 때리지는 않겠지만 아마 미국도 뼈가 아프도록 무엇을 잃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핵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 야밤 미국 동부 앞바다에서 떠오른 소련의 핵잠수함이….

“…자, 그러지 마시고 다시 원래 이야기하던 주제로 돌아가서….”

“승전국으로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동안 인도에 미친 피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이번 침략을 진두지휘한 미국에 대하여 인도 공화국은 10억 달러의 배상금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회의에 나토 측 협상단은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도 측은 아까부터 그랬던 것처럼 쭉 똑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했다.

* * *

“보았나? 저들은 그저 형편없는 쓰레기들에 불과하다. 제국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들을 위해 총을 쥐고 싸우다 죽기를 강요한다. 그래서 저들은 목줄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덥수룩한 수염과 큰 키, 그리고 꼬질꼬질한 군복을 한 사내 하나가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마이크도 앰프도 없이.

하지만 그의 우렁찬 연설은 형형한 눈빛을 하고 각자 손에 총을 꽉 쥔 수천 명에게 다 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저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내가 주장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으니.

한때 일개 중대도 안 되던 초라한 병력이 이제는 거의 연대급의 대규모 의용군으로 불어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들의 대장, 피델 카스트로는 마지막으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아바나로의 진군을 외쳤다.

“우리의 혁명은 착취자의 폭압을 끝내고 착취 받던 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시작이다. 가자! 아바나로!”

“우라! 우라! 우라!”

* * *

“이, 이제 어쩔 거야?”

“나도 몰라! 제길!”

혁명군은 그저 아바나 중심가로 향하는 시가지를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대오의 선두에는 혁명군의 총대장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 서 있었다.

피처럼 붉은 적기와 수십 년간 미국에게 능욕당해 온 쿠바의 국기를 들고 수천 명의 혁명군이 전진했다. 그들을 막으라고 배치된 병사들은 도저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만세! 만세! 혁명 만세!”

“바티스타는 꺼져라! 꺼져라! 양키 고 홈!”

저기 아바나 시가지의 골목에서 몰려나오며 혁명군의 대오에 합류하는 시민들, 양키 고 홈을 목청껏 외치는 이들 중에는 그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냥 집에 있어라. 네가 나온다고 바뀔 게 안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안 바뀌는 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으니… 비참하고 비굴하더라도 숙이고 살아라’

어린 동생에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오늘 나온 병사 하나는 저 대오의 가운데에서, 누군가의 어깨 위에 앉아 힘차게 깃발을 휘두르는 동생을 발견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상관인 중대장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발포 명령을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폭도들을 2번 도로의 바리케이드에서 저지하라! 필요하다면 발포해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나? 2번 도로 바리케이드다!”

“…예이….”

심각하게 의욕이 부족한 병사들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중대장 혼자 권총을 뽑아 들고 폭도들이 선을 넘으면 신나게 쏴 주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내가 말이지! 사격 실력 하나만큼은… 억….”

“씨발….”

“훌리오! 너 미쳤냐?”

하지만 중대장은 힘차게 휘둘러진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맞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기절해 버렸다. 그를 개머리판으로 내려친 병사, 훌리오는 눈이 붉어진 채로 씩씩댔다.

다른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지만 훌리오는 아예 총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제기랄! 내 애인이 저기 있다고! 그런데 총을 쏴? 난 못해!”

“….”

그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던 것 같았다. 동생이 나온 사람, 애인이 나온 사람, 아예 부모님을 발견한 사람까지!

직접 자기 가족을 보지는 못했더라도 한두 명쯤은 순식간에 불어난 저 시위대 인파에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슬며시 총을 내렸다. 아바나 출신이 아니라 바로 저기에는 가족이 없을 것이 확실했어도 가족이 생각난 이들도 비슷했다.

“…어쩔 거야 이러면?”

훌리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그러진 것을 보고 일단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중대장의 머리통을 개머리판으로 한 번 더 퍽 갈긴 다음 통신선을 주섬주섬 긁어모아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시위대로 가야지.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어! 미국 놈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잖아!”

“그, 그거야 듣긴 했지만….”

인도는 대국이고 세계 저편에 있었다. 하지만 쿠바는 그 반의 반절도 안 되는 소국에다 미국 바로 코앞에 있는데 둘이 같을 수가 있나? 그렇게 의문을 품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바티스타를 호위하는 미군 병력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카스트로는 우리에게 땅을 돌려주고, 개 같은 갱단 놈들을 청소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반면 이 새끼들은….”

훌리오는 그 말을 하면서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 중대장을 한 번 뻥 걷어찼다.

“이 개새끼가 우리한테 뭔 짓을 했는지는 다들 기억하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병사들을 그야말로 개 취급하면서 온갖 가혹행위를 저지르던 장교. 훌리오는 그에게 걸려서 언젠가는 야밤에 맨몸으로 바깥에 서서 지독한 모기들을 견디며 하룻밤을 보내야 했었다.

그걸 기억하는 병사들은 한 번씩 군홧발로 엎어진 중대장을 걷어찬 후 진지에서 나왔다.

시위대는 처음에는 군복을 입은 무리들이 다가오자 경계했다.

“…뭐요?”

“혁명 만세! 만세! 만세!”

하지만 힘차게 혁명을 지지하는 함성을 지르자, 시위대의 분위기는 반전되어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아 주기 시작했다.

“형제들이여!”

곳곳에서 병사들이 발포를 명령하는 지휘관을 거역하고, 혹은 아예 시위대에 동정적인 지휘관과 함께 대오에 합류했다.

옆 부대의 탈주를 본 다른 부대가 합류하고… 또 붕괴를 본 이들이 대세가 어느 쪽인지 눈치를 보며 합류하고…

한 대학생은 자기 학교의 동문들과 함께 써 내려간 대자보를 힘차게 읽어 내려갔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에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협과 폭력으로 우리를 대하려 한다. 하지만 보라!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저기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들까지 우리의 대오를 따른다!”

기회주의자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한 이상, 더 이상 바티스타 정부는 저항할 수 없었다.

선두에서 이끄는 카스트로가 대통령궁의 정문에 다다르자, 정문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던 경비병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충! 성!”

“그대들의 충성은 누구를 위한 것이오? 바티스타? 아니면… 쿠바와 그 인민?”

“다, 당연히 후자입니다!”

조장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정확한 대답을 하자 카스트로는 끌끌 웃으며 대통령궁 안으로 행진했다. 그의 뒤에 있는 수많은 인파와 함께.

바티스타는 어디로 갔는지 도망친 지 오래였다.

‘아마 그의 뒤를 봐주는 미국 놈들이 데려갔겠지.’

지금은 물러갔지만. 그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카스트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임시로 마련된 연단 위에 올랐다.

“혁명은 승리했습니다! 쿠바의 형제자매 여러분! 만세! 만세! 만세!”

하지만 언제까지나 승리한 상태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쿠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슴으로는 열띤 연설을 하면서도 그의 머리는 차가웠다.

‘답은… 소련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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