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285화
“맥아더 놈 엉덩이에 불벼락이 떨어졌다고? 그것참 잘 됐군.”
“예, 서기장 동지. 그래서 미국 정부는 ‘애국적 문화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고 합니다만….”
“끌끌끌끌… 지금 와서 그러면 뭐 하나?”
매카시가 문화계를 워낙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문화계의 정부에 대한 여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온 몇몇 ‘애국적 문화인’들에게는 더더욱. 맥아더 정부가 무너지고 나면 그들을 산채로 회쳐먹으려고 드는 이들이 한둘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 동료들을 밀고하고 팔아넘긴 자들!’
소수의 전직 공산당원들이 그 대표 주자였다. 지금 공산당이 다시 이렇게 성세를 떨칠 줄 모르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판 이들은 이제 어떻게 복수를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애초에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자들도 곧 심판대에 오를 운명. 아직은 젊은 배우이지만 매카시에게 붙어 출세를 도모했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자들이야말로 우리가 문화계에서 축출해 줄 것이다.
“어차피 다 우리 거 아닌가? 우리가… 지분의 몇 퍼센트 정도를 가지고 있지? 즈다노프?”
“예, 아… 일단 영화 부문에서는 상위 3개 제작사들의 1대 내지 2대 대주주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요 텔레비전 방송국 하나는 NKVD 및 국부펀드가 보유한 기업들이 소유주이고… 나머지 방송국들에서도 지분을 야금야금 매수 중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사도 하나… 서기장 동지께서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즈다노프는 양손을 비비적거리며 시간과 예산을 조금 더 청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미국 영화와 TV 같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영향을 얼마든지 미칠 힘은 있었지만, 엔터테인먼트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우리가 잘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시베리아의 자원을 눈이 벌게진 해외의 자본가들에게 넘기며 만들어 낸 국부펀드는 세계 각국의 이런 핵심 자산들을 인수하는 데 사용했다.
거기서 막대한 액수는 소련의 향후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소들에 투자가 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서방 국가들의 골수로 스미어 들어갔다. 아직까지 전산화와는 거리가 한참 먼 시대에서는 저들이 감히 파악하기 힘들 방법들로.
“솔직히 이쯤 되면 매카시가 불쌍해지는군. 맞는 말을 하는데 고작 증거가 없어서 그런 사기꾼 취급을 받다니! 하하하하하!”
“예? 아하하하하….”
“그, 그렇군요. 사실 그자가 말한 것보다도 더 많이 있는데….”
미국의 하드 파워는 소련을 여전히 한참 앞질렀다. 저들이 가진 핵탄두나 해공군 전력만 보면 소련은 이미 패배를 선언했어야 한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돌아가는 체제가 아니었다. 무식한 맥아더나 눈 벌게진 빨갱이 사냥꾼 매카시가 심플하게 뒤집어엎어 버릴 수 있을 리가?
미국이든 소련이든 무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국가 하나를 군사력으로 짓밟아 버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1만 일의 전쟁을 치르며 고전했고 소련은 아프간이라는 덫에 걸려 결국 91년 붕괴되었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여전히 소련의 그것을 한참 상회했지만 사용한 방식부터가 문제가 있었다.
“왜 굳이 인도에 수십만 장병들을 보내어 무력으로 밟아야 하나? 우리를 매혹했던 것처럼 코카콜라와 허쉬, 그리고 스팸이 있는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주코프, 너는 왜 거기서 또 동의를 하고 있나….
흐루쇼프는 뭔가를 알아들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머리는 워낙 속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고 다 보이는 스타일이라 아부를 할 때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와 아닐 때의 속도가 달랐다.
제발, 제발 아프가니스탄에만 들어가지 마라.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뭐… 우리도 이제는 그 무기들이 있지. 저자들에게 코카콜라가 있다면, 우리는 KFC(칼리닌 프라이드 치킨)와….”
* * *
“엄마! 저 그거 살래요!”
“또? 조니, 네가 용돈을 받는 게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모으는 거라지만….”
“하지만 요즘 애들은 다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고요! TV를 보세요!”
“…그놈의 TV가 문제지….”
TV에서는 마침 활짝 웃으며 조깅을 하는 젊고 아름다운 두 모델의 모습이 광고로 방송되고 있었다. 요새 저 광고가 자주 보인다 싶은 조니의 어머니는 새로 산 주방기구인 ‘전자레인지’로 요리를 하다 말고 멈춰 TV를 주시했다.
[Just Do It. NIKE]
어지간한 중산층 가정에 TV가 한 대씩은 보급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무방비할 정도로 TV 광고에 노출되었다.
요새는 저 신발이 유행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니 어머니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이키 에어, 보아하니 밑창도 두툼해서 운동하기에 좋아 보이는데 평소 축구며 농구며 친구들과 뛰어다니기 바쁜 조니에게는 좋을지도 몰랐다.
옛날에는 그 무슨 아디다스라던가 하는 독일 회사가 인기였지만, 전쟁 이후로 수입은 끊겨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 야만적인 소련 놈들이 뜯어가서 자기네 곰 발바닥 같은 털북숭이에나 어울리는 하등한 제품들을 만들게 강제하고 있겠지? 매카시를 상당히 좋아하는 조니 어머니는 소련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모아둔 게 몇 달러쯤 있더라….”
조니가 저렇게 바란다면 곧 돌아올 생일 선물로 한 벌 정도 사 줘도 될지 모른다. 무슨 시리즈라고 해서 여러 벌이 있기는 하지만 저만치 밑창이 두텁고 가죽으로 된 운동화는 가족 신발장에서 본 일이 없었으니까.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는 그 드라마 해요!”
“어머? 벌써? 내 정신 좀 봐….”
TV에서는 요새 새로 나온 드라마인 <하우스 오브 카드>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잔잔히 흐르면서도 긴장감을 자극하는 인트로 음악 덕분에 조니 어머니는 전자레인지에서 데운 치킨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다룬 하우스 오브 카드는 요새 전미의 안방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 * *
시내의 나이키 상점에는 수많은 소년들이 모여서 가게 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흰색으로 칠하고 특유의 로고를 단 간판 아래에는 큼지막한 스크린의 TV가 상시 나오며 수많은 운동선수들의 멋진 모습만 보여 주는 클립을 틀어 주고 있었다.
“와! 슈가 레이 스탈린!”
“넌 스탈린이 좋냐?”
“그럼! 슈가는 내 우상이야. 스탈린이든 로빈슨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서로 갑론을박을 주고받으면서도 아무튼 아이들은 저소득층에겐 드문 물건인 TV를 공짜로 실컷 들여다보았다.
가끔은 부모님과 함께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있어 보이는 아이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클립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다시 TV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을 것이다.
[Just Do It. NIKE]
“Just do it! 나이키!”
“아하하하하, 나이키!”
광고카피가 나올 타이밍에 맞추어 아이들은 입을 모아 카피를 따라 했다. 행인들은 그런 광경을 보고는 상점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저러나 하고 쓱 한번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저 중 몇은 아들이나 딸의 선물로 신발을 사 갈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 꼬맹이들이 알바를 해서라도 돈을 모아 나이키를 사거나. 요새 거리에 부쩍 는 파트타임 소년들은 대부분 나이키 상점을 향해 갈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대열 중에 섞여 있던 흑인 꼬마 하나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아….”
난 언제쯤 저런 걸 하나 살 수 있을까? 그와 부모님의 우상인 슈가 레이 스탈린이 나이키 권투화를 신고 링에서 훌훌 날아다니는 모습은 어린 캐시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리고 집에 돈이 많지 않아서 제법 가격이 있는 나이키 운동화는 언감생심이었다. 부모님은 열성적인 공산당 지지자들이셨고, 빠듯한 생활에서 적잖은 돈을 떼내 공산당에 기부하곤 했다.
“그런 거 좀 안 하면 안 되나….”
공산당에 기부만 안 해도 저 나이키 신발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흑인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공산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극장 페인트칠을 하면서 번 적은 돈으로 6남매를 먹여 살리면서도 꼬박꼬박 존 레닌 같은 정치가를 위해 정치헌금을 내곤 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 집으로 들어오자 뜻밖의 물건이 하나 있었다.
“어?!?!”
“어! 캐시도 왔구나.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니?”
“아… 그….”
캐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탁자 위에 있는 저것은 바로 나이키 신발 상자였다.
오늘 하루종일 가서 구경하던 바로 그 신발! 그리고 로고를 보아하니 얼마 전 출시된 최고의 운동화, 바로 나이키 에어였다.
“저….”
“말 안 해도 안단다, 아들. 너 또 나이키 거기 다녀왔지?”
“예….”
자기와 이름이 똑같은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식탁에 올망졸망 늘어앉은 동생들은 약간은 분한 것 같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큰형의 생일이니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큰형의 주먹맛이 맵기도 했다. 맨날 자기가 슈가 레이 스탈린이라며 동생들과 스파링을 하면 형은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며 죽탱이를 날려놓곤 했다. 졸라 아프게.
아마 저걸 곱게 쥐여 주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군침만 삼키고 말았다.
“이게… 내가 공산당 당 대회에 다녀왔는데, 뒤풀이 행사에서 이런 걸 몇 명을 추첨해서 경품으로 주는 것 아니겠냐? 마침 당첨도 됐고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받아왔지.”
“왜 공산당이 그런 걸 준대요?”
“낸들 알까?”
캐시의 어머니는 웃기다는 듯 아버지에게 물었지만, 캐시에게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저 간지나고 쌔끈하게 잘 빠진 나이키 에어 운동화가 손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저것만 있으면 백인 애들과 시비가 걸렸을 때도 당당하게 뻗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저걸 진짜… 저 주시는 거예요?”
“으음….”
“아빠!”
“으하하하하! 그래, 줘야지 아들. 그런데….”
아버지, 캐시어스 클레이 시니어는 익살맞은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캐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버지의 조건을 들었다.
“저걸 신고 꼭 열심히 운동을 해서 네가 원하는 대로, 스탈린 동지와 레닌 동지, 그리고 공산당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좋은 스포츠맨이 되거라. 알겠니?”
“…어느 스탈린하고 레닌 말하는 거예요?”
“어느 쪽이든! 하하하하하!”
캐시는 운동화가 어디로 사라질세라 잽싸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박스를 열어 운동화를 꺼내 아들에게 신겨 주었다.
발에 착 감겨 오는 부드러운 감촉, 하늘 끝까지라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이 두텁고 푹신한 밑창이라니!
오늘은 그의 짧은 인생 중 최고의 날이었다. 까짓거, 아빠 말대로 공산당의 이름 정도 드높여 주는 것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