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284화
“와… 무슨 사람이….”
“이야! 이 정돈 돼야 진짜 축제지!”
앨라배마의 1월은 겨울이라 해도 최저기온이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흐리거나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 적지는 않지만 오늘만큼은 날씨가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곳곳에서 휘날리는 현수막에는 이번 행사의 공식 명칭이 쓰여 있었다.
미국 공산당은 다행히 몽고메리시 남동쪽으로 대략 40km 떨어진 하드어웨이라는 곳 근처에서 이번 축제를 개최할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선전을 위해 생소한 지명이나마 문구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예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훨씬 더.
“지금 입장객이… 몇만 명이라구요?”
“한 40만은 되는 것 같은데….”
앨라배마의 주도인 몽고메리시의 인구가 대략 10만 명 언저리였고, 이 넓은 주 전체의 인구를 통틀어서 300만 명인데 벌써 몰려든 사람이 40만이라니.
거의 100만 평은 될 것 같은 널따란 부지에는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개인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변혁을 위한 음악교육>에서 배운 어린 학생들은 자기네 지역당 아저씨들이 끄는 붉은 승합차를 타고 우르르 내려서 즉흥 공연을 선보였다. 공장 노동조합 내에서 결성된 동호회 밴드들은 또 나름의 깃발과 작은 현수막을 걸어 놓고 열심히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안달했다. 미리 주최 측에 신청해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예술가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많이 몰려온 사람들 덕에 입꼬리가 찢어져 귀까지 올라갈 것만 같았다.
“뭐? 자리가 없다고? 그럴 만도 한데… 그럼 저기서 하면 되겠지!”
“예? 저기다가요?”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뮤지션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끼를 선보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미술가들, 각종 창작자들은 어떻게든 비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심지어 어떤 미술가는 쓰레기더미 위에 자기 예술품을 떡하니 올려 두기도 했다. 쓰레기들을 엮어 만든 비둘기였기에 더 좋은 자리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물론 그의 시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걸 보고 적잖은 이들이 자기 것도 쓰레기더미 위에 올려두었다가 쓰레기로 오인당하고 같이 치워질 정도로.
또, 이 시대에는 상당히 생소할 행위 예술들도 상당히 시도되었다.
“어? 저걸 저렇게… 흐음….”
등짐에 검은 천으로 둘둘 만 무언가를 진 젊은 청년 하나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무질서한 예술의 폭발 겸 난장판을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마음을 먹고 소중히 가져온 작품을 꺼낸 그는 사람들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 오물들이 모인 진창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쌓인 오물과 풍기는 악취 때문에 그쪽은 지켜보지도 않던 사람들은 웬 청년이 커다란 인형 하나를 들고 진창으로 향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왁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에잇…! 맥아더는 엿이나 먹어라!”
“와하하하하! 하하하! 저게 뭐야!”
“거참, 괜찮은데?”
누가 봐도 맥아더인 것을 알 수 있도록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와 파이프를 문 인형을 오물투성이 진창에 콱 하고 던져넣은 청년은 바닥에서 오물을 주워 맥아더의 얼굴에 던졌다.
“하하하하, 저도 해 봐도 됩니까?”
“예! 얼마든지요. 처음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웃으며 몰려들어 진창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맥아더에게 돌과 먹다 남은 음식이며 쓰레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으하하하핫, 이거 동지 작품입니까? 걸작이로군요. 잠시….”
찰칵, 찰칵.
주최 측도 이게 무슨 일인가 와 보았다가 사람들이 맥아더 인형에 마구 뭔가를 던지는 것을 보고 폭소를 터트리며 아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마 저 사진은 프라우다 신문 한구석 정도는 장식하리라.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프라우다 기자는 자기도 맥아더가 싫었는지 낄낄 웃으며 청년의 인터뷰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그래서 이 전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맥아더가 권좌에서 내려와 자연인이 되는 그날, 국민들이 그를 어떻게 할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에서….”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전임 월리스 대통령은 인기가 없긴 했어도 각종 봉사활동을 하고 봉사단체를 이끌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과연 맥아더 씨는 어떻게 될지 저도 참 궁금하군요.”
청년은 즉흥적인 행위 예술을 한 것치고는 굉장히 정련된 말투로 세세하게 자신의 정견을 풀어 나갔다. 기자는 감탄하면서 인터뷰를 쭉쭉 적어 내려갔다.
“아, 맞다. 혹시 동지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걸 안 물어봤군요.”
“예! 아, 앤디 워홀입니다. 제 이름도 실리게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워홀 동지!”
* * *
중앙의 메인 무대에는 공산당이 특별히 공을 들여 초청한 예술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은… 와우! 저도 이분의 팬인데요, 루~~~이! 암스트롱!!!!”
“우와아아아아!!!”
“암스트롱! 암스트롱! 암스트롱! 암스트롱!”
사실 이 행사를 주최하면서 거금을 쓴 공산당으로서는 루이 암스트롱 같은 대스타의 개런티를 대기 어려웠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터무니없는 1달러 개런티만 받고도 흔쾌히 무대에 오르기를 수락했다. 수많은 신문이 그의 선택을 대서특필했고, 꼭 공산당 지지자나 이런 난잡한 축제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암스트롱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수만 인파가 잔디밭을 꽉 메웠다.
“감사합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것은 제게도 처음이로군요.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처럼 수많은 관객이라니… 사랑합니다!”
“우리도요! 암스트롱! 암스트롱!”
재즈의 대가,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트럼펫을 들고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쥐었다. 그는 진정으로 기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연신 암스트롱을 환호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합죽이가 되었다. 암스트롱은 고맙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숙여 답례한 후 자기의 개인사를 풀어나갔다.
“어렸을 적… 저는 코넷(Cornet, 금관악기의 일종)이 그렇게 사고 싶었습니다. 하, 열두 살 먹은 어린애가 한 푼 두 푼 모아서 악기를 사는 것이 어찌나 어려웠는지요!”
사람들은 일제히 숙연해졌다.
“하지만 요즘 공산당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공짜로 악기를 사 준다지요? 아, 그리고 저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소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데이비스 선생님이라는 분이 제게 음악을 가르쳐주셨죠. 그렇게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만…
요즘에는 굳이 그렇게 감옥에 가지 않아도, 악기를 배울 수 있다니. 신이시여! 아니, 서기장 동지시여!”
암스트롱이 익살스럽게 그렇게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울다가, 웃다가, 또 자기네 이야기임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그 모든 사업을 후원하는 여러분들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저와… 몇몇 젊고 유망한 친구들이 함께 만든 노래입니다. 제목은… ‘시대’.”
그렇게 서두를 끝맺은 암스트롱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트럼펫을 대고 힘차게 불기 시작했다. 몇 명의 젊은 가수들 역시 함께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채찍과 굴레의 시대는 끝났다 한다! 노예의 시대도 끝났다 한다
시대에 역행하는 붉은 깃발은 이제는 내리라 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토록 아름다운 내 고향의 푸른 언덕에서
아직 못다 한 혁명이 가슴에 남아 자꾸 터져나오는 것을!
너희의 전쟁에서, 너희가 만든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의 병사들과 패배한 나라의 병사들은(흑인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일단의 사람들이 ‘흑인들은!’을 외치며 추임새를 넣었다. 암스트롱은 윙크를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너희의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받았고
폐품이 되도록 일할 수 있는 고마운 평등을 얻었지!
승리한 나라의 흑인들과 패배한 나라의 흑인들은
너희의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너희의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사람들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리고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너희의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너희의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받았고
다 같이 폐품이 되도록 일할 수 있는 고마운 평등을 얻었지!!!]
마치 돌림노래를 부르듯 무대의 가수들과 관객들이 함께 후렴구와 본 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현수막이 펼쳐졌다. 소련의 국장과 유사한 이삭 다발로 만들어진 원 안에 횃불과 낫, 그리고 망치가 교차되며 평화 마크를 만들어냈다.
“자유여! 평화여! 평등이여! 저들은 외치면서! 속으론…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적잖은 암스트롱의 팬들은 놀란 얼굴로 그가 목청껏 불러대는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꽤 많은 젊은 흑인들은 루이 암스트롱을 ‘백인의 광대’라고 비판했다. 공연에서 암스트롱은 자주 즉흥연주며 연기를 선보이며 백인들이 생각하는 경박하고 멍청한 흑인을 흉내 내곤 했다.
그를 위대한 재즈 연주자로 인정하면서도 비굴한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이런 노래를 부르다니! 입을 떡 벌린 채로, 아니면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암스트롱에게 사람들은 환호했다.
뉘엿뉘엿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며 붉은빛을 지상에 드리웠다. 검은 피부가 붉게 빛나며 암스트롱은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라! 우라! 우라아아아아!!!”
* * *
“대성공입니다! 벌어들인 돈만 해도….”
“으음. 이거면 몇 년치 예산은 되겠군. 대단한데?”
5일간의 축제가 끝났다. 연인원 백만 단위의 행사가 치러진 행사장은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
물론 여전히 어디 노조라던가, 어디 시 공산당 조직이 행사장에 남은 쓰레기들을 트럭 단위로 실어내 가고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의 질서의식을 발휘했다. 배낭 가득 먹고 마신 쓰레기를 채우고, 남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까지 하나하나 집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정치며 선전 팜플렛들 역시 소중하게 들고 가거나, 아니면 배부장소에 고스란히 각을 맞추어 다시 모였다. 언젠가 재활용될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무슨 낭비인가!
적잖은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재원 마련을 위해 티켓을 판매한 주최 측 공산당은 생각보다 예산을 아낄 수 있었다. 수십만 명이 몰려드는 바람에, 그리고 참여하지는 않아도 기념품이라며 티켓을 사간 덕분에 몇백만 달러에 이르는 매출까지 남겨 놓고서.
“그럼… 다음엔 어디에 센터를 세우고 교육사업을 하면 좋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