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278화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인도만 그렇단 말인가?”
“예, 서기장 동지. 제국주의자들은 인도를 마지막 승부처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서서히 총성이 멈추고 있으나….”
순식간에 양편 합쳐 2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일본내전, 회수 유역의 화중평야를 박살 내고 수백만의 피난민을 발생시킨 제3차 국공내전은 미소 양국의 ‘중재’하에 평화협정의 문구를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에서만큼은 동부의 대도시 캘커타를 두고 나토 연합군이 마지막 진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고, 미국 입장에서도 인도라는 거대한 땅에서 허우적거리느니 쐐기를 박아 두는 게 낫다 판단한 것 같았다.
“저놈들도 어지간히 지친 상태일 텐데… 우리 상태도 좋지 않군. 바실렙스키?”
“예! 서기장 동지!”
“지금 인도 혁명군 쪽으로 우리 항공수송 역량을 총동원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수송해 준다면 얼마나 보내 줄 수 있겠는가?”
“항공 수송 말씀이십니까? 음….”
원칙적으로 소련은 직접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나 인도차이나 연방 같은 동맹국을 경유해 간접적으로 물자를 지원하고, 어디까지나 ‘연수’ 내지는 ‘민간인 파견’ 형식으로 돌려돌려 장교들을 보냈다.
하지만 미국이 이렇게 협정을 어긴다면, 병력이 아닌 물자 공수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아직 그쪽에서 굶거나 한다는 말은 없으니 식량, 피복 등이 아닌 철저하게 군수품 위주로.
“현지 비행장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만 서기장 동지, 아마… 일 300톤가량은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미군 전투기나 대공포들이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다른 물자들을 제외하고 군수물자 위주로 보내도록 하게. 군복이나 장화 같은 엉뚱한 물건들이 섞이지 않도록 하고.”
“예! 서기장 동지!”
“항상 전쟁은 실수투성이일 수밖에 없지만, 실수를 덜 저지르는 쪽이 이긴다지?”
이쪽이나 저쪽이나 개판은 개판이었다.
우리 측은 군사고문단장이 현지에서 말라리아인지 티푸스인지 모를 병에 걸려서 앓아눕고 훈련도 제대로 안 된 패잔병 수만 명과 소수의 기갑부대, 없다시피 한 공중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다.
다만 나토 연합군 측이라고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수백 킬로미터의 비포장도로를 행군해야 했던 보병사단들을 가지고 대도시를 몇 달 안에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거기에 수시로 물자를 횡령하다 걸린, 훈련도 개판에 사기도 개판인 동맹국 병력은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이 될 것이다.
“현지에서 활동 중인 특수임무부대를 캘커타시 내부로 집중시키게. 명령권은 군사고문단장… 아차, 단장은 앓아누웠다고 했나? 그럼 단장 대리에게 넘기고.”
“예! 서기장 동지.”’
“그리고 흐음….”
무엇을 더 해 주어야 하려나? 물자나 병력을 지원해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제여단을 파견하려 해도 남인도나 일본 쪽에 있는 이들을 몇 주 안으로 인도에 내려놓고 만전의 상태로 싸우게 할 수도 없고…
“별수 없군. 해당 지역에 파견된 고문단 전원에게 1계급 특진에 훈장 정도면… 적절하겠나? 사기 진작 차원에서?”
* * *
“허억! 헉, 헉….”
전운이 시시각각 몰아닥치는 캘커타 인근의 한 오두막 같은 관사에서, 니콜라이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긴장을 너무 해서인가? 대조국전쟁 시절에도 꾸지 않던 악몽을 꾸고 말았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인지 악몽 때문인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뭐였지….’
어렴풋이 꿈에 거대한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나타나 그의 위에 별똥별과 은하수의 폭포를 떨어트리는 것 같았는데… 묵직하게 가위가 눌렸는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쉰 니콜라이는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몸을 씻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폭격을 암시하는 것인가?
대조국전쟁 시절에는 중반기 이후부터 대등한 수준의 공중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공중지원은커녕 제대로 된 야포의 지원조차 언감생심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단마다 배치되었던 152mm급 포병대대, 가끔 지원을 나오던 203mm 중곡사포, 카츄샤 다연장 로켓포, 승리 미사일….
포병도 공군도 없는 군대에서 싸우라니. 그가 이제부터 사지로 몰아넣을 병사들에게 니콜라이는 말할 수 없이 미안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게. 앗? 아이쿠….”
웃통을 막 벗고 세숫대야를 찾던 니콜라이는 별생각 없이 들어오라고 했다가 옷을 벗고 있는 것을 깨닫고 허둥댔다.
들어왔다가 반라의 상관을 본 마카로프 역시 당황했지만, 니콜라이의 군살 없이 탄탄한 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랫배에 약간 기름기가 있기는 해도, 대부분의 고급 장교들이 편한 지휘보직에서 근무하다 뚱보가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모범적인 소비에트 군인이라 할 만했다.
어깨와 가슴팍의 파편으로 인한 흉터들을 꿈틀거리며 니콜라이가 대충 셔츠를 뒤집어쓰자 마카로프는 프룬제 때처럼 낄낄 웃으며 농담을 했다.
“역시, 미인 사모님을 만나는 데에는….”
“헛소리 말게 블라디미르. 아니, 물론 카티아가 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나저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예 준장 각하, 본국으로부터의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본국으로부터의 전문? 이리 줘 보게.”
마카로프의 손으로부터 종이쪽을 빼앗듯 받아 든 니콜라이는 쭉 읽어내려갔다.
“경량화 곡사포 위주로 포병전력 증원… 이건 아주 좋군. 특수임무부대? 흐음, 이것도 나쁘지 않아… 아니, 근데 준장 각하라니? 난 직무대리지 단장이 아니라서 대령이네.”
“그건 어제까지고, 전문 아래쪽을 보시면 파견단 캘커타 임무부대 소속 장교와 기술자들은 일괄적으로 일 계급 특진을 시켜 준다고 합니다 준장 각하.”
“…!! 다들 좋아하겠군. 다만….”
장교들이야 특진을 좋아했겠지만, 병사들은 특진을 약간 다른 뜻의 은어로 사용했다.
그 뜻은 다름 아닌 전사(戰死). 전사자들에게 1계급 특진을 시켜 주는 관례상 대단한 무공을 세우거나 죽는 것을 빼고는 특진을 할 일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특진은 전사를 돌려 말하는 은어가 되었다. 특히나 대단한 무공은 보통 전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이제 슬슬 병사로 보낸 기간보다 장교로 보낸 기간이 길어지는 니콜라이였지만 여전히 특진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좋은 느낌만은 아니었다.
“제기랄, 그래서 적군은 어디까지 왔지?”
“대략… 1주일 정도면 적군의 선발대가 캘커타 시내에 진입할 것입니다. 아군 우익에서는 포르투갈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적군을 처음 맞아 싸울 때는 증원도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것이로군.”
마카로프는 니콜라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이길 것으로 상정하고 작전을 짜는 것인가?
가장 낙관적인 인도군 수뇌부조차도 결전에서의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캘커타의 완전 포위를 막고 게릴라전을 펼쳐서 적이 캘커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만 막으려 할 뿐.
하지만 지금 전력을 계산하는 니콜라이는 진짜 승리를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 * *
“후우… 아직 한참 멀었군. 포르투갈군은 제대로 따라오고 있기는 한가?”
“아, 예, 음… 현재 적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진격이 늦어지고 있다고….”
“형편없는 놈들….”
6군단장 폴 프레더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군이라는 이름하에 뭉쳐 있기는 하였으나,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놈들은 머릿수를 채워 주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하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완강한 저항이 있는지도 그는 의문이었다. 복잡한 보고체계 때문에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파되는 데에는 몇 날 며칠이 걸렸고, 각종 미사여구로 윤문되어 있었다.
저 라틴 놈들은 전투에서는 태업을 하기 일쑤였고, 그러면서도 보급은 항상 최상으로 요구했다. 언젠가는 전투도 하지 않고 사단의 전차 모두가 망가졌다고 보고를 하는 게 아닌가! 사실은 자체적으로 망가트린 후 본국으로 횡령했다는 게 밝혀지자 미국의 후방사령부는 경악하며 그놈들에겐 기갑병력을 넘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게릴라들에게 달러와 화기를 팔아치우며 이쪽에서는 습격을 자제해 달라고 비공식적으로 컨택을 했다고 한다. 그 한심한 꼬라지에 연합군 수뇌부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놈들을 끼고 소련과 싸울 생각을 한 독일 놈들이 제일 대단하군.’
이번에도 일부러 전투를 피하며 진격을 늦추는 게 아닐까? 프레데릭은 그렇게 의심했다. 수뇌부들은 계속 빨리 캘커타로 갈 것을 요구했지만, 좌익의 태업 때문에 취약한 측면이 길게 노출되는 것이 계속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렇다고 중앙의 병력을 좌익으로 돌리기도 어려웠다.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인 캘커타를 점령하는 데 3개 사단이라니! 후속하는 병력이 있지만 저기에 대체 얼마나 많은 게릴라들이 진을 치고 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익의 4기갑사단이 쾌속 진격해 도시를 포위하는 것도 계획에 있었으나….
“뭐 하나 되는 게 없어. 단 하나가.”
사실 한탄은 그 자신에 대한 한탄일지도 몰랐다. 그는 중앙 참모부에서 경력을 쌓았지, 야전 지휘는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소대장을 했던 것을 제외하면 일선 중대장 경험도 없는 정통 참모장교였던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승진한 것에 가까웠다. 참모본부 깊숙이까지 뿌리 박힌 마셜 원수 라인을 ‘용공’ 혐의로 몰아 축출한 맥아더는 소수의 비주류들을 쾌속 승진시켰다.
맥아더의 바탄 갱 멤버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마셜 원수가 직접 발탁한 인사가 아니란 이유로 분에 넘치는 직위를 받아든 그는 솔직히 말해 환장할 지경이었다.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하늘은 흐렸고, 날씨는 마치 물컹거리는 것처럼 사람들을 짓눌렀다.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것은 프레데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하 장교들은 의욕 없고 자신 없는 사령관을 보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어야 했던 월터 크루거 장군이 가족사 문제로 급히 사임한 이후, 인도 파견군 참모장에서 차출된 프레데릭 장군은 끝까지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지프차가 주저앉았다. 뒷좌석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갑자기 멈춘 차 때문에 혀를 깨문 장군은 신음을 흘렸다.
“윽….”
“각하, 괜찮으십니까? 운전병! 무슨 운전을 이따위로….”
“죄, 죄송합니다! 도로 상태가….”
“아니, 난 괜찮네. 도로가 이랬던 게 한두 번인가? 크흠….”
이런 것 하나조차 제대로 되는 게 없군…. 그는 그렇게 속으로 곱씹으며, 다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