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276화
전쟁이 곧 멈춘다! 이 말은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병사들에게, 전쟁이 멈춘다는 것은 크리스마스를 이 빌어먹을 곳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머님께. 우리 빌어먹… 크흠, 우리 소대장은 어쩌면 우리 부대가 크리스마스 전에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호박 파이와 사과 파이가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아직 전쟁이 멈춘다는 것은 ‘협상안’일 뿐이었지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신년이라는 대행사 때문에 병사들은 제풀에 흥분을 해 버렸다.
인도의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온이 25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벵갈 지역의 격전지에 투입된 대다수의 장병들은 여름에는 건조하고 따뜻하며 겨울에는 포근한 미 서부나 남부의 기후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세계에서 손꼽는 다우지(多雨地)인 이 지역에는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을 걸면서 뜨끈한 칠면조 다리라도 뜯고 있을 수 있다면 모를까. 흙탕물이 된 막사 바닥에서 간신히 데운 C레이션과 진창에 빠진 도로 때문에 오지 않는 보급은 최상의 대우에 익숙해져 있는 미군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 씨발… 군의관님, 그럼 저는….”
“그래. 자네는 후송될 수 있네.”
“제기랄! 씨발…! 감사, 쿨럭,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쯧쯧쯧, 자네 건강을 챙겨야지. 원….”
날마다 수십 명씩은 뎅기열이나 장티푸스 같은 병에 걸려서 후송되었다. 하지만 차라리 병에 걸려서 후송되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병사들은 열정적으로 병에 걸리길 원했다.
군의관은 장티푸스 진단을 받고 후송 대상으로 선정된 병사가 좋아서 기운도 없는 몸으로 환호를 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거 참… 군기가 다들 이래서야….”
반면 장군들에게 전쟁이 곧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약간 다른 의미를 가졌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 집중 공세를 가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캘커타를 탈환하지 못하면….”
인도 혁명군이 현재 간신히 사수하고 있는 캘커타는 인도 전역 전체에서 가장 격전지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 영국, 포르투갈과 스페인, 벨기에군 등이 연합한 나토군은 소련의 위성국과 연결된 북인도 지역에서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끊임없는 싸움을 벌였다.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 고원을 넘어오는 소련제 물자는 ‘인도 혁명정부’를 자처하는 해방군의 손에 들어가 그들의 목숨줄을 유지시켜 주었다.
하지만 서쪽의 델리로부터 밀고 들어온 연합군은 결국 인도 아대륙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아대륙의 남쪽 지역 역시 게릴라들이 설치고 있었지만, 고립된 상태에서 자체적인 보급만으로는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미국을 상대로 버틸 수 없는 법.
‘평화협정’이 시간을 질질 끄는 동안 캘커타를 점령하면 반란군 놈들의 목줄을 졸라 고사시켜 버릴 수 있었다.
“폴 프레데릭 장군의 6군단이 공세 준비를 마쳤습니다. 포르투갈 원정 3사단이 좌익을 원호하고….”
“그, 그러나… 포르투갈 원정군은 현재 사기가 심각하게 낮습니다. 차라리 이 정도에서 휴전을 맺고 이후를 노리는 것은… 안 되겠군요.”
그 말을 한 눈치 없는 장군을, 사령부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찌릿하고 노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상태가 멀쩡한 부대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지금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지금 여기서 공적을 세우지 못하면, 언제 다시 세울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다시 기회가 주어지기나 할까?
전공을 세우고, 지도에 정치가와 국민들이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할 의무가 있는 고위 장성들에게 전쟁이 곧 멈춘다는 것은 공세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것을 의미했다.
피해는 컸지만 위대한 승리를 거둔 명장으로 기억될 것이냐, 아니면 수많은 젊은이들을 무익하게 죽이고 온 졸장으로 기억될 것이냐! 다들 각자의 꿈을 안은 늙은 장군들은 국회의 의석이나 장관의 자리가 얼마나 안락할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우익은 4기갑사단이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좌익이 정 불안하다면 이탈리아 사단을 보강하도록 합시다.”
캘커타 안에는 몇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패주해 온 반란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악에 받쳐 싸우는 이들이기는 하였으나 객관적인 장비 수준과 훈련도의 열세는 연합군 사령부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 * *
“예? 제가 말입니까?”
“그… 그렇네… 부디, 부디… 쿨럭, 부탁하네….”
막 인도 혁명군의 고문으로 캘커타 근교의 혁명군 사령부에 도착한 니콜라이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만큼 창백해진 얼굴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병색에 말 한두 마디를 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은 소련이 인도에 파견한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다.
주인도 소련 군사고문단장 이바노프 준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병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하, 하지만 저는 방금 부임해 와서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
“…내… 가 남겨, 컥, 쿨럭… 남겨 둔 문서들이… 있네…으컥, 꺽….”
“진정하십시오!”
몸을 일으켜 자기 병석 근처의 서류뭉치들을 가리키려다 발작적으로 기침을 토한 이바노프 준장은 애처로운 눈으로 ‘새로 부임한 프룬제의 수재’인 페트로프 대령을 올려다보았다.
객혈까지 하는 그를 급히 다시 병석에 눕힌 니콜라이는 서류뭉치를 일단 집어 들었다.
미군을 괴롭히는 풍토병은 파견 온 소련군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이바노프 준장 역시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고, 니콜라이는 졸지에 고문단의 계급상 차석으로 수십 명의 파견 장교들을 지휘해야 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여기… 군대의 운명이… 자, 으윽… 쿨럭, 자네에게 달려 있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민들을 부탁하네….”
“예. 각하.”
제기랄. 니콜라이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 내뱉었다.
인도는 그에게 낯선 곳이었다. 수십 명의 고문단 장교들은 방금 단장을 면회하고 나온 니콜라이를 애타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양어깨의 어울리지도 않는 대령 계급장이 이렇게 무거운 적이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책임지라고?
그뿐이 아니었다. 오면서 듣기로 이곳은 제국주의 군대와 혁명군이 부딪치는 최전선.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후퇴할 때마다 진격할 때 피를 피로 씻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조국전쟁의 전장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페트로프 대령 동지, 사령부에서 작전회의로 호출입니다.”
“그, 그런가? 알겠네.”
‘이런… 제기랄!’
전령 하나가 그에게 달려왔다. 아직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니콜라이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때 걸렸나!!!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지휘관이 겁을 먹으면 부하들은 몇 배로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병사이던 시절에 그랬으니까.
가슴을 딱 폈다. 턱을 치켜들었다. 카티아가 꺄르르 웃으며 멋진 내 낭군님이라고 부르던 자세를 상기하며, 니콜라이는 턱이 떨리며 이빨이 딱딱 부딪히지 않도록 목에 힘을 꽉 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고문단 장교들의 얼굴이 약간은 안심으로 풀어졌다. 가슴팍의 인민영웅 훈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을,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내하도록 하게.”
“예!!! 대령 각, 아니, 대령 동지!”
책임감은 무겁게, 부하들을 대할 때는 경쾌하게.
사령부는 밖에서 보기에는 초라했다. 안에서는 수많은 인도인들이 니콜라이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갑론을박을 벌이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공황상태에 빠질 뻔했던 니콜라이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이 하는 말을 통역해 주자 깜짝 놀랐다.
“현재 여기, 캘커타를 향해 미군의 군단 하나가 창끝이 되어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양익에 1개 사단씩이 배치되어… 대령님, 안녕하십니까?”
“아니, 아, 마카로프 대위!”
“하하하, 이제는 중령입니다. 대령님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흐흐흐.”
휴우. 익숙한 얼굴이 있다는 것은 온통 낯선 사람들뿐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안심이 되는 요소였다. 마카로프 중령은 언제 그렇게 인도 말을 배웠는지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인도인들이 따따따따 쏘아붙이는 말을 니콜라이에게 들려주었다.
“…라고 합니다. 대령님,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음. 알겠네. 혹시 아군 측 전력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있겠나?”
상황은 생각보다 절망적이지도, 너무 희망 넘치지도 않았다.
벵갈 지역은 앞바다 벵갈만에서 올라오는 몬순(Monsoon, 계절풍)이 따뜻한 공기를 몰고 와 히말라야산맥에 부딪혀 막대한 양의 강수를 뿌리는 지역이었다.
대략 10월 초까지 쏟아졌던 비와 후덥지근한 기후 때문에 장비의 비전투 손실률이 엄청난 지경. 니콜라이는 대조국전쟁에서 겪어 보았던 끔찍한 라스푸티차를 떠올렸다.
마카로프는 니콜라이의 질문에 척척 대답을 내놓으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옙. 먼저, 포병 전력은 변변치 못한 수준입니다. 대부분 구식 76mm포… 현재 사령부가 운용할 수 있는 76mm 전력은 완편 12개 대대. 152mm포는 1개 연대, 4개 대대 정도가 전부입니다. 여기에 얼마 전 신편되어 배치된 개량형 203mm 자주곡사포여단이 있습니다. 박격포는 120mm로 잔뜩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 자네 포병이었지?”
“그렇습니다. 원래는 공수 쪽이었는데… 아무튼. 대령님의 주 전공이신 기갑으로 말하자면, 전차전력 역시 형편없습니다. 구형 T―34 전차들로 구성된 기갑여단이 두 개 있기는 한데 가동불능이 된 전차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부됸늬 대대 하나와… 아! 트럭만큼은 잔뜩 있습니다.”
마카로프 중령은 단장이 와병하기 시작한 이후로 부대의 실무를 사실상 도맡은 상태였다며 이런저런 숫자들을 쭉쭉 불러 주었다.
니콜라이의 시선 역시 서류상의 전력들을 쭈욱 스치고 지나갔다. 보병만큼은 잔뜩 있었다. 어쩐지 쓴웃음이 났다.
소련군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그가 말단 졸병이었을 시절이 그랬다. 그때부터 운명이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는데….
“하나 긍정적인 것을 알려드리자면, 이 친구들은 저격이나 사제 폭탄을 만들고 하는 것은 꽤나 잘한답니다. 게릴라전에 워낙 이골들이 나서….”
“흠. 그런가?”
“예. 솔직히 저 미국과 그 졸개들이 워낙 보급을 잘 받아먹고 싸워서 그렇지, 여기 친구들이 약졸들은 아닙니다. 외려 이탈리아 놈들이나 포르투갈 놈들이 허접하다면 허접했지….”
“아! 이탈리아인들! 그 친구들은 대조국전쟁 시절에도 대단했는데….”
니콜라이가 낮게 끌끌 웃는 동안 인도인들 간의 토론은 대략 끝난 듯싶었다. 어느새 자기 자신에게 쏠린 수많은 눈동자들을 보며 니콜라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