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275화
미소 양측이 평화협정에 돌입함에 따라, 전 세계를 두고 벌이던 영향력 쟁탈전은 잠시 멈추었다.
물론 양국이 멈추었다고 그 하수인들마저 순순히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화민국이나 남일본, 소련의 지원을 받는 국제여단과 인도 해방군 등의 조직들은 여전히 적들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 ‘자중할 것’을 각국 외교부를 통해 요청했어도, 기어이 적들을 자중시키겠다는 각오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댔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말을 철석같이 따르는 곳이 있기는 했다. 중남미 각국의 군사정권들은 미국이 ‘적절한 선에서 국민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 태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미국은 최소한 그들이라도 멈추어 두어야 세계인의 눈에 미국이 덜 제국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중남미의 군사정권들 역시 안 그래도 소련제 의약품 수입 중단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차오르는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주시하는 중에 미국의 허가가 떨어지자 부리나케 불만을 진정시킬 수단들을 도입했다.
“크흠… 국민이 요구하는 민주선거제로 이행하기 위해 5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선거제도 개혁을….”
“좋소! 알겠소! 농촌 지역에서 의료보장의 적용을 확대하고, 학교를 더 많이 설립하겠소!”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확대에 발맞추어 프로 스포츠 리그의 설립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몇십 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해 온 이들은 어떻게 해야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형식적인 참정권 확대, 국가에서 나누어 주는 의료서비스와 같은 생활보장, 스포츠-영화-성 산업의 장려를 통한 국민의 주의 분산, 거기에 그동안 써 왔던 무력까지 더하면 고전적인 ‘채찍과 당근’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점점 더 급진적인 구호를 외치며 자그마한 승리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독재자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민주정권 수립하자! 수립하자!”
“우리 당은 교육과 의료의 전면적인 무상화를 쟁취할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당원과 지지자 여러분들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깡패들을 처벌하라! 폭력경찰 처벌하라!”
이미 한번 달콤한 이상향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국민들은 독재자들이 제시하는 값싼 당근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중남미 곳곳에서 만들어진 급진 서클들, 대학생 조직들과 노동조합의 언더 위원회들은 끊임없는 시위와 파업에 나섰다. 독재자들은 이들을 무력으로 짓밟는 것이 불에 기름을 붓는 짓일까 봐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보통 이쯤 되면 ‘유약한 정부가 사회혼란을 방치하는 것을 좌시하지 못한다’며 나서던 군부 역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싹 닫고 한발 물러섰다.
이 와중에 엿을 먹는 것은 중남미에 대규모 투자를 했던 미국 자본가들뿐. 그들마저도 정권의 압력이며 세계적인 눈치 때문에 과격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는 꺼져라! 양키 고 홈!”
“기계를 멈춰 세상을 멈춰라! 파업! 파업! 총파업이다!”
“으아아악!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들!!”
중남미의 좌파들이 제시하는 문제와 개혁안들은 대동소이했다.
미국 자본에 종속된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구조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시종 미국이 구매하는 물건들만을 싸게 팔고, 그것 때문에 다른 물건들을 만들지 못해 비싸게 사야 하는 중남미의 현실. 모든 생활을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현실에 그들은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자력갱생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하여 중남미의 좌파들은 사상적 종주국이자, 미국에 비해 훨씬 남미에 대한 욕심이 적은 소련에게 눈을 돌렸다.
이 꼴을 미국이라고 눈뜨고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는 지금 평화협정을 하려 하는 게 아닙니까? 소련이 자꾸 남미에서 폭동을 배후조종하며 미국 자본에 피해를 입히려 한다면 우리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소련은 과장되어 보일 정도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우리가 무얼 건드렸다고 그러십니까? 민중의 자발적 움직임은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끄응….”
“뭐, 원하신다면 해당 지역의 당에 우리의 권고사항을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한다고 민중이 가진 불만을 억제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군요. 이게 다 미국이 그동안 저질러 온 것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미 정보부는 소련이 실제로 중남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폭력사태’에 연관되어 있다는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암살사건이나 납치, 폭파 등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아마 중남미 혁명조직들이 자체적으로 과격화되며 발생하는 일이라고 분석한 정보부는 소련이 간접적 영향을 줄지언정 직접적으로 뭘 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우리 쪽에선 항의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사실상 해당 지역들에서 비민주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미국이 중남미를 독점적인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되려 소련 측은 미국이 중남미에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첩보부를 이용해 반대파를 색출하고 고문하며 군사지원을 해 주는 것이 내정간섭이 아니면 또 무엇인가!
“그, 그렇다면 소련은 유럽 각국에 내정간섭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정간섭이 아니라 원조를 요청하는 각국의 우당(友黨)에서 요청한 원조를 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언제든 정권 교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후원하는 중남미의 독재정권들과 다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미국은 이제는 소련이 유럽에서 위성 공산국가들을 유지하는 것을 걸고 넘어졌지만 소련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국가’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상아탑 속에서 학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수많은 기준을 마음대로 만들어 냈지만, 그것을 국제정치 속에 가져다 붙이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미국과 소련은 그나마 통용되는 기준, 민주적인 직접 선거가 이루어지느냐를 기준으로 삼았다.
중남미의 대부분 국가들에서는 형식적인 선거도 치러지지 않거나, 국가에서 지정한 단일 후보가 입후보하는 형태였던 반면, 소련 영향하의 유럽에서는 형식이 어떠하든지 다당제 민주선거가 치러졌다.
당장 누가 보아도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쿠바의 소카라스 정권을 미국은 바티스타 쿠데타를 지원하면서 엎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나마 중남미에서 소련이 개입했다는 증거라도 나오면 모를까, 그마저도 잡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을까.
* * *
“미국의 개새끼! 바티스타에게 죽음을!”
“민중에게 빵을!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농민에게 토지를!”
이렇게 미국의 하수인들이 모두 손발이 묶인 채 쩔쩔매는 동안, 쿠바에서는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시작된 혁명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미국의 도움으로 수도인 아바나를 장악했으나, 영토의 동쪽 끝인 산티아고 데 쿠바 지역까지는 아직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다. 수도의 불평분자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미국이 만들어 준 쿠바인 부대는 부족했던 바람에 800km 넘게 떨어진 산티아고의 소규모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이 공백을 틈타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가난한 남부 지역에서 급속하게 세를 불릴 수 있었다. 몬카다 병영을 지키던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병영의 병사들은 대부분 부패한 군 상층부와 정권에 염증이 나 있었다.
“제기랄! 왜 우리가 월급도 제대로 안 주는 윗대가리들의 명령에 따라 바티스타의 똥이나 닦아 줘야 합니까?”
“저 씨발 소령 새끼는 병사들 월급을 횡령해서 카지노에 다 꼬라박았습니다. 저놈의 목만 따게 해 준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몬카다 병영에 비축된 수천 명분의 병기는 그렇게 혁명군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백몇십 명 규모에서 순식간에 몇 배로 체급을 불린 혁명군은 이제 마에스트라산맥을 거점으로 해방구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 해방구는 중남미 대륙에 사는 수천만 대중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뭐? 저놈들…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데?”
“그러게? 워낙 군기가 개판이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소련제 값싼 라디오가 ‘문맹 퇴치’ 사업의 일환으로 UN 기금을 이용해 뿌려진 덕택에, 라틴아메리카의 깡촌 마을에도 라디오 하나씩은 찾아볼 수 있었다.
마에스트라산맥에 둥지를 튼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이 가장 공을 들인 사업은 바로 대중선전이었다. 쿠바 혁명군이 해결한 문제에 대해서, 매일같이 <쿠바의 소리>가 방송을 때려 댔다.
[쿠바 혁명군은 오늘 오리엔테주의 미국과 연계된 갱단을 소탕하고 그들이 약탈한 것들을 쿠바의 민중에게 반환했습니다. 이 갱단은 미국계 자본가들의 앞잡이가 되어 지역 농민들의 땅을 빼앗는 데 협력했고….]
“저기나 여기나 하는 짓들은 똑같네. 거, 무기만 있으면 콱….”
“허허허, 내 말이. 개 같은 놈들….”
[또한, 혁명군의 용사들은 지역의 민중들과 협력해 허리케인으로 무너진 가옥 17채를 재건했습니다. 혁명은 민중의 삶과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그 모든 일련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형제들이여! 혁명에 동참하십시오!]
“말 참 잘하네… 저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
“피델 카스트로일걸요?”
“라울 아니야? 지난번엔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에라이 이 사람아. 라울은 저 동생이고! 대장인 형이 피델이지.”
“그, 그런가?”
해가 지고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라디오가 있는 집의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모기를 쫓으며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는 못 배운 사람들에게 쉽지는 않았지만, 열정적인 어조로 더 나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카스트로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선생은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들으시겠수, 의사 양반?”
“아, 하하하… 저는 의사 아닙니다.”
“뭘 그렇게 겸손을 떠나? 우린 선생보다 많이 배운 사람은 본 적도 없어. 그러면 선생이지.”
불가에서 같이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아이들의 다친 상처를 소독해 주고 있던 곱슬머리 청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곁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소독이나 간단한 약 처방, 상처 봉합 정도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들은 그를 의사 선생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가난한 남미 사람들은 죽을병에 걸려서야 의사의 진료실 문턱에나 가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대학 나온 사람을 볼 일이라고는 거들먹대며 관광 여행을 하는 미국인 부호 정도밖에 없었으니.
어린아이들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지에 배치된 선생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서는 십 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걸어서 오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억압받는 산골짜기의 농민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려 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그런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이 보내 주는 약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적잖은 병들을 퇴치할 수 있었다.
“그래, 선생이 준 약 하나 먹었더니, 어찌나 속에서 그런 그 벌레들이 쏟아지는지….”
“어휴 그러게. 난 그런 걸 처음 봤어! 화장실에서 그 꾸물럭대는 것들이….”
구충제라는 것을 처음 먹어 본 농민들은 자기들 뱃속에 그런게 있었다는 것에 경악하면서 ‘잘생긴 의사 선생’에게 감사를 표했다. 적당히 웃어 주며, 에르노는 품에서 소중한 노트를 하나 꺼내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질병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는가?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낙후된 시골을 찾아다니며 나는 재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흡연 경력이 오래된 노년의 남성들에게 자주 발병하는 폐암과 폐기종이 이곳에서는 흡연을 하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흡연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여성들에게 많이 발견되었다.
그 이유를 궁구해 본 결과 나는 가난이라는 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