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274화
아무튼 지금 우리가 보여 주는 ‘선진 문물’들은 곧 미국의 안방을 타격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국부 펀드가 각종 경로로 우회해서 가지고 있는 미국 내 라디오와 TV 방송사들의 주식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미국, 그리고 세계인들의 뇌리에 틀어박힐 것이다.
‘소련은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이렇게 노력합니다!’
애초에 ‘가정’이 박람회의 주제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무엇인가! 가사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수많은 기술발전들이 있었기에 여성은 가정,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던 게 아닌가?
소련이 지금 매카시에게 보여 주는 세탁기와 건조기, 식기세척기, 스팀다리미, 전자레인지는 다 사람이 일일이 해야 했던 노동을 줄여 주었다.
그 결과, 수많은 추가적 노동력들이 가정이라는 굴레를 떨치고 나와 사회에서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카시를 비롯한 보수적인 미국인들이나, 사실 연배가 있는 소련인들도 대부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었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음! 이것은 자동으로 물을 끓여 주는 기계인데… 이렇게 스위치를 누르면….”
매카시는 대체 전기 포트 같은 게 어디에 필요하냐는 듯한 얼굴로 내가 보여 주는 시범을 빤히 쳐다보았다.
“짜잔! 금방 이렇게 물이 끓는 게 보이시오? 부통령도 홍차 한잔하시겠소?”
마련된 티백이 들어 있는 찻잔에 전기 포트로 끓인 물을 붓자 김이 솔솔 올라왔다. 씩 웃으며 막 우린 홍차를 홀짝거리자 매카시는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으음… 굳이 스토브가 있는데 그런 것을 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 재미있지 않소? 하하하하하!”
자기 손으로 밥을 해 먹어 본 적이 없는지, 매카시는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일일이 연료를 어디선가 구해 와 가열장치에 넣고 불을 켰다 껐다 하는 게 얼마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가?
전기 콘센트만 있으면 작동하는 기계는 그에 비해 얼마나 간편한가. 아마 직접 가사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 그 사람들은 스탈린과 매카시가 주고받는 대담을 아마도 소련제일 확률이 상당히 높은 TV를 통해 보고 있을 것이고.
스탈린이 이렇게 나온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부터 한 번쯤은 되짚어 봤어야지.
“흠….”
이제서야 매카시는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안방으로 거실로 쏟아지는 소련산 가전제품을 보면서 미국에는 이런 게 없고 소련이 얼마나 혁신적인지 스스로 광고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이 방송을 볼 시청자들은 아마 엄청난 양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느라 지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단순히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물품 광고에서부터 여성해방, 그리고 지도자에 대한 암시까지. 맥아더는 전쟁을 하느라 민생은 뒷전이지만 소련은 어떤가?
건국된 지 이제 30여 년이 막 지나는 소련은 우중충하고 후진 농업국가에서 선진 산업국가의 면모를 아낌없이 과시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우주과학, 원자력, 전자공학 등의 분야에서는 미국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런 것을 보여 주어도 별 쓸모는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부통령?”
매카시는 뭔가를 결심한 듯 얼굴을 콱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외교적으로 결례가 되는 언사였지만, 애초에 외교적으로 결례가 되는 인간이기도 했으니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압니다. 소련은….”
그 줄여진 말 뒤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를래도 모를 수가 없었다. 소련은 자유롭지 않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임을 항상 자처해 왔고,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수호자임을 자임했다.
물론 미국이 저질러 온 짓을 생각하면 그것도 개가 웃을 일이지만, 이걸 보고 있을 미국의 중산층들은 딱히 느끼지 못했을 테니….
“우리 소련 역시 아주 잘 알지요! 미국과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 아닙니까? 베스트 프렌드? 하하하하하!”
“….”
“아아, 그 악랄한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에서 우리 두 나라를 비롯한 자유세계의 형제들이 힘을 합쳐 맞서 싸우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두 나라의 빛나는 우정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너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했지요….”
매카시는 계속 미국과 소련의 차별점, 미국의 장점을 어필하고 싶어 했으나 나는 소련과 미국이 친구임을 계속 이야기하기만 해도 되었다.
어차피 소련이 잘났음은 이 박람회의 수많은 물건들이 증명해 줄 테니까.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나를 이겨 먹기엔 글렀다는 것을 깨달은 매카시는 조용히 입을 꾹 닫고 나와 소련 정치국원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미국 주부들은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TV에서 봤는데 소련제 전기오븐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
‘옆집 스미스네도 샀더라고? 우리는 왜 안돼?’
동경, 친숙함, 질시, 그 무엇이든 좋다.
미국에 비해 소련이 여자로서 살기에 얼마나 좋을지, 상상하고 바라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것이니.
고된 집안일은 이제 기계한테 맡기고, 미래의 최첨단 국가인 ‘소련 스타일’로 오라!
* * *
매카시는 거부했을지언정, 매카시를 따라온 기자들이나 미국 관료들까지 자기 욕심을 눌러 놓지는 않았다.
“자, 자! 조심해서 싣게! 잘못하다 부딪히면 큰일 나!”
“하나, 둘, 셋, 허이짜!”
인부들은 겹겹이 포장된 가전제품들이며 소련산 최신형 전자제품들을 미국으로 가는 전용기에 실었다.
미국 측 경호원들은 설마 하면서도 소련이 개수작을 부렸을까 봐 박스에 폭발물이 없는지, 이상한 것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리 있나? 맥아더의 자작극이라면 모를까.
이분들은 이제 미국으로 가서 소련산 신문물을 자랑해 주어야 할 귀하신 몸들이다. 안 그래도 ‘평화 협상’을 위해 부통령이라는 고위급이 왔는데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대서양에 처박히면 그게 무슨 꼴이냐!
매카시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적재되는 화물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후… 이러다….”
“음? 뭐라고 하셨소? 허허허허, 참 보기 좋지 않소이까?”
이제 카메라가 꺼진 것을 안 매카시는 표정관리에 노력을 덜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어설프게 하하 웃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련이 미국을 집어삼키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서기장.”
“흐음,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주코프 장군!”
“…예! 서기장 동지….”
매카시는 전혀 국제관계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소련의 최고 명장 주코프 장군이오! 그리고 미국 코카콜라의 팬이기도 하지. 아마 미국과 콜라 거래가 끊어지면 쿠데타를 일으킬 지도 모르오!”
“아니, 서기장 동지, 저는 추호도 그런 마음을….”
당연히 아니니까 말해 주는 거지만 왜 매카시는 눈을 빛내는지 모르겠다. 아니, 진짜 주코프를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인가?
아무튼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는 실제 역사보다도 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물건을 많이 판다고 집어삼켜진다면, 우리야말로 이미 지난 대전 때 집어삼켜진 게 아니겠소? 지금도 미제 초콜릿과 스팸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원성이 높다오.”
“….”
“아무튼 우리 두 나라의 관계가 그런 것이 아니겠소? 미국은 풍요로운 대지가 주는 수많은 선물들을 우리에게 팔고, 소련은 발달한 과학기술을 이용한 문명의 이기들을 팔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 주는 관계 아니오? 하하하하하!”
은근슬쩍 소련의 기술력이 세계 제이이이이일인 것처럼 자랑하면서도, 나는 어디까지나 정치인답지 않게 진심을 이야기했다.
그 어떤 이념이며 사상보다도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두 국가를 묶어 냈다. 사는 쪽은 국민 생활의 질 때문에, 파는 쪽은 국민 소득의 문제 때문에 서로를 적대하기가 어려웠다.
‘충분히 발전한 민주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발전한 국가들은 서로에 대해 의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이며, 바쿠와 카스피해의 유전에 투자한 것은 또 얼마인가!
소련 역시 미국 안에 우회적으로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자산이 있었다. 또, 이제 막 설비투자를 통해 전자제품의 생산규모를 늘리고 있었는데 이걸 사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장인 미국이 틀어막히면 곤란했다.
실제 역사의 냉전과 다르게 미소관계가 겉보기로는 부드러울 수 있던 것은 월리스 같은 대소 유화론자의 집권도 있었지만, 돈으로 얽힌 끈끈한 관계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면에서 맥아더가 소련의 수출을 견제하겠답시고 헛짓거리를 하는 것은 최악의 한 수였다.
소련이야 생산량을 통제하고, 씀씀이를 줄여 가면서 버틸 수 있지만 미국은 국민들의 불만이 그대로 투표에 반영될 테니까. 안 그래도 사업가들이 이념적으로 지지하던 공화당에서 점점 돌아서는 것은 그런 경향을 반영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를 묻어 버리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이 아닙니까?”
매카시는 짤막하게 그렇게 답변했다.
이 자식이 평화협상 때문에 온 건지, 아니면 싸움을 내려고 온 건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 정부의 의향은 이미 국무부의 스파이들 때문에 다 알고 있는데, 맥아더는 무슨 생각으로 매카시를….
‘아, 생각이란 게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맥아더도 이제 매카시가 사짜라는 것은 안다. FBI의 비밀 보고서가 맥아더의 책상 위에 올라가기 전에 우리가 이미 한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대선에 이기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은 이상, 악마의 장단에 어울려 줄 수밖에 없다. 그 악마가 교활하고 영리하기는커녕 띨빡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임에도 불구하고.
“묻어 버린다… 흐음….”
슬쩍 주변을 살펴본 결과, 내 말을 들어 옮길 미국 고위 관계자나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참 배짱 좋게도 우리 홈그라운드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매카시의 용기에 찬사를.
“뭐, 그렇소. 우리는 미국을 묻어 버릴 것이오!(We will bury you!)”
“…역시!”
매카시는 원하는 대답을 얻었다는 듯,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결코 매카시가 원하는 말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에 가깝지.
“우리가 만드는 수많은 상품의 무더기 속에, 미국을 묻어 버리겠소! 우리는 한번 많이 만들기 시작하면 그냥 많이 만든다오. 으하하하하!”
물론, 말 그대로 미국을 묻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과 그 하수인, 제국주의자들은 전 세계에서 깽판을 치느라 자기 나라의 역량을 마구 낭비하고 있었다. 결국 제국주의가 자기모순에 짓눌려 파멸하는 그 날, 해방의 그 날이 오면 우리 소련은 기꺼이 그들을 묻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