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272화
맥아더는 결국 소련과의 일시적 ‘해빙’을 받아들였다. 뒤로는 소련의 가슴팍에 박아 넣을 비수를 숨긴 채였지만.
미국 측 협상단이 소련과의 회담을 위해 국제연합 본부가 위치한 제네바로 출발했다.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간단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이리저리 말을 돌리고 미적댈 것.
시간이 있으면 미국은 얼마든지 소련을 능가하는 전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 여전히 미소 간의 경제 격차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비율로 보아도 미국의 군비투자가 소련의 그것을 능가했다. 돈도 덜 쓰는 소련이 어떻게 이런 신무기들을 척척 개발해 내는지는, 쪼이는 미국 과학자들로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정부가 그렇게 방침을 결정했다고 모든 일이 쉽게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의 전쟁은 그만! 평화를 달라!”
. 당장 전쟁을 끝내라! 반전 구호들이 거리를 지배했다.
맥아더 정부 스스로가 소련 위협론을 접어 두고 해빙에 나서는 판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명분 자체가 효력을 잃었다. 소련과의 핵 감축 협상을 위한 협상단이 출발했다는 뉴스가 나자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다.
“누구를 위하여 우리는 싸우나! 부자들의 전쟁에 가난한 사람들이 죽는다!”
“내 아들이 인도에서 죽었습니다. 왜! 왜! 무엇을 위해서 내 아들이 죽었습니까?”
인도 게릴라들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불구가 되어 돌아온 상이군인들은 더 이상의 전쟁을 끝낼 것을 주장했다. 어머니들은 무릎 아래가 사라진 채 집 문을 두드리며 쓰게 웃는 아들을 보고 오열했다.
그리고 전쟁을 위해 투표한 것을 후회했다.
“핵전쟁만이 끔찍합니까? 아니오, 모든 전쟁이 충분히 끔찍합니다. 단호히 말하니, 이 세상에서 모든 전쟁을 끝내야만 합니다! 인도에서, 중동에서, 남미와 중국, 일본에서! 미국 시민의 이름으로 평화를 요구합니다!”
“와아아아아! 레닌! 레닌! 레닌!”
일약 전미의 스타로 떠오른 존 레닌은 시위대가 있는 곳마다 달려가서 특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사자후를 터트렸다.
“저, 저 빨갱이 새끼가!”
“하! 여러분네 대통령 맥아더도 우리 빨갱이들하고 손을 잡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에잇! 개만도 못한 놈들.”
“여러분 보십시오.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면 욕을 합니다.”
그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존 레닌은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시위대가 우하하하 비웃음을 터트리자 욕설을 퍼붓던 이들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씩씩대며 도망쳤다. 레닌이 지지자들을 위해 손을 흔들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열광했다.
“자유여! 평등이여! 평화여!!!”
반전 시위의 주축은 처음에는 상이군인과 그 부모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점점 규모가 확대되며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들은 바로 흑인 민권운동가들이었다.
<그 어떤 인도인도 내게 검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흑인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배달’해 주기 위해 군대에 가라고요? 개소리 집어치우십쇼. 인도인들은 내가 검둥이라고 침을 뱉은 적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야 합니까?”
“슈거 씨! 그렇다면… 지금 공개적으로 정부의 징병 정책을 반대하시는 겁니까?”
“씨발 당연하죠!”
슈거 레이 스탈린, 개명 전 예명 슈거 레이 로빈슨은 세계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 후 기자에게 그렇게 일갈했다.
“나는 지난 대전에서 장병들을 위해 위문 경기를 다니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두 명의 흑인 권투선수들이 링 위에서 싸우는 것을 웃고 박수를 치며 보는 것은 모두 백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흑인 병사들은 출입을 금지시켰다는군요. 이게 당신들의 잘난 미국입니다!”
“…슈거 씨, 그러면….”
“슈거 말고 스탈린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강철의 사나이, 멋지지 않습니까?”
지난 대전을 겪은 흑인들은 더 이상 순진한, 미국 사회의 이상을 믿는 이들이 아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국가에 봉사하면 대등한 권리를 인정해 주리라고 주장한 이들은 현실 앞에서 입을 닥쳐야만 했다. 정부는 그들을 기만하고 생체 실험을 했고, 평등한 전우여야 하는 군대에서도 그들은 차별당했다.
“나는 좆 같은 땅덩어리를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전쟁을 하는 이 정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난, 불평등, 이 끔찍하고 좆 같은 차별! 여러분, 전쟁에 당당하게 반대를 외치십시오!”
* * *
“당신, 신분증 있나?”
“…난 그냥 밥만 좀 먹을 거요.”
보안관은 인상을 콱 찌푸렸다. 요즘 것들은 말이지… 그렇게 뇌까린 그는 홀스터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경고했다.
“요즘 네놈 같은 부랑아들이 무슨 챙겨 먹을 게 있다고 이 시골짝까지 기어들어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행패를 부리기 전에 누가 너흴 지켜보고 있는지 기억해 두라고.”
“….”
길을 막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부랑자를 보안관은 미심쩍게 노려보았다. 시큼하고 퀘퀘한 냄새는 분명 아편이나 그 비슷한 종류 같았다. 요사이 인도에 다녀온 병사들은 그런 마약류에 잔뜩 중독이 되어 있었다.
그런 놈들은 이런 작은 동네에도 들어와 마약을 하고, 머리에 겉멋만 들어찬 어린 애들한테 마약을 팔아서 중독자로 만들었다. 아니면 돈을 뺏겠다고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든가, 그나마 나은 경우라면 조용히 길거리에서 뒈져 주는 게 아닐까.
땟국물에 절은 군복에 낡은 야전침낭을 메고, 삽에 대검까지 찬 부랑자는 비칠비칠한 걸음걸이로 마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저놈을 제지해야 하나, 보안관은 고민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팬케이크 세 장과 베이컨하고 계란 두 개 주세요.”
“돈은 있나?”
“….”
작은 시골마을의 유일한 식당에는 간판도 없었다. 부랑자는 그렇지만,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곳을 따라가 식당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요리사는 퉁명스레 돈은 있냐고 물었지만, 부랑자가 군용으로 추정되는 조끼를 뒤져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자 침을 탁 뱉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부랑자, 존은 이런 대우에는 이미 익숙했다.
“자, 먹게. 먹고 그… 개좆 같은 아편 냄새 피우지 말고 썩 꺼지게.”
“….”
이런 시골에서도 이제 아편의 냄새는 익숙한 무엇이 되었다. 요리사는 아편이 어쩌구, 요즘 어린 것들은 어쩌구 떠들며 툴툴대고는 카운터 뒤편의 의자에 육중한 엉덩이를 실었다.
쩝쩝대며 팬케이크와 베이컨과 계란을 먹어치운 존은 핏발이 선 눈을 끔뻑거리며 지폐를 셌다. 하나… 두울…
저 부랑자가 그래도 밥값은 낼 수 있다는 데 안심한 주인은 퀘퀘한 구린내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제 나름의 충고를 해 주었다.
“이봐, 뭐가 그렇게 힘든지 몰라도 빨리 직업을 구하고 정착하는 게 좋을 거야. 요새 군수공장에 일자리가 한두 갠가?”
“…혹시 지미 콜린스라고 압니까?”
“뭐? 콜린스?”
하지만 들은 척도 안 하고 존은 제 할 말만 했다. 부랑이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래서 이쪽 역시 하고 싶은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결론이 났다.
“콜린스… 그 목수 집 말인가? 지미? 지미?”
“…예, 아마 목수가 맞을 겁니다.”
“넌 그놈을 어떻게 알지?”
존의 친구, 지미는 자기가 고향에서는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왔다고 했다. 켄터키의 구릉이 늘어선 곳에서 주말이면 옆 농장의 말을 빌려 타고 놀고, 계곡 사이로 낚시를 다니던 이야기를 지미는 즐겁게 떠들었다.
그 개 같은 인도에서 병사들을 자살하지 않고 버티게 한 것은 아편과 고향의 기억뿐이었다.
“…제 전우였습니다. 인도에서요.”
“그 개자식은….”
쾅! 요리사는 아편에 쩔어 있긴 해도 제법 유순해 보였던 부랑자가 탁자를 꽝 내리치자 깜짝 놀라 장부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어떤 개자식도 내 전우더러 개자식이라곤 못 해!”
“아, 알겠네. 크흠… 그… 그놈은 죽었어! 제길, 이미 몇 달 됐다고!”
“예…?”
부랑자는 몇 발짝 뒷걸음질 치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리사는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카운터 아래 숨겨 두었던 샷건을 찾기 위해 더듬거렸다.
“그래! 너, 너처럼 아편에 중독돼서 한동안 이상한 짓을 하고 싸돌아다니더니 제 머리통에 권총을 당겼지. 이제 됐나?”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당신 거짓말 하는 거지!”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시뻘건 피눈물을 흘리며 부랑자는 마구 고함을 쳤다. 하지만 요리사는 이번엔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즐리나 엘크도 한 방에 쏴 죽이는 더블 배럴 샷건이 그의 손에 있었으니까. 철커덕하고 탄을 장전한 채 난동을 피우는 부랑자를 겨누자, 부랑자는 고함을 치다가 갑자기 조용하게 얼어붙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직접 알아보도록 하라고. 여기서 개짓거리 하지 말고.”
“….”
“자, 이제 셋을 셀 테니, 내 눈앞에서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티즐 보안관이 뭐라고 지랄을 하건 네 머리통에 20게이지 납탄 두 발을 박아 줄 테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부랑자는 아편에 쩐 마약중독자치고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몸에 밴 군대식 태도를 봐서는 몇 년은 군대에 있었던 것 같은데 철컥하고 장전된 샷건을 보자마자, 아니, 장전되는 소리를 듣자마자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턱을 딱딱 부딪치고, 들어 올린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부랑자는 가게 문을 나섰다. 요리사는 그가 갑자기 돌변할까 봐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이나 샷건을 잡고 문 쪽을 겨누었다.
“지미, 지미, 안 돼… 가지 마….”
요리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마을 공동묘지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서야 간신히 옛 전우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E. 콜린스. 1922―1950>
태평양의 섬들에 늘어선 백사장에서,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하는 잽스들을 도륙할 때도 함께였던 전우. 중동의 사막과 인도의 정글에서 그의 옆에 있었던 오랜 전우는 이제 차가운 시체가 되어 초라한 공동묘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얼마나 용맹한 군인이고, 든든한 전우였으며, 훈장까지 받은 뛰어난 그린베레 특공대원이었는지에 대해서 묘비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연도만이 쓰여 있을 뿐.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던 중 끔찍한 철컥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존은 그 소리만 들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도에서 저 소리가 들리면, 지뢰가 터지며 동료 중 누군가의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떨어져 나간 단면에서 솟구치고, 명랑하게 웃던 전우는 제풀에 지쳐 죽어갈 때까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 점점 힘을 잃는 것을 듣는 그 심정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이봐, 자네… 식당에서 행패를 부렸다지?”
“…그자가 내 전우더러 개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자네가 내 관할인 이 마을의 선량한 시민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게 중요하지.”
“…우리도 선량했습니다.”
웅얼거리는 부랑자가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쓰지 않고 보안관은 장전된 권총을 겨눈 채 허리춤의 수갑을 찾았다.
“우리도 선량한 군인이었습니다. 인도에서 그 꼬마애가, 빌어먹을 꼬마애가 군화를 닦으라고 할 때 크릭은 바싹 마른 꼬마애가 불쌍해서 달러를 주고 군화를 닦았죠. 하지만 펑! 그 개 같은 꼬맹이는 폭탄을 들고 들어온 겁니다. 그때도 그 철컥 소리가 났다구요.”
“뭐?”
“그때 크릭이 지르던 비명이 아직도 들립니다. 뱃속에 담긴 게 쏟아져서 그걸 안으로 넣으려고, 넣으려고 하는데도 계속 쏟아지고… 모두 어디 갔죠? 크릭! 지미! 조니! 알란! 제기랄! 신이시여… 어머니! 어머니!”
키가 190에 가까운 덩치가 추레한 몰골로 엎어져 어머니를 찾는 광경은 희극적이다 못해 비극적이었다. 그 자신도 참전용사였지만, 보안관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지옥이 이 사내들을 이 꼴로 만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