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271화
“호오… 그랬다고?”
미국은 비공식적 외교라인을 통해 맥아더의 의중을 전달했다.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 좋게좋게 에둘러 말했지만 결론은 ‘좆 까라’.
여전히 미국의 공격 능력은 우월했고, 소련의 대공 방어망은 빈약했다. 미국이 고고도에서 대거 핵폭탄을 탑재한 폭격기들을 투입할 경우, 소련이 그 모든 것을 막아 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특히, 영국이나 아이슬란드 같은 전진기지에서 날릴 경우에는.
소련이 미국에 선제 핵공격을 해도 혼자 멸망하는 게 아니라 같이 멸망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맥아더는 거리낌 없이 적의를 드러냈다.
심지어, 미 공군의 비밀 보고서는 이렇게 판단했다.
[소련의 핵미사일 투발 능력은 최대로 평가해도 제한적이며, 선제공격을 통해 핵미사일 발사능력을 줄이거나, 피해를 감수하며 전쟁을 개시할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서기장 동지, 이 파시스트 전쟁광들은 결코 평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말인즉슨, ‘핵미사일 몇 발 정도 맞아 주면서 싸워도 이길 수 있다’라는 것이다. 미국 정보부는 핵전쟁을 통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다지 하고 있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국민 몇천만 정도는 내주면서 소련을 함께 파멸시킬 것을 전제로 작전을 짰다.
공군 보고서는 그런 내용을 함의하고 있었다. 워싱턴 내부 ‘방주’, 핵공격에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비밀 벙커를 구축하고 숨어서 영국, 스페인, 남이탈리아 등의 공군기지에서 중폭격기를 출격시킬 경우 소련 주요 도시들을 모조리 부숴 버릴 수 있다!
그 대가로 미 동부의 대도시들은 폐허가 되겠지만 뭐 어떤가. 서부에도 산업시설들은 많았고, 미국의 막강한 산업력은 핵전쟁 이후에도 세계 1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공군은 평가했다.
동맹국들 역시 소련의 핵 보복 앞에 폐허가 될 테니. 핵폭격기가 날아온 미 동맹국들을 소련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며, 그 구실로 소련의 동맹국들 역시 핵폭격을 하면 된다!
다시금 말하지만 제대로 미친놈들이었다. 영국이나 스페인이 이 내용을 보면 뭐라고 할까?
동맹국들을 고기방패 삼아 소련의 핵반격 능력을 소진시키고, 멸망 이후의 세계를 혼자 차지할 꿈을 꾼다. 유럽 국가들은 국토가 작으니 핵폭격에 의한 피해가 크지만 미국 정도면 ‘감당할 만하다’라고 평가하는 것이 백미였다.
“자네들, 미 정부의 가장 큰 적이 누군지 아나?”
“예?”
“바로 미국민이라네. 하하하하!”
하지만 맥아더의 이 야심찬 계획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국민이었다. 워싱턴의 고위 인사들이 숨어 들어갈 벙커를 구축하고 서로를 파괴할 전쟁을 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걸 알면, 파괴당할 국민들은 과연 좋아할까?
실제 역사에서의 베트남전도, 아프간전도, 이라크전도, 국민의 의지에 의해 끝났다. 맥아더가 끝끝내 대놓고 좆 까라고 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대놓고 거절할 경우 여론의 후폭풍이 두려우니.
아마 자기 임기, 재선을 가정하면 6년 내에 ‘최종 해결책’을 강구할 것이다.
“자기가 대통령 노릇을 해먹을 수 있는 기한이 루즈벨트처럼 길지는 않을 거라고 알기는 하겠지. 그 안에 해결책을 강구할 것이고. 핵전력 감축을 거부한 것도, 이미 투자한 게 너무 많아서가 아니겠나?”
맥아더는 집권하자마자 천문학적인 예산을 군비 증강에 때려 부었다. 그리고 그 중 상당한 부분은 핵전력의 증강에 투입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는 없지만 핵폭탄은 수백 개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럴 재정을 거의 다 경제발전에 쏟아부었다. 미국처럼 세계를 상대로 직접 파병해 전쟁을 하는 게 아니었으니 군 규모도 감축했고, 핵폭탄 역시 미국처럼 수백 개씩 쟁여 놓지 않았다.
대부분의 농축 우라늄은 폭탄이 아니라 발전소를 위해 들어가, 소련 전기생산의 대략 15% 정도는 이제 원자력 발전이 담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결과, 미국과 소련의 경제력 격차는 빠른 속도로 좁혀졌다. 그러니 맥아더의 똥줄이 탈 수밖에. 어쩌면, 진짜로 빨리 핵전쟁을 벌여 소련을 영구히 꺾고자 할지도 몰랐다.
“핵잠수함의 개발은 아직 한참 남았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하지만 시간과 예산을 조금 더 주신다면….”
뭐, 중요한 게 핵잠수함 그 자체는 아니었다.
“핵잠수함이 중요한가? 그게 있다고 저들이 믿는 게 중요하지.”
* * *
“…이 보고가 사실이란 말인가?”
스푸트니크 발사의 충격,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발사되는 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에 빠진 OSS에게 또 한 번의 충격적인 뉴스가 도달했다.
소련에 침투시킨 첩보원들에게 뭐 좀 물어 올 거 없냐고 한참이나 쪼았더니 진짜로 물어 오긴 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강렬했다.
“예, 구체적인 설계도까지 훔쳐 내지는 못했으나….”
“하, 하, 저놈들이 열등하다고? 얼마나 미쳐야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소련 병기국에서는 이미 대륙을 넘나드는 핵미사일보다 더 실용적이고 강력한 물건을 개발에 성공해 버렸다.
“핵미사일을 쏘는 잠수함이라니! 제기랄, 이런 걸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첩보원이 긴급하게 올린 보고서에는 소련이 이미 원자력 에너지로 항해하는 잠수함을 바렌츠해의 기지에서 비밀리에 취역시켰다고 쓰여 있었다.
디젤 연료가 아니라 엄청나게 밀도 높은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잠수함의 잠항거리는 이론상 무제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보고서 역시 그 지점을 이야기하며, 소련의 신규 원잠, ‘노틸러스’는 시험적으로 세계일주를 마쳤다고 이야기했다.
OSS 국장 월터 스미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련이 진짜 작정하고 선제공격을 했다면 미국은 저 핵폭탄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고 두들겨 맞을 뻔했다. 핵잠수함의 오랜 잠항능력이라면, 바렌츠해에서 출항해 영국의 경계선을 뚫고 미국 앞바다에 불쑥 출현할 수 있었다.
미군이 아무리 강력해도 365일 24시간 전 해역을 감시할 수는 없었다. 소련 잠수함이 야음을 틈타 순항미사일을 날린다면 미국은 뭣도 모르고 선제공격을 얻어맞을 것이 뻔했다.
충분한 위력의 핵탄두를 몇 개나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로 위험했다. 그게 워싱턴 DC에 떨어져 미 정계와 군의 고위급들을 모조리 박살 낸다면?
국장은 등골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마냥 부르르 떨었다. 소련은 얼마든지 미국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한 장난감들을 여러 개나 가지고 미국을 농락하고 있었다. 또 뭐가 더 있을까?
“후우… 이 건은 내가 각하께 직접 보고하겠네.”
“예, 국장님.”
맥아더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미국 역시 작정한다면 소련의 성과들을 몇 년 안에 모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동안 비정상적일 정도로 군 예산을 증강시켜 놓은 것이 있으니, 조금만 더 투자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까지는 소련과 평화 무드를 유지하는 것이 나아 보이기도 했다. 소련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전력을 가지게 되면, 덜한 피해로 소련을 쓸어 내버릴 수 있을 테니. 그런 면에서 스파이들이 훔쳐 온 이 설계도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백악관 고위급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있으면 어떤 상황에도 소련을 확실히 파멸시킬 수 있다, 이 말인가?!”
“그, 적절한 미사일이 있으면 가능할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직 설계도의 수준은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뭐 하고 있나! 빨리 의회에 가서 예산을 받아 와야지!”
“예, 알겠습니다!”
맥아더는 OSS의 보고서를 읽어 보더니 또 벌컥 화를 냈다. 보좌관은 언성이 높아지자 화들짝 놀라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핵잠수함이 있으면 일단 발사거리가 비약적으로 가까워졌다. 통상적으로 폭발이라는 것이 3차원으로 향하다 보니, 거리가 1/2로 가까워지면 폭발력은 8배 증가했다. 같은 중량의 탄두로도 8배 높은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미사일이라는 한정된 시스템 안에 정밀한 유도장치와 강력한 탄두, 많은 연료 등을 모두 넣을 수 없으니 무엇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가까이서, 기습적으로 쏠 수 있는 미사일이라면 연료나 유도장치의 비중을 줄일 수 있었다.
발트해 앞바다로 몰래 숨어 들어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으면, 그리고 수백 척의 대잠 구축함을 배치해 소련 핵잠을 격침할 수만 있으면 핵전쟁에서 완승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차피 소련의 핵탄두 전력 자체는 전력으로 핵전력을 증강시킨 미국에 미치지 못했다. 그 격차를 극복할 생각으로 이런 걸 개발했겠지만.
“이걸 훔쳐낸 OSS 요원이 누구라고? 그 친구한테는 포상을 줘야겠군. 아주 잘 했어!”
“하하하하, 예, 아주 좋습니다. 명예 훈장을 주어도 모자랄 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전까지는 소련하고 손을 잡는 척만 해도….”
최종적으로 소련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은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었다. 5년, 5년 정도 소련이 세계에서 좌익 혁명을 선동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그 이후에는 파멸시킬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소련의 평화냐 파멸이냐의 양자택일 강요에도 대안이 생겼다.
“뭐, 이제 핵 감축을 하는 척해도 좋겠군. 한 5년 정도만 평화를 만끽하라고 하게. 제 놈들이 뭘 하겠나? 핵폭탄이 자기네들 머리 위에 떨어질 때까지 뭣도 모르고 깝죽대기나 하겠지!”
* * *
“서기장 동지, 그런 극비 정보를 마구 유출시키는 것은 부담이 크지 않겠습니까? 미국이 그걸 가지고 다른 마음을 품으면….”
“크루글로프, 자네 뭐 하나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닌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기장 동지?”
베리야에 비해 크루글로프는 상당히 띨빵했다. 자기가 시켜서 흘려 놓고도 정확한 사항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숙청당한 전임자를 보면서 일부러 그런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아주 연기를 잘하는 것이다. 쿠즈네초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거 가짜잖나.”
“…아!”
우리 측이 이미 파악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OSS의 첩보원은 흘리는 정보를 넙죽넙죽 받아 삼켰다. 아무리 소련이 기술적으로 앞서 나간다 해도 어떻게 벌써 이 예산만 가지고 핵잠수함을 배치하겠는가?
핵잠수함의 설계도부터가 개구라였다. 탑재될 원자로의 설계도 역시 결함들을 잔뜩 집어넣은 ‘폭탄’이었고. 터지면 아마… 꽤 곤란할 것이다.
성능도 아마 예상한 만큼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아마 상부에선 과학자들을 꽤 닦달할 게 뻔했다. 비싼 돈을 들여서 추진한 원자력 잠수함 프로젝트가 아예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맥아더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재선이 2년 남았으니, 맥아더 임기 내에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귀중한 시간을 번 것이나 다름없다.
“미 정부가 몇 년은 우리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했다면… 뭐, 그 사이에 세계를 적화시키면 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