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269화
“흐음, 이제 여기다가… 광고는 준비됐나?”
“예! 역시, 서기장 동지께서는 예술적 재능도….”
“제발 그 입 좀 닥치라니까, 대머리!”
미국은 쿠바에 친미 정권을 세우려 했으나, 역사보다 조금 일찍 카스트로가 이끄는 일단의 청년들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약간 체면이 깎였다.
총선을 앞두고, 맥아더가 취할 수 있는 수는 뻔했다. 상승장군을 자처해 왔다가 대통령이 된 이후 전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만큼, 앞마당인 쿠바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그 가장 유력한 수단은 바로 핵무기였고.
“크흠… 그렇다고 해도 서기장 동지께서 예술에 재능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만….”
“몰로토프, 자네까지 흰소리인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젊을 때는 그루지야어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민족시인으로 나름의 명성을 떨쳤고, 이제는 영화나 영상매체를 전 세계에서 가장 세련되게 구사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거의 전적으로 미래 지식에 의존한 것이지만. 아무튼 이런 신격화는 미리미리 눌러 둘 필요가 있었다.
“요는 간단하네. 공화당에는 자금을, 민주당에는 아이디어를. 혹시나 우리와 연계가 있는 것이 발각되더라도 공화당이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도록 하게나.”
“예! 서기장 동지!”
“지금 선거는 다음 미 대선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일세. 이번 총선에서 참패한다면 맥아더의 당 장악력이 흔들릴 것이네. 공화당의 온건파 후보들이라고 우리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소련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솔직히 말하면 공화당 온건파들이었다. 지금은 공화당에 가 있는 트루먼, 이제 막 상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닉슨 같은 이들이 실제 역사에서 소련을 가장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물론 닉슨의 두뇌이자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오고 남미를 지옥으로 만든 악마, 키신저는 이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갔지만…. 우리로서는 무식하게 힘만 믿고 정공법으로 밀고 오는 맥아더가 교활한 공화당의 모략가들보단 훨씬 나았다.
최선은 바로 맥아더가 공화당 전체를 끌고 침몰하는 것이다. 이제 몇 가지만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보였다.
아직 미국 정치인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낯선 미디어가 가지는 파급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명령을 내리는지 비서실장만큼 알고 있는 우리 정보부가 판단한 바는 그러했다.
“맥아더는 핵폭탄이 있으면 소련을 꺾을 수 있을 줄 알았겠지만… 하하하하하!”
* * *
“엄마! 이제 곧 에드 설리번 쇼 해요!”
“그래! 곧 가마. 요샌 무슨 광고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1944년에 전쟁이 끝난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전자공학 기술에 힘입어 수많은 미국의 가정집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
1950년에 이르면 대략 40%가량의 가정이 작으나마 TV를 한 대쯤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값싸게 양산되기 시작한 소련제 TV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전자회사들 역시 TV의 저가화와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이제 미국의 웬만큼 산다는 집에서는 저녁을 먹으며 TV를 보곤 했다. 재빠르게 TV 광고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은 그 기회를 타서 집안의 거실마다 광고를 때려 넣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 넷, 넷, 여섯, 일곱…]
[십, 구, 팔, 칠, 육, 오…]
“음?”
신형 포드 자동차 광고가 끝나자, TV에서는 처음 보는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TV를 보던 미국인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였다.
햇빛이 비치는 풀밭에서 어린 소녀 하나가 꽃잎을 뜯고 있었다. 세 살은 됐을까? 아직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해서 엉뚱하게 다섯 다음에 넷이 나오는 꼬마는 천진하게 웃었다.
한편, 굵은 남성 목소리가 그 배경에서 10부터 카운트다운을 했다.
[…여덟… 아홉…]
[삼, 이, 일.]
화면이 정지했다. 꽃잎을 뜯으며 숫자 공부를 하던 귀여운 꼬마 소녀의 모습이 멈추고, 비행기가 지나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소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폭발하는 버섯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핵폭발의 휘황한 불꽃 속으로.
핵전쟁 이후 어떤 폐허가 남을지를 상상한 듯, 불타 없어진 풀밭과 잿더미만 남은 주택가가 화면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함께 평화로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거나, 암흑 속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엄마? 봤어요?”
“…그래 아들.”
[민주당을 위해, 평화를 위해 투표하십시오. 집에 있기에는 우리가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맥아더가 그렇게 쉽게 외쳐 온 ‘핵전쟁’ 그 자체가 불러올 참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산책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비록 적지 않은 수의 청년들이 군대로 다시 끌려갔지만 대부분은 안온한 중산층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근거 없이 확신했던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투표… 해야겠네요….”
* * *
“이 모든 것이 빨갱이들의 선동입니다! 그들의 술수에 놀아나지 마십시오!”
매카시는 늘 하던 대로 빨갱이들 이야기를 했다.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매카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 암. 역시 빨갱이들이 설쳐서 이 모양이 된 건데, 어떻게 또 빨갱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나?”
“부통령 각하? 그렇다면 광고의 어느 부분이 사실과 다른지 명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크흠… 나, 나 말이오?”
하지만 기자의 질문에 매카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맥아더는 미국의 방공망을 소련제 저질 폭격기가 뚫을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항상 만에 하나는 존재했으니.
다만 함께 참석해 있던 공군 출신의 보좌관 하나가 눈치 빠르게 선수를 쳤다.
“소련의 과학기술은 극히 저열한 수준입니다! 우리 미국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몇 가지 그들 수준에 맞는 무기들을 개발해 나치 독일과 싸웠을 뿐, 독자적인 과학기술력은 미국에 비해 열등한데 어떻게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무거운 폭격기를 날리며 격추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알겠습니다.”
기자 역시 만에 하나 같은 질문을 하려 한 것 같았으나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그랬다간 경을 칠 것을 알았는지 자중했다. 최고 전문가인 공군이 대놓고 미국의 방공망은 안전하니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데, 비전문가들이 어찌하겠는가?
그것과 별개로, 소련은 여전히 미국과 핵전쟁을 하기 싫다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소련 측 대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민주당의 TV 광고에 대해 유감을 표명할 정도였다.
“우리 소련은 결코 혈맹 미국에게 선제 침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조국전쟁 시절 미국이 소련을 도운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좀 아는 사람들은 소련의 저런 립서비스는 그저 화전양면전술에 불과하다 폄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핵전쟁의 공포에 떨었다.
매카시가 아무리 우수한 미국의 과학기술에 대해 선전해도, 소련이 수출하는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보면 미국과 소련의 격차가 크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도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매카시의 전매특허인 빨갱이 몰이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지만, 꽃노래도 한두 번. 수시로 빨갱이를 써먹는 지경에 이르면 약발이 다할 수밖에 없었다.
“간첩! 스파이! 스파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안보태세를 사보타주한 결과가 바로 핵전쟁을 통한 파멸입니다!”
급히 태세를 바꾸어, 민주당을 뽑으면 핵폭탄에 의해 미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 역시도 사람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
후버의 FBI마저도 매카시가 마지못해 지목한 이들을 수사한 결과 ‘소련 공산당과 관련된 혐의가 없다’라고 발표하는데 어찌할 것인가!
국무성에 수백 명의 스파이가 있어서 미국의 안보전략이 모두 새나가기 때문에 소련이 핵을 쏘면 맞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던 매카시는 점점 자충수에 몰렸다.
“그렇다면 왜 국무성 내부 스파이들을 색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당장 전쟁의 위험이 임박했다면 그들을 하나라도 색출해서 잡아내야 하지 않습니까?”
“매카시 부통령님이 말해온 대로 소련이 진정 미국을 파멸시킬 의도가 있다면, 왜 당장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스파이들을 잠입시켜 미국을 통째로 집어삼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왜 핵전쟁을 통해 폐허로 만들려 하겠습니까?”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 보면 반드시 말실수가 나오는 법. 집요하게 질문하는 기자들 앞에서 매카시의 논리는 점점 부서져 갔다.
“소련은 그래서 미국을 파멸시키려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집어삼키려 하는 것입니까? 어느 쪽이 국무성의 예측입니까?”
“그 사실은 기밀이기에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국가기밀을 너무 파헤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 언론이 지켜 온 ‘애국적 보도’ 관행을 명심하십시오.”
‘애국적 보도’ 관행.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할 언론에게 국익을 고려한 보도를 요구하는 매카시의 뻔뻔한 작태에 기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물론 여전히 매카시는 적잖은 추종자들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적이 많은 만큼, 그를 맹종하는 사람들도 전미에 수십만을 거느린 거물. 결국 지역 단위에서 조직을 동원해야 하는 경선에서 매카시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매카시즘 광풍에 민주당계 풀뿌리들이 한번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게 강화된 확신은 한번 끌려 들어온 사람이 나가기 극히 힘들게 했다.
애송이 기자들이 섣불리 매카시를 공격했다간 지역 사회와 언론에서 매장되기 십상. 전국 단위의 지지율은 요동쳤어도 그들의 아성은 강고해 보였다.
“크흠… 저는 정치는 잘 몰라서….”
“예? 아이고, 민주당이고 공화당이고 나와는 관련 없습니다.”
핵전쟁의 공포에 떨면서도, 여전히 빨갱이로 몰려 매장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강력했다. 사람들은 좌파로, 빨갱이로 몰릴까 봐 공개적으로 민주당을 위해 투표하겠다 말하지 못했다. 옆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사람들은 점점 더 숨어 들어갔다.
“제기랄… 투표일날 보자.”
“오늘은 꼭 투표를 할 겁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오랫동안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읍시다!”
하지만 민심은 점점 맥아더 정권에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맥맥 듀오의 한심한 작태를 보며 투표를 결심한 중도층들. 안방에 쏟아져 들어온 광고에 충격을 받은 주부들. 그리고 단결해서 투표장으로 향하는 흑인들까지.
총선 직전까지의 여론조사를 믿고 근소한 격차로 승리 내지 경합을 예측하던 맥아더 행정부는 결과가 발표되자 충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