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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68화 (268/300)

# 268

268화

한편 미국의 지배가 좀 더 잘 작동한 곳도 있었다.

“집행하라!”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배에서 떨어져 바다로 들어갔다. 얕은 바닷가에 이미 상자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그 위로, 기름을 부은 군함들은 사격을 가해 상자들을 싸그리 불태워 버렸다.

“더, 더! 활활 태워 버려!”

“…예!”

“아이고, 아이고… 저걸 어쩌나… 저 아까운 것들….”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 밀수 의약품 폐기’가 진행되는 피그만 앞바다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상자들 안에는 쿠바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수백 종류의 소련제 필수의약품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의약품 저가 판매를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덤핑으로 규정한 미 정부와 쿠바 정부에 의해 대부분의 물량이 압류되어 폐기되었다.

카리브해의 비취색 바닷물 속으로 불타고 남은 의약품의 찌꺼기들이 흘러나왔다. 눈 뜨고 생명줄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눈물처럼.

“다들 물러나라! 크흠, 불명확한 방법으로 제조된 물건이기에 어떤 유독 물질이 발견될지 모른다! 다들 물러나도록!”

“허이구, 유독 물질이 나온다고 하면 바다에 저렇게 풀어 놔도 되나?”

압류한 약품들의 폐기를 진행하면서도, 예상외로 거칠게 반응하는 사람들 때문에 놀란 권력자들은 허겁지겁 사유들을 가져다 붙였다.

제조공정이 검증되지 않았다, 유독성분이 검출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따위 변명들이 모조리 다 핑계라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개새끼들, 빌어먹을 놈들….”

“워! 워! 물러나라! 다 집으로 돌아가!”

을러대는 병사들을 두고 뒤돌아서면서도 사람들은 정권과 군부에 대한 욕설을 뇌까렸다.

쿠바 대통령 소카라스(Carlos Prio Socarras)의 자유주의 정권은 나약했다.

선거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진 좌파 학생 그룹들은 사회주의를 요구하며 정권을 흔들었고, 극우파 친미 부역자들은 미국이 시키는 것을 들으라고 대통령을 을러댔다. 나름대로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중시하려 했던 정부는 좌우 양측에서의 파랑에 흔들렸다.

마침 미국은 남미에서 확산되어 가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바로 앞마당인 쿠바에서 ‘인도주의’를 빌미로 소련이 손을 뻗치는 것을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미국 자본가들과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만 쿠바 정부는 약품 폐기에 동의했다. 아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의 취약한 권력기반과 없다시피 한 정통성은 미국 앞에서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최초의 쿠바섬 출신에, 민주―평등선거로 당선된 소카라스조차도 정치적 자주를 포기하고 서슬 퍼런 미국의 포함외교 앞에서 무릎을 꿇는 쪽을 선택했다.

“저… 각하? 아바나에서 급전이 들어왔습니다.”

“음? 무슨 일인가? 설마 폐기를 중단하라는 것이면 곤란한데….”

“그게 아니라… 크흠, 쿠데타가 터진 것 같습니다.”

“뭐???”

* * *

“현재 나라 안팎으로 불안이 가중되는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나약한 정부는 도저히 쿠바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중대사를 떠맡을 수 없다고 군부는 판단했습니다. 이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수천 명의 무장 병력들이 아바나 중앙 대로를 행진했다. 이들을 막아서야 할 군 병력들과 경찰들은 오히려 가만히 서서 경례를 붙였다.

“바티스타 대통령 만세! 만세! 만세!”

그동안의 끔찍한 ‘자유주의 통치’를 견딜 수 없었던 일부 시민들은 쿠바 국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본인이 밀었던 대선 후보가 낙선한 이후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쿠바를 떠나 미국에 가 있었던 전 대통령, 풀헨시오 바티스타(Fulhencio Batista)는 미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수도 아바나로 귀환했다.

미 국무성은 현재 쿠바가 자칫하면 국민적 요구 때문에 소련산 의약품 수입을 재개하면서 중남미에 만든 ‘대소 방어선’이 붕괴될 것을 우려했다. 소카라스는 소련산 약들을 폐기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실행했지만 미국은 그의 이용가치가 다했다 판단했다.

한때 ‘중사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차지했던 바티스타가 다시 돌아오자, 군대는 독재자의 복귀를 환영했다.

“와아아아!! 바티스타! 바티스타!”

“빨갱이들을 지옥으로!”

소카라스는 군대와 자본가들, 무엇보다도 미국의 비호를 받는 바티스타를 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것이 최선일지도 모르지….”

미국에게 저항하다가 폐허가 되는 것보단,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민주주의와 산업개발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쿠바의 적잖은 엘리트 지식인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국의 주먹은 가깝고 이상론을 설파하는 소련은 너무 멀었다. 자유주의자들 중 좀 더 보수적인 이들은 한발 더 나가 이렇게 주장했다.

“머리에 피도 덜 마른 애새끼들이 빨갱이 물이 들어서 설치니 나라가 이 모양이 되지!”

쿠바에서도 물론 개혁은 일어나고 있었다. 독재자 바티스타의 후계자를 몰아냈던 1944 선거, 그리고 쿠바인이 당선되었던 1948 선거. 이것을 지켜본 이들은 역사의 발전에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중심을 잡아 주었기에, 쿠바가 민주주의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양시론(兩是論)을 펼치는 자들도 적잖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반미로 돌아서 있었다. 지금까지 잘만 쓰던 약에 구실을 붙여 바닷속에 처박고 불태워 버린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우리가 죽으라면 죽고 닥치라면 닥치는 개돼지인줄 아느냐!”

“뒈질 때 뒈지더라도, 한번 찍소리라도 내뱉고 뒈져 보자!”

이미 한번 바티스타 정권을 반대하는 투표를 해 본 사람들은 거리로, 거리로 밀려들었다. 아직 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한 경찰, 군인, 그리고 깡패들은 한 발짝씩 물러났다.

“왜 이래! 다들 집으로 들어가라!”

“해산하라!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하나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하나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누군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따라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샌가부터 입에서 입으로 유행을 타며 퍼지기 시작한 노래를, 거의 모든 시위자들이 알고 있었다.

“하나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라! 우리는 승리하리니. 연대의 깃발이여 전진하라!”

“벗이여, 오라. 함께 전진하자! 노래와 깃발이 짓쳐오르는 붉은 신새벽으로!”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하나 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누가 처음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나 광활하고 비참한 중남미 전역에 불리기 시작한 노래가 아바나에서 솟아났다.

그리고 이 사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수도에서는 지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생각보다 우리에게 더 우호적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지금 탈취하지 못하면….”

“아직은 우리에겐 역량이 부족합니다! 혁명 역량을 단숨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무모한 시도입니다!”

수도의 정세, 지하 혁명서클의 역량, 대중이 과격한 무장 투쟁에 호응할지.

갑론을박이 고성이 되고 삿대질이 될 때쯤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이가 가볍게 탁자를 탁탁 두들겼다. 순식간에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는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럼,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입니까?”

“….”

“하지만 동지, 우리가 지금 이 국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혁명 역량을 소진하고 진짜 적기가 다가왔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로드니키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그 적기는 언제입니까? 무엇이 닥쳐야 적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상석에 앉아 있는 청년은 나직한 목소리로도 좌중을 장악했다. 반론을 제기하던 이들도 눈을 반쯤 감고는 음 하는 침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맞습니다. 나로드니키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반동적 노스탤지어에 물들었고, 제대로 된 비전이 없고, 무력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사회의 핵심 모순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전 ‘브 나로드 운동’을 제안하던 소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인민 속으로를 외쳤지만 인민, 러시아의 대부분을 구성하던 농노들이 어떤 이들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뼈저린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너졌다.

그들의 실패 속에서 레닌은 국가의 핵심 모순을 지적하며, 단번에 정권을 장악하고 소련을 건설했다.

상석의 청년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사회의 핵심 모순은 무엇인가!

“러시아 제국은 무력하고 부패한 전제 정권과 외국과의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씌워진 시대의 굴레는 무엇입니까!”

“미국! 제국주의!”

“옳소! 그들에게 죽음을!”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감정에 북받친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은 이제 포악하고 악랄한 손아귀를 다시 한번 들이밀고 있습니다. 가장 둔감한 이들까지도 미국과 제국주의가 어떤 해독을 이 땅에 끼치고 있는지에 눈감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혁명은 이로써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혁명이 가져올 변화를 부정할 수 없을 때!”

꽉 쥔 주먹을 하늘로 쳐든 청년은 이제 벌떡 일어나 좌중에게 열변을 토했다.

“인민 스스로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혁명은 성공합니다. 이 나라의 3할 넘는 이들은 끔찍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국인들, 제국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우리의 해변을 카지노로 만들고, 우리 자매들을 몇 푼 안 되는 화대를 던져주는 창녀로 만들었습니다.”

카리브해의 라스 베가스. 쿠바는 그런 곳이었다. 내륙과 농촌에서는 미국인들을 위한 설탕을 생산하고, 해변의 아름다운 도시들에서는 미국인과 전 세계의 부자들을 위한 환락을 제공했다.

미국인 마피아들과 현지의 갱단들이 결탁해 정직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그 자리에는 사창가와 카지노, 그리고 마약을 재배하는 농장이 들어섰다. 평생을 바쳐 밭을 일구던 이들은 플랜테이션의 노예가 되고, 아들들은 갱단의 총알받이가 되고, 딸들은 창녀가 되었다.

“저들이 우리에게 어떤 더러운 혐의를 씌운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갑시다, 몬카다 병영으로! 역사가 우리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아바나로부터 750km 떨어진 산티아고 데 쿠바의 작은 아지트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그렇게 외쳤다.

정부군의 물자가 대량 비축된 몬카다 병영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바티스타의 쿠데타를 위해 다수 병력이 차출된 상태였기에 더욱 취약한. 못해도 수천 명분의 총기와 탄약이 그곳에 있었다.

“몬카다를 습격한 후에는 마에스트라로 가서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 투쟁을 할 것입니다.”

해발 2천 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마에스트라산맥은 군대가 수색을 하기에 어려운 곳이었다. 일개 중대만큼도 안 되는 한 줌 게릴라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곳에는 인민이 있었다. 압제에 신음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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