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267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들끓었다. 영미의 인도와 중동 침략, 일본과 중국 파시스트 정권의 선제 북침으로 시작된 내전, 아프리카의 혁명 전쟁들까지!
하지만 바다 건너 남미에는 여전히 제국주의가 심어 둔 구체제가 강고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 아마존 속의 깡촌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같았지만.
“하하하! 제기랄, 해도 해도 끝이 없군.”
“와! 네 차례다! 하하하!”
알베르토가 자재를 지고 낑낑거리는 와중에, 에르네스토 게바라, ‘에르노’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병은 피부와 근육에 파고들어 몸을 망가트렸지만, 유달리 생식 기능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보존했다. 하여 강제로 밀려 들어온 이 나환자촌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가족이 생겨났다.
순수한 아이들은 수염과 머리칼이 덥수룩하지만 눈만큼은 명랑히 반짝이는 에르노를 좋아했다. 의대 1학년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왔기 때문에 별달리 의학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며 감탄했다.
물론, 웃고 있다고 그저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종속을 타파해야만 합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걸어 놓은 굴레 때문에….”
“옳소! 옳소!”
아마존 깊이 까마득한 내륙 속, 산 파블로 나환자촌에도 모여든 이들은 적잖이 있었다. 특히, 소련에 유학을 했다가 돌아온 페루 출신의 유학생들은 ‘자기 조국의 가장 어려운 곳’에서 인민을 위해 일하기로 서약한 만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들어갔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몸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자립하여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 나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이렇게 모여들어 생활총화를 하고 나서 어떻게 이 질서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곤 했다.
물론 그 결론은 대부분 미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욕으로 끝났지만.
“저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필수적인 의약품에 대해 이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도주의적 위기입니다!”
“동의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약이 생산되지만 그 약의 대부분은 저 돼지 같은 미국인들의 손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소련은 WHO가 지정한 필수 의약품에 대해 생산 원가와 공급 가능한 물량을 공개했다. 단돈 1달러면 소련이 원가에 공급하는 나균 항생제 세트를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금수조치를 내렸다.
“소련의 이와 같은 행위는 미국 제약업체들의 경쟁력을 심대하게 저해하는 행위이며, 미 국무성은 이를 규탄하는 바입니다. 국가 보조를 받은 제약기업들을 내세워 적정가격 이하에 약품을 공급하여 미국의 제약산업을 말려 죽이려는 것이 아닌지….”
금수조치의 근거는 사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소련의 제약산업은 국가 보조를 받지만, 미국의 제약산업은 그렇지 못하다. 이 둘을 동일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이렇게 불공평한 자유경쟁을 하다가 미국의 제약업체들이 말라 죽으면, 그때에는 소련이 시장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하지 않을지, 무기화하지 않을지 미 국무성은 그것을 걱정했다.
이런 발표에 따라 미국 및 중남미 정부들은 일제히 ‘파렴치한 소련의 시장 독점 시도’를 규탄하고 소련이 싼 가격에 공급하는 약품들에 대한 금수조치를 걸었다.
“약품이 필요하다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하면 됩니다. 지금 싼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나중에 몇 배의 폭리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국무성 대변인은 논란을 그렇게 일축했다.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라!
미국의 제약사들은 연구개발에 든 비용, 향후 새로운 연구개발에 들어갈 비용, 마케팅 등 판촉비, 운송비 등을 모두 ‘정당한 가격 책정’에 이용했다.
“예? 아니, 소련이 공개한 원가는 0.05달러인데 이게 어떻게 한 알에 20달러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소련이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산출한 거짓 원가고, 우리는 이 가격 이하로는 공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회사들도 비슷한 가격을 책정했지요.”
“허허…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는지….”
“하하하하. 차관님, 이 협상이 잘 진행되어야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약회사의 협상 담당자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리는 고위 관료에게 가방 하나를 슥 내밀었다.
“이 가격으로 브라질 내에서의 판매를 인정해 주신다면….”
“크흠… 내 필히 고려하겠습니다.”
협상 담당자는 씨익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쓰이는 돈까지 다 ‘마케팅 판촉비’에 책정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액수의 뇌물로도 만족하는 차관 덕분에 자기 인센티브가 훨씬 높아지게 된 담당자는 싱글벙글하는 표정으로 정부청사를 나섰다.
“대다수의 남미 국가들은 의약품에 대한 수요가 적어 부득이하게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뻔뻔하게도 그들은 의약품의 수요를 이야기했다. 기존 판매량들을 보라! 저 조금을 팔기 위해 우리 직원들이 얼마나 발품을 들이는지.
실상, 돈을 낼 수 있는 ‘수요’와 실제로 사용해야 하는 ‘필요’는 달랐다. 남미인들은 약이 필요했지만, 제약사가 생각하는 수요, 즉 돈을 낼 수 있는 액수는 극히 적었다.
“왜 약이 있어도 치료를 못 한단 말입니까!”
“어허… 거 멋모르는 소리 말고 돈을 가져오시오! 왜 정당한 가격도 내지 않고 이런 행패를 부리쇼?”
“아이고 이 도둑놈들아! 도둑놈의 새끼들아!”
“도둑놈은 날로 먹으려는 당신네들이 도둑이지!”
절규하는 환자들, 엄포를 놓는 제약사, 분노한 대중들을 을러대는 마피아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대중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인민이 필요로 하는 모든 약과 치료가 무상으로 공급되는 소련에 비해 이 나라의 체계는 얼마나 허술한가! 바나나를 생산하는 데만 모든 것이 집중되어 식량도 약도 무엇도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이 비참한 식민지 신세!”
“이것이야말로 종속이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다! 저들의 군대가 아니라 용병, 우리 군대가 민중을 짓밟을 뿐 이것이 식민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제 나라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도 미국 눈치를 보느라 가져오지 못하는 꼭두각시지.”
소련의 모습을 보고 온 젊은이들은 조국의 기막힌 현실에 탄식하고 불만을 토했다. 이대로 항상 살아왔으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던 대중들 역시 줬다 뺏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물론 정부에게는 폭력이 있었다. 공식적 폭력인 군대와 경찰, 비공식적 폭력인 마피아와 사병들, 백색테러단들을 틀어쥐고 마구 휘두르며, 그들은 ‘순진한 국민을 선동하는 불순분자’들을 탄압했다.
“물러가라, 물러가… 으악!”
“이 빨갱이 새끼! 너도 소련의 사주를 받았냐?”
갑자기 벌어진 약품 부족 사태로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물론, 철권의 독재자들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우락부락한 체구에 문신을 한 깡패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경찰은 깡패들이 무엇을 하든 못 본 척, 휘파람을 불며 자기네 할 일을 대신해 주는 이들에게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국민들의 99%는 어차피 개, 돼지들입니다. 위에서 던져주는 것이나 먹으며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데… 웬 빨간 물들이 저렇게 들어서. 쯧, 쯧, 쯧.”
“하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상하 간의 격차가 존재하는 게 합리적인 사회 아닙니까? 그게 없다면 누가 일을 하고, 누가 노력해서 올라가려 하겠습니까!”
경찰서장과 마피아 보스는 창밖의 시위대와 깡패들의 충돌을 보며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자기 지론을 마피아 보스에게 설파한 경찰서장은 아우성치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지 얼굴을 찌푸리고는 커튼을 확 닫아 버렸다.
“어떻게 모두가 평등하겠습니까. 현실을 인정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 *
“이, 이거 놔! 아악!”
“하하… 우리도 너희들한테 손 안 댄다. 이 더러운 문둥이 새끼들아.”
“당신네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별안간 나환자촌 입구에 나타난 우락부락한 깡패들을 보고,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시커먼 방독면을 쓰고 손에는 각자 몽둥이나 망치 등을 쥔 그들은 살벌한 목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 여기 무허가 의약품을 밀수한 놈이 있다는데, 어디 한번 볼까?”
“꺄아아악! 놔 주세요!”
“으윽, 이거 뭐야?!”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환자의 팔뚝을 잡아끌었다가 진물이 묻고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깡패 하나가 거칠게 환자를 밀었다. 항생제가 죽은 조직을 모두 살려 주지는 못했기에 아직도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는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어? 그것 봐라. 저, 저, 이상한 데에서 구해온 약이나 쓰니까 저런 식으로 병신이 되는 거 아니냐?”
팔뚝이 푹 파이고 피가 흐르는 채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환자의 앙상한 다리를, 군홧발이 짓밟았다. 육중한 무게 앞에서 발목이 뭉그러지자 환자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비명을 듣고 후다닥 뛰쳐나온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깡패가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확 머리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르헨티나에서 병원장을 하는 그의 아버지는 여러 유럽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나환자들에게 필요한 약을 보내줄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비싸진 약을 구매해서 환자들을 치료하느니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데, 그걸 귀신같이 알고 깡패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군홧발로 이제 막 지어지는 조립식 집들의 문을 뻥뻥 걷어차며 마을을 뒤졌다.
“어? 이게 막 부서지네? 하하하하! 문둥이들이라서 집도 문둥병에 걸렸나….”
“뭐 이 개새끼들아? 말이라고 하면 그만이냐?”
어제 하루 종일 문짝을 다는 것을 가지고 낑낑대던 알베르토가 벌컥 화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던 샌님이 며칠 집짓기 좀 했다고 깡패들을 업어 메칠 완력이 생기진 않았다.
“으어어억….”
오히려 휙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뿐. 애초에 몸도 성치 못한 나환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깡패들은 잔혹하게 웃으며 코피가 흐르는 알베르토의 얼굴을 툭툭 걷어찼다.
“야, 야, 이 새끼는 문둥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여기 빨갱이들이 도사리고 선동질을 한다더니… 이 새끼가 빨갱인가? 억!”
쓰러진 알베르토를 둘러싸고 두런두런거리던 깡패놈의 뒤통수에 건축용 망치가 작렬했다. 깡패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푹 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싸웁시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을….”
한 놈이 휘두르는 각목을 피하고, 허리춤을 망치로 찍어 버리자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구석구석에서 묵직한 것들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왔다.
“뭐, 뭐야! 뭐 이렇게 많아! 여기 그냥 문둥이들 떼로….”
“으아아아악!”
약자들 하나하나에게는 철저히 강자의 면모만을 보이던 깡패들도 숫자의 폭력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다행히 아무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아 깡패들은 간단히 제압당했다.
“후… 이걸 어쩌나….”
“살… 살려 주십시오!”
흠씬 두들겨 맞은 깡패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터졌다.
꼭지가 돌아 망치로 머리를 갈겨 버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걸 맨몸으로 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자기네 동료가 죽은 걸 본 깡패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지만, 이곳에서 나가기만 하면 싹 안면몰수하고 더 많은 깡패들과 총을 들고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환자들은 살 수 있을까?’
안 그래도 불결하다고 해서 쫓겨나 이곳으로 온 이들이다. 분노한 깡패들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에르노는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페루인이고, 나는 아르헨티나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가족과 친지들이 있겠죠.”
망치를 꽉 잡은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꿇어앉은 깡패들을 향해 휘둘렀다.
“악!”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게도 부모님과 동생들이… 억!”
“다 내가 저지른 일입니다. 내게 덮어씌우십시오. 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에르네스토 게바라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책임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그래서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가만히 앉아서 해방을 기다릴 수는 없다.
“여러분, 이것은 전쟁입니다. 인민과 제국주의 간의 전쟁!”
사람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알베르토였다. 그저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기만 했던 어린 친구는 어느샌가 혁명을 선동하는 전사가 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꿔 놓은 것일까?
“이봐, 에르노. 너….”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날 들어 올리는 깃발은 반동과 열사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제 피를 그곳에 바치겠습니다! 제국주의에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