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265화
“에이이이잇! 왜 저따위 방어선을 뚫지 못한단 말인가!”
‘저따위’ 방어선이라기에, 북일본에 합류한 국제여단 병력들이 구축한 방어선은 너무 단단했다.
북일본의 실질 수도 센다이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쿠시마현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이 지역을 맡은 국제여단 소속 ‘칼 리프크네히트’ 여단과 ‘에른스트 텔만’ 여단은 독소전쟁을 헤쳐 나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남일본의 참모부는 어쩐지 방어선이 안 뚫린다 싶으면서도 조급하게 병력을 돌격시키다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각하! 방어선이 너무 단단합니다. 어떻게든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네놈 눈에는 저 산들이 보이지 않는가? 저기로 가면 진격은 또 어찌하란 말인가!”
씩씩대며 군도를 휘두르는 소장 츠지 마사노부에게 부하 참모 하나가 조심스레 진언했지만 츠지는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또 한 번의 돌격을 명령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후쿠시마 방면을 돌파하지 못하고 우회할 만한 길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양편은 험악한 산악지대. 대군의 보급을 감당할 만한 지세도 아니었거니와 적군에게 요격당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날로 보강되어 가는 방어선은 도저히 뚫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로 보강되기 시작한 토치카 안에서 총구를 내민 소련제 칼라시니코프 중기관총과 둘러쳐진 철조망, 곳곳에 매설된 지뢰들까지!
벌써 거의 1개 사단 수준의 병력이 이 참호선 앞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비릿한 피 냄새와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한참 떨어진 진지까지 풍겨 왔다.
“그렇다면 적의 반격을 저지할 수 있도록 아군도 참호를….”
“진격을 해야지 참호는 무슨 쓸모인가! 썩 꺼져라! 그따위 썩은 정신머리로는 대일본의 군대에 쓸모가 없어!”
“…송구합니다, 각하.”
전통적으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적을 상대할 때는 이쪽 역시 참호를 파야 했다. 전차나 항공기같이 획기적인 수단으로 저쪽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참모본부, 정확히 말하자면 츠지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하루라도 빨리 돌파를 해야지 무슨 참호냐는 그의 반문에, 돌파를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좀 알려 달라 하고 싶었지만 서슬 퍼렇게 군도를 휘두르며 고함치는데 방법은 없었다.
“무다구치 사령관께서는 별말이 없으신가?”
“…아마 내일까지는 없으실 거요.”
짧은 탄식과 함께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벌써부터 일본국군 병사들은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제일이 훈장이요 제이가 여자요 제삼이 기자다~”
“소좌 중좌 대좌는 아가씨하고 소위 중위 대위는 아줌마하고~ 비참하다 내 인생은~”
무다구치 렌야 사령관이 사령관에 취임해서 하는 짓이라고는 별다를 게 없었다. 먼저, 기습작전으로 도쿄를 해방시킨 공을 세웠기에 스스로에게 ‘승리훈장’을 수여했고, 또 각종 기묘한 훈장들을 만들어 저 스스로 타먹었다.
무기를 사기에도 부족한 군 재원을 사령관의 훈장에 딸린 연금으로 지출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재무성 관료가 항의했지만, 비슷하게 훈장을 타먹은 고위 장성들은 다 함께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아예 사령부 안에 기생집을 차려버린 무다구치는 근태를 관리할 사람이 없자 업무시간이고 무엇이고에 상관없이 기생집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군부에서 이따위 짓이 벌어지고 있어도, 대부분의 군 출신 정치가들이 처형당한 상황에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민간인과 문민 정부를 개무시하는 오랜 전통의 일본군에서 군부는 점점 폭주하기 시작했다.
* * *
“경계 중 이상 무! 부상자는… 총원 189명 중 0명! 사상자 없습니다!”
“경상자가 있다고 들었네만, 아닌가?”
“아… 그것이… 탄약상자를 발등에 떨어트렸는데 별 이상 없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네. 혹시나 부상… 이 악화될 경우 후송을 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 지역에서 생기는 부상이란 대개 그런 것이었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토치카에서 총안구로 중기관총만 내놓고 쏴 갈기는 국제여단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시베리아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지! 제기랄, 난 차라리 더운 게 좋아!”
“그러게… 햇빛이 뜨거워도 시베리아의 블리자드를 생각하니 구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더군.”
나치 독일은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자 공산주의자고 사민주의자고 할 거 없이 감옥에서 긁어 전장에 투입했다.
이렇게 끌려갔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이들은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었다. 물론 ‘사상 검증’을 통과해서 곧 풀려났지만.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쳐죽인 공산당의 원수, 사민당원들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국제여단에 참전해서 복무할 경우 5년의 복무로 사면을 해 주겠다. 참여하겠는가? 탈영할 경우 탈영자의 가족들 역시 스파이로 간주하고 시베리아로….’
‘하겠습니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시베리아 20년 형이냐, 전장에서 5년 형이냐. 이 제안을 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애초에 기회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도 않았거니와, 혹한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5년 대 따뜻한 일본에서 20년이라 해도 일본을 골랐을 것이다.
그래서 국제여단 병사들은 행복했다. 아무튼 공산당보다는 파시스트 놈들이 더 빌어먹을 개 잡것들이고, 그놈들을 갈아 버리는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중대장 동지! 간식 보급입니다!”
“오! 하하하하하! 이리 가져오게.”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소련군은 더 이상 미제 허쉬 초콜릿을 보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유럽 국가들에서 만든 초콜릿이 보급되었는데, 그중에는 ‘고향의 맛’, 쇼카콜라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독일 감옥에서의 수형 시절, 전장에 투입된 대전 후반기부터 시베리아 유형을 살 때,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단맛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독일계 병사들은 단 것이라면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엥? 그런데 이건 뭐지?”
“으음… 한국에서 생산된 물건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한 무더기의 쇼카콜라를 행복하게 바라보던 장병들은 새로운 보급품이라고 딸려온 붉은 종이박스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하지만 포장지에는 이상하게 생긴 한국어 알파벳이 쓰여 있었다. 적잖은 보급품들이 바다 건너 한국에서 생산되어 넘어오기에 한국어 알파벳을 병사들은 알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읽지는 못했다.
일본인 보조병 역시 큼지막하게 붙은 ‘사랑(情)’이라는 글자만 알지, 다른 것들은 읽지 못했다.
“열어 볼까….”
종이박스 안에는 갈색의 동글납작한 물체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초콜릿인가?”
“어? 그래? 그럼 한번….”
아무리 먹어도 씁쓰름한 일본 말차에 학을 뗀 병사들은 단 것에 환장해서 몰려들었다. 대략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과자 사이에 달짝지근한 마시멜로가 끼워져 있고, 초콜릿으로 두텁게 코팅이 된 ‘리베(liebe, 독일어로 사랑)’ 과자는 맛있다고 쩝쩝 먹어 대는 병사들 때문에 곧 동이 나 버렸다.
“세상에….”
“아니, 내 거 누가 먹은 거야! 제기랄!”
병사들은 박스 안에 남은 부스러기라도 더 먹으려고 박스를 들고 샅샅이 훑어 내려갔다.
“이게… 사랑인가?”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며, 병사들은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5년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남일본 파시스트들은 구식 아리사카 소총을 들고 무작정 중기관총과 유탄기관총이 거치된 토치카로 달려드니 그냥 갈아 버리면 그만이고. 전차도 전투기도 없으니 이 안에서 탱자탱자 놀고먹다가 소련제 전차들이 도착하면 진격한다!
대전 시절 끔찍한 식량 배급, 형편없는 무기, 손발이 얼어 떨어질 것 같은 날씨와 비교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급보입니다!”
“뭐, 뭔가!”
행복한 간식시간을 즐기던 도중 연락병이 토치카로 들이닥쳤다.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총을 잡았지만,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 주부터 정치집회에 참석하면 일 인당 리베 과자를 두 개씩 지급한다고 합니다!”
“와아아아아!!!”
“스탈린 동지 만세!!!”
한때는 ‘끔찍한 전체주의자’, ‘그루지야의 인간백정’ 스탈린을 저주하던 이들도 이 순간만큼은 스탈린 동지의 은혜를 찬양했다.
“우라! 우라! 우라!”
병사들은 행복했다.
* * *
한때 폐허가 되었던 도쿄 한복판. 여전히 폐허가 가득했지만, 한켠에서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어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아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시여….”
“영원하라! 동방의 해 뜨는 나라여! 만세! 만세!”
“반자이!!!”
북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인민대회관’을 지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남일본의 기습침공에 의해 도쿄 내에서 사실상 축출당한 이후에는 별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 터, 공사장에 남은 잔해를 가지고 남일본은 임시로 신사를 짓고 제관(祭官)과 무녀까지 데려와 ‘호국 영령’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기자들이 펑펑 플래시를 터트리는 가운데 관심을 갈구해 몰려든 사람이 있었다.
“커흠, 본관의 지도하에 황도 도쿄를 해방시키고 역도들을 몰아냈으니 이 어찌 대경사가 아닐 수 있으리오? 하하하하!”
“대단하십니다, 사령관 각하!”
“이쪽을 봐 주십시오! 이쪽을!”
관심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무다구치 렌야는 신사를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잔뜩 거들먹댔다.
군사학상으로야 큰 피해를 감수하며 도쿄의 각지에 숨어든 적병을 일일이 소탕하기보다는 빠르게 진격하는 게 중요했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플래시와 환호를 보니 무다구치는 본인의 선택이 옳았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천장절 전까지 센다이를 점령하고, 단오절 마츠리는 센다이에서 쇠도록 하겠소! 으하하하핫!”
“와아아아! 만세! 만세! 무다구치 만세!”
“덴노 헤이카 반자이!”
여전히 사람들은 핵폭탄에 불타 죽은 전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을 ‘녹색의 날’로 이름만 바꾸어 기념했다. 4월 29일(천장절=녹색의 날)까지 북일본의 수도 센다이를 점령하고, 단오절 5월 5일 축제는 그곳에서 쇠겠다!
이 오만한 말에 사람들은 경악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했다.
“역시… 무다구치 장군은 불세출의 명장입니다.”
그 말에 흡족해진 무다구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환호하고, 기자들은 내일 아침 조보에 싣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진을 찍는 이가 하나 있었다.
‘흐으음….’
신사 안에서 ‘호국 영령’, 실상은 전범들까지 합사된 곳에 참배하는 꼴도 찍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 하나둘 기어 나오는 일본인 고위층들 정도나 사진자료로 남길 수 있었다.
대충 중요한 이들은 다 찍었다 싶은 그는 카메라를 슥 내리고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이 자료들은 이제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 설치된 소련 영사관으로 갈 것이다. 극동의 첩보가 모여드는 곳에서, 이걸 언제 미국 신문에 뿌릴지를 결정하겠지.
저렇게 들뜬 파시스트 놈들을 보니, 엿을 먹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