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264화
“예??? 해외 파병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의향이 있는가?”
니콜라이는 뜬금없이 날아온 말에 당황하여 어물거렸다. 해외 파병이라니?
시베리아의 훈련장에서 몇 날 며칠씩이나 지휘훈련이며 전술토론을 하던 그는 집에 가고 싶었다. 막 모스크바로 돌아온 참에 총참모부의 부름을 받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니콜라이는 입을 쩍 벌렸다.
의향?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솔직히 지금 그가 맡아야 하는 책임이 능력에 비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파병까지 간다면 뭘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사부장, 블라소프 상장은 말을 꺼내 놓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인사파일 중 니콜라이의 것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페트로프 중령. 으음… 병사 출신으로 훈장을 타서 특진. 프룬제 졸업 이후 특진. 대항군 훈련단 지휘평가에서도 수석. 보통 자네같이 특진을 여러 번 한 장교들은 자기 계급에서는 유능했지만 높이 올라가면 금방 무능해지는데, 자네는 아직 그게 안 왔군.”
“…예?”
“음? 자네 맞지 않나? 페트로프 중령?”
“맞, 맞습니다. 그런데… 대항군 훈련단 여단 지휘에서 참패했습니다만,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블라소프 상장은 다시 한번 파일을 보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하는 니콜라이를 다시 보았다.
“…자네 몰랐나? 크흠….”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네. 기밀이라….”
뭐지? 아무튼 블라소프 상장은 다시 한번 이채를 띈 눈으로 니콜라이를 쭉 훑어보았다. 가슴팍의 훈장들에 유달리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것은 군인들의 공통된 특징. 고위 장성들이 보내는 시선을 몇 번이고 받아 본 니콜라이는 그런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절레절레 고개를 내두른 블라소프 상장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걱정하는 것은 알겠네만, 으음… 해외 파병을 가면 이런저런 혜택이 많을 것이네. 파병을 가면 일단 일 계급 특진, 얼마 전 중령을 달았지만 바로 대령 특진을 할 거고….”
세상에, 벌써 대령이라니. 그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이 되었다. 그런데 대령?
물론 지난 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장교들이 죽었고, 그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많은 젊은 장교들이 고속 승진을 했다. 체르냐홉스키 대장이나 주코프 원수 같은 사람들만 해도 아직 40대가 아닌가?
장교들이 대폭 감원되며, 인사 적체가 생겨나 그런 고속승진은 어려워졌지만. 니콜라이는 그렇게 동료들이 떠들던 것을 생각하며 절도 있는 자세로 블라소프 상장의 설명을 들었다.
“다녀오면 곧 참모부에 장군참모로 배치되겠지. 대조국 전쟁 당시의 전장하고는 또 전장이 달라졌으니, 인도 같은 곳에서 고급 지휘관을 해 본 자들은 아마 웬만큼 높이 갈 수는 있을 것이네. 별을 다는 건 말이지…?”
한때 소련 군부의 촉망받는 유망주로 불렸던 그는 어쩐지 회한이 섞인 듯한 얼굴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별을 따고, 하나 더 따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과 정치력의 영역이네마는. 자네는 워낙 출신 성분이 좋지 않나?”
“…감사합니다, 장군 동지.”
대령, 장군. 그 단어들을 입 안에서 니콜라이는 굴려 보았다. 일개 병사이던 그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줄 알았던 것들이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카티아, 어린 스타스, 아직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인도에 가면 1년에 한 번은 만나 볼 수 있을까?
망설이는 그를 보며 블라소프 상장은 낮게 웃었다.
“생각해 보게나. 자네 커리어를 위해서나, 가족들을 위해서나.”
“감사합니다, 장군 동지.”
집무실을 걸어 나오며, 니콜라이는 어쩐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블라소프 상장과의 대화를 곱씹어 보자 예전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뭐, 그런 것은 별 쓰잘데기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민입니다. 우리 소련 인민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인민들. 여러분들은 오직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아, 그랬지.
스탈린 서기장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인민을 위해!
아마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만리타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소련의 젊은이들과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피 흘리는 세계 인민을 위해서 파병을 가라고 했더라면. 아마 니콜라이는 두 눈 딱 감고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장교들은 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살았을까?’
병사들에게 죽음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하던 그들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인민? 소련 국가? 위대한 승리와 훈장? 당원증과 고급 관사?
니콜라이는 알 수 없었다.
* * *
“제기랄… 후퇴하라! 대포는….”
꿀꺽. 인도 혁명군의 장교는 쓰라린 눈빛으로 소련제 76mm 야포를 바라보았다. 부하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삼켰다.
“버려라. 저 놈들이 쓰지 못하도록 안에 폭약과 자갈 같은 것을 넣고 터트려 버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폭파. 그 말을 내뱉기가 장교에게는 그렇게도 어려웠다.
야포는 소중한 전력이었다. 북벵갈 지역에 확보한 병기창에서 소련제 구식 설비들을 가져와 밤낮없이 생산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본격적인 포병은 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야포를 이렇게 잃어버리는 것은… 아마 문책이 따를 것이다. 패배의 책임에다가 병기 상실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아마 강등, 잘못되면… 그러나 저 어린 병사들을 여기에 내버리고 장비만 챙겨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독립을 위해서? 그렇게 씨불이며 죽으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있어도 실상은 장교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이다. 야포를 보존하고 병력을 내버린다면 아마 상부의 문책은 덜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솜털이나 나는 어린 자원병에게, 제대로 문서도 남지 않아 죽어도 무방한 저 자원자들에게 죽으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자 됐나? 터트리고, 후퇴한다!”
“예!!”
몰려오는 영미 연합군에 맞서, 용병들에 맞서. 아마 겁이 났을 것이다. 병사들의 얼굴이 안도로 탁 풀리는 것을 본 그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마 또 싸우게 될 테지만….’
내일 싸우기 위해 오늘을 산다. 어쩐지 자기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은 인도 혁명군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무익하게 죽지 마십시오! 우리의 내일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불가촉천민들의 대변인, 암베드카르 박사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죽음이라는 값싼 해방을 향해 도망치지 말라. 전 인도 인민을 위해, 군인들과 혁명가들은 골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바칠 것을 그는 호소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사망 이후 네루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의 양대 지주로 떠오른 그는 간디와 달리 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저 과격파와 암베드카르의 차이점이겠지만.
“대대장님, 저는 남겠습니다. 이것들을 제때 폭발시키면… 수십 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을 겁니다.”
“안 되네. 내가 말했지 않나? 자살 폭탄테러는 엄금이네. 그냥 포로로 잡힌다면 모를까….”
저놈들은 포로들이라고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지.
미국은 인도 혁명군을 정식 교전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소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혁명군 단원들은 포로로 잡힐 경우 즉결처형당할 수 있었다.
캘커타가 함락된 이후로 벵갈 지역에 대한 영미 연합군의 공세는 거세어져만 갔다. 수많은 동지들이 포로로 잡히고 처형당했다. 몇몇이 고문당해 기밀들을 자백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부모, 형제, 동료를 저들에게 잃은 혁명군 병사들은 점점 더 악에 받쳤다. 지금도 한 중년 병사는 지향성 지뢰를 저들이 접근할 때 기폭시키기 위해 남겠다고 자원을 했다.
“죽지 말게! 절대!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서… 살아남아 저놈들을 죽이게.”
“제가 죽여 봐야 몇 놈이나 죽이겠습니까? 그냥 허가해 주십시오!”
“안 된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미군의 정찰 선견대는 벌써 다가와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후퇴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하나하나 포복으로 도망쳤다.
끝까지 기폭장치를 쥔 병사가 제 고집을 부리자 장교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제발…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젊은 장교는 같은 동네 출신인 그에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빌었다. 하지만 그는 사적으로는 아들처럼 대하던 장교의 말에도 아랑곳않고 수류탄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
“내가 뭐가 남았다고 그러냐. 너도 알지?”
마침 하늘에서는 미군의 전투기가 푸른 하늘에 흰 선을 그으며 날아갔다. 아저씨는 빠득 이를 갈고 핏발 선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빌어먹을 미군 비행기들은 ‘반란군 게릴라’들이 숨어 있으리라 추측되는 마을에 무차별적인 불벼락을 퍼부었다. 민간인의 ‘부수적 피해’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맥아더의 방송을 들으며 수많은 인도인들이 이를 갈았다.
개중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곳들은 불가촉천민 마을들이었다.
암베드카르가 혁명군을 지지하자 수많은 달리트들이 인도 혁명군에 합류했고, 카스트 제도가 없는 새 세상이란 말에 기꺼이 비참한 삶을 바쳤다.
그러나 다른 카스트들은 불가촉천민들의 폭주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적잖은 수의 지배계급들은 불가촉천민 마을이 반군의 아지트인 양 밀고를 했고, 그런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한 미군은 마구 폭격을 갈겨 댔다.
물론 그에 따라 더 많은 불가촉천민들이 인도 혁명군에 합류했고,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반발했지만 파괴행각은 줄을 이었다.
장교가 자랐던 마을 역시 그렇게 불타 없어졌다. 소이탄 세례 속에서 하나도 남지 않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장교는 마을을 떠났기에 몰랐지만, 아저씨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혁명에 합류했다.
“자, 빨리 가거라! 빨리! 내가 이 자리를 지키마.”
“….”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면서도, 장교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선견대가 몰려들 만한 길목에는 크레모아 지뢰들이 몇 개나 매설되어 있었다. 폭발시킬 경우 보병 몇 개 분대 정도는 갈가리 찢어 버릴 만한 분량으로.
그럼에도 수류탄을 챙기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을 뇌리에 새기며 장교는 산길을 헤쳤다.
“개새애애애애끼들!!!”
아저씨는 영어를 잘했다. 영국인들이 지배했던 세상에서는 그러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에게 퍼붓던 욕설들. 처음 영어를 배우는 인도인들은 그 단어들부터 머리에 새기곤 했다.
투타타타 쏘아 대던 기관총의 발사음이 멈추었다. 펑, 펑 터지는 묵직한 지뢰의 폭음이 하나둘씩 들려왔다. 미군의 비명과, 아저씨의 욕설.
“가자, 다음 방어선으로….”
“만세! 만세! 독립 만ㅅ…!”
얼마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숲의 나무들은 소음을 흡수해 아저씨의 목소리는 아스라이 먼 곳에서 오는 것처럼 들렸다. 찢어지는 듯한 함성과 함께, 수류탄 폭음이 터져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