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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63화 (263/300)

# 263

263화

“불어! 개 같은 새끼, 네놈이 버텨 봐야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

남자는 이 짓을 하는 것도 지치는 듯, 후 한숨을 내쉰 후 바닥의 빈 양동이를 뻥 걷어찼다.

“물 떠와라!”

‘이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들은 독하기로는 참….’

벽에 반쯤 매달린 청년은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서도 청년은 끝까지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정보를 불지 않았다.

그동안 ‘기술자’들이 주로 예뻐해 주었던 대학생 서클들은 이 정도의 결의를 보이지 못했다. 손톱 정도만 몇 개 빼 주어도 울며불며 모든 것을 털어놓던 놈들이 대부분. 남자와 같은 ‘기술자’들이 동원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신념의 힘 때문인지, 좌파 조직들은 훨씬 더 독했다. 끝까지 접선책이나 암구어를 불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히 대형 건수가 뒤에 있다. 남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캐내는 게 어려울수록, 캐낼 때의 보람도 커지는 법이지. 으흐흐흐흐….”

땅속에 묻힌 광맥이 금광일 거라 확신하는 광부의 표정을 지으며, ‘기술자’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

이렇게 정신을 잃으면 시원하게 물 한 바가지 정도는 끼얹어 주어야 했다. 그것 때문에 물을 떠오라고 시킨 것인데, 아무도 달려오는 사람이 없었다.

몇 명 정도는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생각해 보니 고문당하던 청년이 내는 끄으응거리는 낮은 신음을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절그렁. 손에 들고 있던 쇠막대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고요해진 고문실 안에 금속성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고문실의 문이 천천히 끼이익거리며 열렸다.

“뭐, 뭐ㅇ….”

“손 들어, 이 개새끼야.”

일단의 무장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기술자 남자는 어, 어 하는 당황한 소리만 내며 뒷걸음질쳤다.

그는 비밀요원이기는 했으나 외근직들처럼 밖에 나가서 빵빵 총을 쏘고 다 쓸어 버리는 그런 비밀요원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런 사람들이 거둔 ‘수확물’을 처리하는 역할을 할 뿐.

진입한 대오의 선두에 선 이는 벽에 매달린 청년을 보고 탄식했다.

“후안… 제기랄! 개만도 못한 새끼들!”

기술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좆됐다….’

* * *

남자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그는 익숙한 천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는….”

“하, 하.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는 숙련된 고문기술자로서 지부로 끌려 들어오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반체제 지하서클 멤버들이나 노동조합 리더, 농장 내 봉기 주도자, 혹은 OSS에 반항적인 갱단 조직원들을 고문하곤 했다.

이곳은 그가 애용하던 고문실 중 하나였다. 다만, 이제 그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

기묘한 억양의 영어를 사용하는 대머리 덩치는 흥겨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석석 무언가를 갈았다. 남자는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대머리가 그와 동류라는 것을. 그러나 누가…?

“내, 내게 뭘 하려는 거요! 나는 미합중국 시민이오! 제기랄! 이거 푸시오!”

“그건 잘 알고 있소. 몇 가지 ‘강화된 심문 요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을 가지고 잠시만 심문을 할 테니, 양해해 주기를 바라오.”

아차 하는 심정으로 남자는 입을 딱 벌렸다. 하기사, 여기까지 들어와서 지부를 털어 재낀 놈들이면 그가 OSS의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강화된 심문 요법’은 미 정보기관 내에서 쓰이는 은어였다. 저놈들이 단순히 중남미 동네 노동조합이나 반체제 서클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정보기관 놈들이라는 반증이었다.

대머리는 돌아서더니 씨익, 체구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그 광경을 보고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의 동종업계 종사자들 중, 저런 자들이 꽤 있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무엇이 심각하게 결여된 자들. 차라리 그 자신처럼 가학적인 성향 때문에, 혹은 위에서 시켜서 하는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 우리의 작은 공간에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소이다.”

“흐으윽!”

그의 양손에는 시커먼 무언가가 덕지덕지 묻은 펜치와 벌겋게 달아오른 쇠꼬챙이가 들려 있었다. 흉악한 물건을 손에 쥐고서도, 대머리는 여전히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질문하고, 당신은 답합니다. 참 쉽죠?”

“으아아아악!”

“이런, 그건 내가 원하던 답변이 아니었는데.”

심문실 안에서 두런두런 말하는 목소리와,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반응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은 킬킬 웃거나, 몇 분 안에 저 새끼가 제 마누라 팬티 색깔부터 자기가 무슨 소리로 울며 엄마 뱃속에서 기어 나왔는가 실토할지 내기를 걸었다.

아까 가장 먼저 심문실에 진입한 젊은 히스패닉 청년 같은 이들은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개중 단 한 명. 사실상 이 무리의 대장 노릇을 했고, 심문실 안의 아군 고문기술자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미 출신이 아닌 한 사람만은 심문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아랑곳 않고 두꺼운 쿠바산 시가를 뻐끔뻐끔 피웠다.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흉터와 거대한 체구 때문에 다른 이들은 감히 그의 끽연을 함부로 방해할수 없었다.

“다음은 어디지?”

대뜸 묻는 그의 질문에, 온갖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베테랑들은 입을 싹 다물고 공손하게 바뀌었다.

“…리마로 가기 위해서는 28번 도로를 타야 합니다.”

“그래? 그럼 저 친구의 심문이 끝나는 대로 슬슬 가 보도록 하지. 이번엔 죽이는 임무인가? 조지는 임무인가?”

“예! 전자입니다!”

“그거 잘 됐군. 힘 조절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서 말이야.”

베테랑들은 음산하게 낄낄 웃었다. 마침 심문실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휘유, 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흉터의 사나이, 오토 슈코르체니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봐! 나 정도가 아니면 정말 어려운 일이라니까!”

* * *

미국은 중남미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훈타(Junta)’라고 불리는 군부 정권이었다. 직역하면 ‘위원회’, 군부 인사들이 돌아가며 해 먹는 폭압적 과두정체라고 해야 할까?

주로 쿠데타를 통해 취약한 민주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이들은 말만 잘 들으면 자기네들 자리를 보장해 줄 용의가 있는 미국의 충견이 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중남미의 반미세력을 때려잡는 마름 노릇을 맡은 이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각종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국가의 공식적인 무력인 군부대와 경찰을 투입해 반정부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하고, 시위 참여자들을 고문하고 재판 없이 처형하기도 했다. ‘죽음의 부대(Death squad)’로 지칭되는 불법적 무력 역시 이들의 수단 중 하나였다.

“흐음… 우리 처형부대가 제법 잘 하는군.”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납치, 암살, 테러, 고문 등을 자행하는 정부권력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합법적이라면 더더욱.

밤중에 총을 들고 쳐들어와서 끌고 간 후, 드럼통 안에 처넣고 콘크리트를 발라 바다에 던지는데 삼권분립이니 민주주의니 백날 외쳐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것은 실제로 남미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던 일이었다.

CIA의 지원을 받은 비합법적 좌파 탄압에 대해 중남미의 운동가들은 각종 수단을 통해 항거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라틴아메리카 부채위기 등으로 촉발된 광범위한 시민운동이 독재정권을 무너트리기 전까지는.

그래서 우리는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반체제들이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소련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제707특임대의 성적이 압도적이야. 듣고 있나?”

“예, 크흠….”

총 다섯 개의 ‘처형부대’, 즉 특수임무부대가 남미에 침투했다. 인도를 제외하면 두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인도인 저항운동에 각종 선진 군사기술을 전수하는 게 목표였던 인도행 특수부대들에 비해, 남미로 간 자들은 현지 저항운동의 도움을 받아 요인 암살, 파괴공작, 첩보전을 수행했다.

특히, 미 제국주의가 남미로 뻗친 말단인 OSS 현지 지부들이 그 대상이었다. 군부정권의 독재자들은 OSS의 기술을 전수받아 반대파들을 고문하고 백색테러를 저질렀다.

“맥아더 놈이 취임한 이후로 제국주의자들이 더 심하게 발작하고 있네. 자네들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투쟁을 어떻게 더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예! 서기장 동지!”

흐음. 707특수임무부대는 참여한 여러 작전들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교육훈련에서 낮은 평가를 받아서 그렇지, 암살이나 납치작전에서는 다른 처형부대들에 비해 압도적인 성공률을 보여 주고 있었다.

707특수임무부대장, 오토 슈코르체니는 역시 명불허전이라 할 만했다.

“암살, 암살, 납치, 폭파… 이걸 다 성공시켰단 말인가? 하하하하하!”

크루글로프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숙청당한 전임자가 떠오르는지 살짝 떨었다. 하지만 옛날 일은 옛날 일.

명령에 충성하고 스릴을 찾았을 뿐인 슈코르체니는 티토 사살작전에 실패하고 소련에 끌려왔다. 그 이후, 회유를 받아 소련 특수부대 훈련교관으로 일하다 특수임무에 투입시켜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련에 투신했다.

‘저는 뭐, 충성심이나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주는 스릴이라는 것에,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인간이었다. 고국이 사라지고 군대조차 해체당해 더 이상 짜릿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무어라 생각했을까?

‘기회만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렇게 충성을 맹세하는 슈코르체니의 눈은 광기에 가까운 무엇으로 빛났다나?

그는 자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옛 부하들과 남미로 도망친 나치 잔당들, 그리고 남미의 여러 또라이들을 모아 ‘슈코르체니 특임대’를 창설했다. 부여된 부대번호는 707.

인도에서는 라이미 놈들이 너무 싱겁다, 죽일 놈이 별로 없다고 징징대며 더 큰 쾌락을 찾아 헤매던 그는 남미로 가기를 자청했다. 군부정권에 의한 폭압적이고 살벌한 독재가 만연한 남미가 더 짜릿할 거라나?

그렇게 파견된 남미에서 슈코르체니와 처형부대는 압도적인 전공을 세웠다. 어떤 곳에서는 그들을 ‘의적’으로 칭송할 지경이라는 첩보까지 들어올 지경이었다!

부패한 군부 인사들을 암살하고, 그들의 손발인 마피아들을 척살하고, 썩어빠진 경찰들이 우글우글거리는 경찰서와 피를 빠는 인간 흡혈귀들이 가득한 다국적 기업 지사들을 폭파하고!

그 와중에, 내 명령에 따라 방첩대 출신의 ‘평범한’ 미국인 대학생 하나를 미국 본토에서 납치하기까지 했다. 독일을 탈출한 유태인 출신이라 하니 골수 나치 부대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나?

“아주 좋아….”

미국은 점점 진창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셜은 야인이 된 이후로 몰로토프에게 그렇게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출구 전략’도 이제는 핵심 인물이 빠진 이상 공회전을 반복할 것이다. 납치한 대학생의 신상명세를 보니 어쩐지 흡족한 미소가 나왔다.

“헨리 A.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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