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260화
[스탈린 할아버지는 평화를 원한다고 했어요. 이 세상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서요.]
마리는 TV에 나와 그렇게 말했지만, 맥아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쟁이 몰아 닥쳐오는 불길한 어두움만 세상에 드리울 뿐이었다.
물론 나 역시 말처럼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이 스스로 곤경에 빠져 들어가며 소련의 세계적 영향력을 확대해 준다면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해 안타까울지는 몰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어쨌든 아니었다.
“한국에서 그런 정보가 들어왔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남일본 내부의 우리 요원들 역시 비슷한 내용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 자본이 투자되어 만들어진 군수공장들이 요새 밤낮없이 가동 중이라는 첩보를 전해왔다.
사실 우리가 한국을 동북아의 중립국으로 만든 이유 자체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미국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유고를 통해 공산권의 정보가 흘러나왔던 것처럼.
미국은 안보상의 이유로, 또 운송의 편의를 기하기 위해 중립국인 한국에 공장을 지었겠지만 한국은 거기서 얻어낸 정보를 상당수 소련을 위해 빼돌려 주었다.
하여 우리는 남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는 무기의 양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일본 내 스파이들 역시 군부가 북일본 침공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북일본에게 무장을 명령하지 않았다.
“전쟁은 근시일 내에 시작되겠군. 국경지대에서 국제여단을 후퇴시키고, 일본인 병력들을 전진 배치시키게.”
“예? 그렇다면… 저들은 대부분이 군 경력자들입니다. 일본인 병력은 아직 몇 개월 훈련받지 못한….”
“그래. 그걸 노리는 것일세.”
“….”
초반에 북일본이 참패하고, 피해를 입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였다.
“구 일본군 경력자들이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자네들도 알지 않나?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우리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하지.”
“하지만 말 그대로, 병력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놈들은 제대로 된 장비들이 아직 없잖나. 실제로 바르바로사 작전 때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을 걸세.”
끄응,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장군들이 그 당시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신음을 토했다. 아니, 어차피 그렇게 안 될 거라니까?
맥아더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고 해도 일본에 벌써부터 다시 전차나 야포 같은 본격적인 전쟁장비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상대인 북일본은 ‘원칙적으로’ 비무장이기도 했고.
한반도에 설치된 미국의 군수공장은 기관총, 바주카 같은 분대지원화기 정도나 생산해서 일본에 공급하고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처럼 ‘전격전’을 하며 북일본의 실질적 수도인 센다이를 함락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끽해야 보병, 그것도 국공내전 당시의 홍군 정예부대들처럼 도보만으로 막강한 기동성을 발휘하는 것도 아닌 3류 보병부대를 가지고 피해를 입히면 얼마나 입히겠나?
충분한 ‘기삿거리’를 만든 후에는 실질적 주력이 될 수 있는 국제여단을 투입하면 된다. 애초에 국경선에 배치할 부대들에서는 정예부대들을 제외하고.
“생각해보게. ‘악랄한 일본제국군의 살인마들로부터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가는 무장경찰!’ 이 정도면 충분한 프로파간다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 그렇습니다만….”
실제 전투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찰, 민병대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시간을 버는 동시에 세계적 여론 플레이를 한다.
어차피 보병의 진격속도는 그렇게 빠를 수 없고, 후방에 중장비를 동원해 건축한 벙커와 참호들을 쭉 깔아 놓으면 미군이 일본군에게 야포와 전차를 허용하기 전까지는 돌파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그렇게 일본군을 재무장시키는 것이 어떤 논란을 불러올까?
미국이 그렇게 수렁에 빠지기를 자처한 이후에 국제여단과 일본인 포로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들을 투입한다. 그것이 우리의 기본 계획이었다.
본격적으로 국제여단을 전차와 항공기 등으로 무장시키려면 최소한 남일본이 어느 정도 선을 넘어주는 게 필요했다. 아니면 소련이 먼저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니.
“그나저나 남일본군 총사령관이 누군가?”
“예! 서기장 동지. 남일본군의 주요 지휘관들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사령관은….”
보고서를 펼치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눈이 그분의 모습을 영접하자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이자는….”
“예. 무다구치 렌야라고, 구 일본군의 고위 장성단 중 처벌받거나 자살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별다른 전공은 없지만 계급상 최선임이고 미군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워 총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뭐?”
아,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는 임팔 작전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애초에 영국이 너무 일찍 전열에서 탈락해 버렸다.
그 덕에 무다구치 렌야는 수많은 명언을 남길 기회조차 없이 그저 그런 평범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장군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것 같다.
어쩐지 ‘패퇴한다’는 계획에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해 보였다.
과연 우리가 패퇴할 수 있을까?
* * *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
병력을 무장시킬 무기의 부족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부하들에게, 일본국 육군 총사령관 무다구치 렌야는 당당하게 선포했다.
부하들은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총사령관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럼 작전 계획을 잘 세워 보도록 하게. 난… 오늘은 이만.”
그러고 무다구치는 푸짐한 몸매를 끌고 뒤뚱거리면서 회의실을 나갔다. 충격을 받은 부하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말입니까? 제 귀가 지금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일본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미 전략사무국 OSS 소속으로 파견된 요원 역시 통역을 듣고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무다구치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이 당신네 나라 총사령관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부에서는 남일본군에게 미국 물자를 팔아 꼴 보기 싫은 소련의 동북아 전진기지를 쓸어 내버릴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 사령관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사실 OSS라고 그렇게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싼 단가에 넘겨야 하나….’
일본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이 자기 지지도에 해가 될 것이라는 정도는 맥아더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구 적성국 일본에게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정권은 OSS를 동원했다.
개요는 간단했다. OSS는 육해군이나 주방위군 등에서 흘러나온 중고나 재고품들을 감가상각까지 계산한 원가로 인수한 이후, 일본에 대략 신품의 두세 배 정도 가격을 받으며 팔아치웠다.
한국 병기창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사실 눈속임이었고, 그것들은 다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 빠져나간 재고의 빈자리를 채웠다. 사실 일본군이 받아먹는 물건들은 자기네들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대부분 미군이 쓰던 고물들.
하지만 저 사령관이라는 자는 무기가 비싸기 때문에 ‘보급은 적에게서 취하라’고 하고 있었다. 요원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여기다 충분히 팔아먹지 못하면 그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가 적어질 것은 분명했다. OSS의 상층부에서는 남미와 동남아에서 공작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일본지부 같은 곳을 쥐어짰다.
“자, 그러지 마시고… 저희가 어떻게든 더 ‘우방국’ 일본에게 더 싸게 무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혹시 일본이 저희 OSS에 제공할 수 있는 현물이 뭐가 없겠습니까?”
“으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무엇이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들은 사령관만큼은 아니지만 다 무능하기 짝이 없다. 방법이 없으면 방법을 만들어야 할 게 아닌가?
그나마 펑펑 돈을 써대는 미군이 일본에 주둔해 있을 때는 미군기지에 국가가 관리하는 공창을 설치해서 번 달러로 대금을 지불했는데 지금은 미군도 빠졌고 하니 뭔가 줄 게 없었다.
일본의 산업력을 독일처럼 해체해서 농업국가로 만들자는 합의는 여전히 유효했다. 대도시가 대부분 파괴되기도 했거니와, 그 합의를 역행하고 일본을 재산업화시키는 것은 큰 파장을 불러올 게 뻔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것이든….”
“그것이 불법적이어도 괜찮습니까?”
OSS 요원의 눈이 빛났다. 애초에 이 짓거리 자체가 의회의 인가를 받지 않은 불법이었는데 무엇을 더 말할까?
요원의 그런 반응을 본 참모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아니, 뭐… 고사까지는 아니지만 옛날 있던 일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그… 있잖습니까?”
“그만 뜸 들이고 빨리 말이나 해 보시지요.”
“예! 예! 그, 지나와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이 지나에 아편을 팔았지 않습니까? 그때의 상황과 지금이 얼핏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미국에 아편을 수출하겠다는 말이오?”
다른 참모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요원은 흥미가 생긴 듯 표정을 바꾸었다.
“계속 이야기해 보시겠습니까?”
“예? 아… 음, 시골에서는 여전히 양귀비를 관상용이든 약용이든 키우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양귀비를 아편으로….”
사람들은 다들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정보국이라는 작자들이 아편을 제 나라로 밀수한다고? 그런 눈빛을 받은 요원은 얼굴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꼭 미국에만 우리 선이 닿은 줄 아십니까?”
그는 중남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OSS 지부들은 중남미에도 현지 정권 및 군부와 결탁해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일본에서 재배한 아편, 그리고 그것을 정제한 헤로인을 남미에 내다 팔고, 그 대금을 OSS가 챙긴다.
이 정도면 멍청한 일본놈들이 만든 계획치고는 썩 괜찮았다. 일본의 공업능력은 거세당했다 한들 지식인들까지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헤로인 정제도 하자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좋습니다. 군에서 양귀비를 재배할 부지를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화공 정제시설도….”
“가, 가능할 겁니다! 이게 가능하면 무기를 더 판매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요원은 애써 혐오감을 감추어야 했다. 같은 나라 국민이던 자들을 서로 죽여 대기 위해서 한때 적국이던 미국에게 매달려 무기를 구걸하는 꼴이란.
그 자신이 하는 행동은 철저히 미국과 미국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요원은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