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259화
“환영합니다! 마리 윌리암스 양!”
“소련에 어서 오세요!”
당돌한 아홉 살 미국 소녀 마리 윌리암스 양의 편지는 소련 신문에도 실렸다. 영역판 프라우다는 소련판을 정확히 번역한 것인 만큼 소련인들도 똑같은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맹랑하게도 서기장에게 왜 미국을 정복하고 싶으냐 물은 소녀의 소련 방문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몇몇은 행사에 동원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저 깜찍한 소녀가 뭐라 말하나 궁금해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의 적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마리 윌리암스와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부모님의 품에 안긴 어린 동생이 비행기에서 걸어 내려왔다.
“소련을 방문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프라우다의 기자 한 사람이 그녀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막대한 환영인파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천진무구한 웃음을 짓고 고개를 깜빡 숙여 보였다.
“스파씨보(спасибо, 감사합니다).”
* * *
“이 친구가 콤소몰 위원장이라고? 으음….”
“그, 그렇습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흐음… 콤소몰… 자네 몇 살인가?”
“열아홉 살입니다 서기장 동지!!!”
…할 말이 없었다. 열아홉 살이 대체 어째서 이렇게 두발이 부족한가? 이래서야 청소년 동맹이 아니라 노안 동맹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마리 윌리암스를 위한 환영 행사에는 수많은 소련의 유력인사들이 모여들었다. 피오녜르 소년단을 비롯한 문화행사들을 총책임진 즈다노프라던가, ‘꼬마 대사’를 접견하기 위해 온 외무장관 몰로토프라던가, 편지를 주고받은 서기장, 나까지!
그런 중요한 행사에 콤소몰 위원장이 ‘중대한 결함’이 있다니. 당장 총책임자가 숙청당하고 삼대가 문책당해도 모자란… 정도로 소련이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다.
어쩌다 청년들마저 이런 꼴이 되었느냐고 혀를 쯧쯧 찰 뿐. 아무튼 마리는 소련 방문을 그럭저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일단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위주로 그녀 곁에 배치했다. ‘국제 청소년 행사’ 답게 소련의 사회주의 형제국들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로 모여들었다.
그네들 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고, 또 나이대가 비슷한지, 우리에게 호감을 품게 할 수 있는지를 골라내 결국 같은 기숙사에 배치할 아홉 명을 뽑았다.
단순히 몇 주간의 청소년 캠프 동안 배치될 친구를 뽑는 데만도 이 정도니, 다른 면에서는 오죽할까?
“우리 소련의 가장 좋은 모습, 가장 멋진 모습, 가장 뛰어난 모습만 보여 주어야 해!”
“알, 알겠습니다!”
머리털이 좀 많이 없다고 까인 콤소몰 위원장에게는 미안하지만. 크흐흠….
얄타의 캠프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여러 일정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몰렌스크의 대조국전쟁 기념비 견학, 서기장이 직접 안내해 주는 모스크바 크렘린 투어, 꼬마 대사래도 ‘대사님’이시니 외무장관과의 회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체제경쟁의 장이었다. 과연 맥아더는 소련 출신의 소녀가 전쟁을 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면 뭐라고 할까? 들여다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리지 않을까? 아니면 파이프 담뱃불로 태워 버리려나?
전시에는 고 처칠의 불한당패 같은 리더십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에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 전쟁 이후 바로 축출된 것만 봐도 그랬다.
마찬가지로 맥아더의 강력하고 독단적인 정책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전쟁에 시달렸던 미국인들에게 좋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대국간의) 평화가 도래하고 전쟁이 회전, 야전에서 비정규전, 외교전으로 돌변하자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튼, 오늘은 마리 윌리암스의 부모를 만날 시간이었다.
“반갑습니다! 소련에 온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얀냐세여!”
내가 방에 들어오는 부모 둘, 아니, 동생까지 셋을 환영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며 일어나자 마리의 동생인 꼬마가 혀짧은 목소리로 나를 반겨 주었다.
“하하하하하, 귀엽군요.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생각보다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는 내게 부모는 놀란 듯했지만, 꼬마 아기는 생긋 웃으며 내 콧수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데이지랍니다! 어머, 데이지. 그러면 안 돼! 아직 두 살이라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디, 만져 볼래?”
“헤헿, 헤헤헿.”
부모 쪽을 보자 서기장의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노는 자기 아이의 대담함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마 우리 애들은 왜 이렇게 간덩이를 배 밖으로 내놓고 사는지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난 솔직히 애들이 좋았다. ‘내’ 손자 손녀들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날 거의 찾지 않았다. 며느리들에게 진지하게 재혼을 권한 이후로는 더더욱.
“아이쿠! 아이쿠! 아프다!”
“재송함니다….”
“아니다. 괜찮단다. 이제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하하하, 다음에 또 하려무나.”
문득 부됸늬가 그리워졌다. 이 애한테 데려다주면 정말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많이 당황한 것 같은 윌리암스 부모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짓자 더욱 당황한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기장님….”
“아니오, 아이들은 얼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지요. 그것보다도, 우리 소련에 방문해 주기를 선택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 이런 기회를 주신 점, 저희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른들의 환담을 나누는 사이 꼬마 소녀 데이지는 탁자 위에 꽃병에서 꽃 한 송이를 뽑아 꽃잎을 뜯고 있었다. 어지간히 뭘 뜯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내 콧수염보단 저걸 뜯는 게 낫겠지.
“하나, 둘, 셋… 다섯, 다섯, 넷….”
“크흠….”
“하하하하, 저만할 때는 다 그렇지요. 저희 어머니께서 그러시길 저도 어린 시절에는 하나 둘 셋조차 제대로 못 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 그러셨습니까? 하하하하….”
아니, 사실 안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낫겠지. 입만 열면 거짓을 쏟아 내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빨갱이 두목 같겠지만.
그런데 꼬마 데이지가 꽃잎을 뜯는 모습을 보자, 뭔가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혹시 TV 광고를 찍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예에?”
* * *
“네! 정말 즐거웠습니다!”
편지로만 보면 대단히 당돌했는데, 마리는 생각보다 착하고 예의 바른 소녀였다. 배치해두었던 콤소몰이나 피오녜르 소년단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다.
몰로토프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마치고 내가 직접 크렘린과 모스크바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면서 캠프는 즐거웠느냐고 묻자, 마리는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잘 됐구나. 그리고… 우리 소련의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단다.”
“음… 제가 본 사람들은 다 그랬던 것 같아요. 피오녜르 친구들도, 그, 바체슬라프 아저씨도 그랬어요. 스탈린 할… 아니, 서기장님도 그러신가요?”
“물론이지! 여기 주코프 장군을 보려무나.”
내 뒤에 있던 사람 중에 주코프를 잡아끌자, 주코프는 대단히 당황하면서도 얼떨결에 끌려 나왔다.
“크흠, 서기장 동지. 왜 그러십니까….”
“이 친구는 주코프라고, 아주 높은 장군인데… 아 해 보게. 아.”
“아니, 저… 그….”
생판 모르는 외국인 꼬마 여자애 앞에서 망신당하는 게 어지간히 쪽팔렸는지 주코프는 사소한 반항을 했지만, 감히 서기장에게 오래 그럴 수는 없었다.
“자 봐라. 여기 금으로 때운 이빨들이 보이니? 이 아저씨는 말이지? 미제 코카콜라에 맛을 들여서 이가 다 이렇게 썩었단다. 너희 초등학교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지?”
“네! 저희 반의 지미도 초콜릿을 먹고 이빨을 닦지 않아서 이가 다 썩었어요.”
“주코프 장군도 그렇단다. 어지간히 콜라를 좋아해서… 아마 미국과 전쟁을 해서 콜라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면 나를 몰아내고 미국과 평화를 맺을 테니 걱정 말거라.”
“아니, 서기장 동지. 무슨 말씀을….”
농담이라도 두려웠는지 주코프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내가 찌릿 노려보자 흡 하고 입을 닫았다. 꼬우면 쿠데타 하든가? 아니면 이빨 좀 닦지 그랬나?
농담처럼 말했지만 주코프 같은 사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아주 중요한 가교였다. 미제 물건을 사용하면서 미국에 호감을 품은 수많은 소련인들은 미국과의 화평, 그리고 수입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에 수많은 물건들을 팔고, 그 물건들을 생산하는 사업가들과 노동자들 역시 소련이 중요한 파트너였다.
마리는 재미있다는 듯 주코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그동안 연습한 가장 괜찮아 보이는 미소를 힘껏 지었다.
“자, 그럼 계속 구경을 해 보자꾸나.”
“네! 감사합니다 서기장님!”
여기서는 서기장 ‘동지’가 아니라 서기장님(Mr. General Secretary)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런 평범한 호칭이 그리워질 정도로 내가 소련에 오래 있었던 건가?
마리는 곧 재잘재잘 캠프에서 있었던 일이나, 미국에서 겪은 일들, 소련에 와서 느낀 점들을 고 나이대 어린아이들 같은 느낌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캠프에서는 수영을 했고, 낚시를 해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결국 놓아 주었다. 미국에서는 어른들이 꽤 자주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소련과 미국이 다른 게 뭔지 모르겠다 같은.
그리고 한 가지, 그녀가 지나가는 것처럼 툭 던진 말이 있었다.
“소련은 미국하고 다르게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것 같아요.”
“그렇니? 왜 그렇게 생각했니?”
“캠프에도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어요. 알제리에서 온 친구도 있었고, 한국에서 온 친구도 있었고….”
마리가 만났던 나라 사람들을 꼽는 동안 나는 속으로 조용한 쾌재를 불렀다.
실제로도 소련은 동시대 미국에 비하면 인종차별은 적다고 할 수 있었다. 마리가 고국에 돌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맬컴 스틸의 연설에 이어 우리가 미국에 날리는 두 번째 일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런 사람들이 무섭지 않았니?”
내가 짐짓 그렇게 묻자, 마리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은 모든 사람들이 피부색에 관계없이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모두 같은 하나님의 자식이래요. 서기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슬프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지만.”
“으음… 그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구경을 시켜 주던 중 내 비서관이 도착했다.
“서기장 동지, 이제….”
“음, 알겠네. 마리? 이제 우리는… 각자의 일정을 향해 가야겠구나.”
그녀는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지만, 어린아이다운 싱그러운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혹시… 소련에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니?”
“음… 저는 미국이 좋아요.”
잠시 생각하다 그렇게 답하는 소녀에게, 나는 투박하고 주름진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리의 희고 작은 손이 내 손에 쏙 들어왔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단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우리는 오직 평화만을 원한다는 것을 전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