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258화 (258/300)

# 258

258화

[…자유여! 평화여! 평등이여!]

맬컴 엑스, 아니, 이 세계에서는 ‘맬컴 스틸’. 스탈린을 존경하기에 그렇게 개명했다던가? 미래의 혁명가, 맬컴 엑스가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또 이 세상에서는 미소우호의 상징으로 그가 나 대신 노벨상 수상소감을 대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예상외의 효과를 거둔 것 같았다.

젊은 맬컴 스틸은 노벨 평화상 수상식장에서 자유, 평화, 평등을 찾으며 포효했다고 한다. 우리 소련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일갈은 세계인들의 가슴에 틀어박힌 것 같았다.

자유를 외치던 미국은 맥아더의 취임 이후 수많은 사건에 시달리며 급격하게 흑화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구 전범국들과 손을 잡고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자국민들이나 남미의 사실상 식민지 국가들 상대로는 생체실험을 한다니!

그러나 소련만큼은 끝까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와 연대하며 세상을 위한 수많은 선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노벨 평화상 자체가 그런 일들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자유여, 평화여, 평등이여….”

내게는 어쩐지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외치면서, 속으론,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높여 자유여, 평화여, 평등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안치환 곡으로 유명한 <자유>. 맬컴 스틸의 사자후 끝부분에서 어쩐지 그 노래가 연상이 되었다.

우리 소련이야말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 평화 평등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그 와중에도 제 잇속을 차리는.

사실 제3세계 국가들을 후원하는 것도 미국이라는 경쟁자를 거꾸러트리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물론 그 미국이라고 선한 국가는 아니요, 소련보다 조금 더 악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나저나… 그 연설 몇 마디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을 적잖이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다… 내 앞으로 온 편지라고?”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무슨 팬레터도 아니고. 어제 12시간 동안 도착한 편지가 벌써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세계 각국의 우표가 붙어 있는 이 편지들에서 우표만 떼서 모으더라도 떼돈을 벌 것 같은 수준인데….

“NKVD에서는 일일이 철저한 안전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를 암살하기 위한 수작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 잘하고 있군.”

편지봉투는 대부분 뜯어져 있었다. 균이나 독 같은 걸 묻혀서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는 했다.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순수한 경의를 담아 보낸 것 같은 편지들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 조금은 살벌해 보였지만. 크루글로프는 묵직한 보고서 뭉치를 들고 와 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 보고서들이… 바로 편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들입니다.”

“그, 그렇게나 많나?”

“예. 지금도 계속 모스크바 우편집중국으로 우편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

할 말이 없었다. 이 시대는 이런 시대이긴 했다. 21세기처럼 무슨 ‘크렘린 청원 게시판’이나 서기장에게 보낼 수 있는 이메일 서비스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편지를 보내는 수밖에 없다.

어쩐지 예전에 현지 시찰을 나갔을 때 내게 암소를 주려 한 할머니가 기억났다.

수없이 많이 쌓인 편지 중 하나를 집어 꺼내 보았다. 노트에서 찢은 것 같은 우툴두툴한 옆면에 어설픈 글씨로 쓰여 있었다. 소리 내어 읽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크흠, 친애하는 서기장 할아버지님. 푸훗… 크루글로프, 내가 그렇게 늙었나?”

“아, 아닙니다!”

“자네가 아직 매운맛을 덜 봤군. 실제로 손자도 있는데 왜 할아버지가 아닌가?”

시정하겠다며 고개를 숙이는 크루글로프를 뒤로하고 쭉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서기장 할아버지(사실 이 위에는 수정을 의미하는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님. 저는 네바다주에 사는 마리 윌리엄스이고 아홉 살입니다. 노벨상을 타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미국과 소린이(여기도 USR이라고 쓰여 있었다) 전쟁을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서기장님은 노벨 ‘평화’상을 타셨는데 진짜 전쟁을 하실 건가요?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은 스탈린 서기장님이 그럴 거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은 나쁜 것입니다. 저희 삼촌은 저를 많이 귀여워해 주셨는데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서기장님이 왜 세계와 미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시는지도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리 윌리암스

―P.S. 부디 답장을 해 주세요.]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이 물씬 묻어났다. 왜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하려 하는가에 대한 순수한 의문. 세계는 이토록 넓고, 우리 모두가 쓰기에도 충분히 땅과 물자는 남아도는데 왜 두 나라는 으르렁대는가?

편지를 보며 어쩐지 나쁜 어른다운 나쁜 생각이 들었다. 입으로는 자유 평화 평등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제 잇속을 차리려는 나쁜 어른.

하지만… 그렇게 진짜 전쟁을 예방하고, 미국의 반전여론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었다.

“크루글로프, 비서관들을 데려오게. 답장을 보내도록 하지.”

“예, 서기장 동… 예??”

“뭐 하나? 들었으면 얼른 가서 데려오게!”

“예!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 * *

“마리? 마리 윌리암스?”

“네, 스미스 선생님?”

“잠… 잠깐 교장실로 따라오겠니? 중요한 일이 있단다.”

미국의 어느 작은 초등학교.

황망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온 교감이 급히 한 학생을 찾자, 담임선생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로 급해 보이는 교감의 얼굴 때문에 학생을 보내 주어야만 했다.

마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종종거리며 앞서가는 교감을 따라갔다. 한 번도 와 볼 일이 없던 교장실에는 마리의 부모님과 교장, 장학사와 사회 선생이 모여 있었다.

교장은 마리 본인이 도착하자 매우 당황했지만, 애써 근엄한 척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 마리 윌리엄스 양? 혹시… 요 근래에 어딘가 보내서는 안 될 곳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까?”

“예? 저는 보내서는 안 될 곳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어요.”

“크흠…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선생. 할 말 있소이까?”

초롱초롱한 얼굴로 그렇게 답하는 마리를 보며 사회 선생은 말을 더듬었다.

“물, 물론… 크렘린은 편지를 보내면 안 될 곳이 아닙니다만… 실제로 편지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습니까?”

“후… 마리, 음… 이를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엄마 아빠도 안절부절못하며 마리를 쳐다보았다. 별생각 없이, 아이가 사회 시간에 쓴 편지를 가지고 보내 보자고 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네가 스탈린 씨에게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서… 답장이 왔단다.”

“네에?”

“여기, 한번 보려무나.”

[친애하는 마리 윌리암스 양에게.

최근에 저에게는 윌리암스 양이 보낸 것과 비슷한 많은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마리 양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제가 전쟁을 원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교장은 심지어 영역판 프라우다(Pravda, 소련 공산당 기관지)에 실린 마리의 편지와 스탈린의 친필 답장을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해 솔직하고 정직하게 답하자면 ‘절대 아니오’ 입니다. 모든 소련 인민들은, 규모에 상관없이 세상에서 어떤 전쟁도 다시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리 양과 비슷한 슬픔이 있습니다. 제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고, 저는 저와 같은 수많은 소련의 부모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비롯하여 모두, 저와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도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 소련은 절대 미국을, 혹은 세계를 정복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의 끔찍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소련과 미국은 친구로서 전쟁을 이겨 냈습니다.

우리는 미국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합니다. 우리 소련에 있는 그 누구도, 노동자도, 농민도, 기술자도, 정부 관료들도 미국 정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련은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는 총을 잡고 서로 겨누는 삶이 아니라 평화로이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며 살아가는 삶을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마리 양이 좋다면 소련으로 마리 양과 부모님, 혹시 형제가 있다면 형제까지 가족 모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소련에 와서 소련의 어린이들과 만나고, 얄타에서 국제 청소년 캠프에 참가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련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지, 미국 및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우정을 중시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 양의 젊은 날에 최선만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이오시프 V. 스탈린.]

“세상에….”

마리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자 마리의 어머니는 이미 한 번 본 내용이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교장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빨갱이 비슷한 단어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던 그는 낭독이 끝나자 잽싸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니? 역시 안 가는 게 좋겠지?”

“네? 저는 꼭 가 보고 싶어요!”

“그… 공산주의자들은 마리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널 이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저들의….”

“그래도 가 볼래요!”

아이의 순진무구한 웃음 앞에 어른의 정치 논리는 먹히지 않았다.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장학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은 결국 마리의 소련 방문을 인정해야만 했다.

학교 앞에는 벌써 적잖은 수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윌리암스 양? 윌리암스 양! 이쪽을 봐 주세요! 그래서 소련을 방문하는 것입니까?”

“평소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을 가졌습니까? 주변에 그런 어른이 있었습니까?”

“스탈린의 학살 전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소련의 프로파간다에 협력한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기자들은 각종 적의 섞인 질문을 했다. 매카시는 터스키기 매독 사건 이후 한번 큰코다쳤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면서 미국을 좀먹고 있다고 주장했다.

적잖은 미국인들은 아직도 그에게 동조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이번에 노벨상을 탄 것부터가 그들의 공작이며, 미국 공산당이나 흑인 빨갱이들의 스탈린의 수하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런 방문은 소련의 프로파간다로 쓰이기 딱 좋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그런 악의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그저 천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마리 윌리암스의 소련 방문은 순식간에 전미의 화제가 되었다.

소련과의 관계가 이토록 험악하게 불타오르는 상태에서, 어린 소녀 하나가 소련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 경색국면을 해결할 수 있다면! 소련으로의 수출판로가 막혀 고민하던 수많은 농민들이나 공장주들, 사업가들이 환호했다.

‘꼬마 대사’의 소련 방문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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