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56화
“공산주의자들이 미 정부에 대한 악성 루머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일파만파 퍼져 나간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투입된 매카시 부통령의 첫마디는 바로 ‘공산주의자’였다.
어떤 코미디언에 의하면 매카시가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를 말한 횟수를 세어 봤더니 웬만한 연설 몇 개를 만들 만큼 많았다는 유머가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로 포문을 열었다.
“저들이 제시한 모든 증거는 위조입니다. 흑인 사회 내에 만연한 불… 건전한 문화로 인하여 매독 보유율이 높은 것을 두고 미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공산주의자의 수작에 시민 여러분들은 속지 말아 주십시오.”
“부통령 각하! 해당 사건의 피해자 중 군 복무를 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군대에서 매독 치료를 막았다는 것은….”
“군에서 복귀한 이후 다시 성병에 감염되거나, 감염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기에 자세한 사실은 추후 조사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미합중국 군대는 결코 군인들을 기만하지 않습니다.”
기자가 묻자 이번에는 근엄하게 앉아 있던 군인 하나가 이야기했다. 맥아더의 바탄 갱 심복으로 알려진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고속 승진을 해서 이 자리에 군을 대표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공중보건국 국장, 육군 인사국장과 의무사령관, 또 제기된 과테말라 의혹에 대해서는 국무부 장관까지.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위대한 미국은 절대 그런 비윤리적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그들의 단호한 부정에 모여든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도 끄덕였다. 생체실험? 그런 것은 잔혹한 잽스들이나 하는 짓이었지. 731 부대의 생체실험 관련자들을 군사법정에서 단죄해 처형하고 수십 년씩 감옥에 처박은 미국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물론 결과만을 아는 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국 측 검사는 주저했지만 소련 검사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731 생체실험을 감독한 이들을 처형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잽스에 대한 미국의 단죄라고 생각했다.
“과테말라? 거긴 어디 붙어 있는 건데?”
“우리 군대가 과테말라에서 생체실험을 했다고? 너 혹시 공산주의자니?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 뉴스에서 이야기했는데?”
FBI는 악성 루머를 유포한 앨라배마 공산당의 서기장 존 레닌과 공산당 일당들을 ‘반국가―이적죄’ 혐의로 체포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 * *
“난 너희 같은 빨갱이들이 싫어.”
“….”
“하물며 검둥이 놈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다니! 하느님 맙소사….”
존 레닌은 뚱한 표정으로 그렇게 설쳐 대는 중년의 백인을 올려다보았다. 요원들이 굽실대는 것을 보면 제법 높은 사람들 같았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와서 떠들다니. 어지간히 별일 없는 놈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끌고 와 놓고 별 심문도 안 하고 이렇게 심문실에서 떠들기나 하다니. FBI가 왜 이러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기야, 마피아들을 상대로도 대충대충 일하며 사실상 방치에 가까운 짓을 하면서 흑인이나 공산주의자, 여성주의자 박해에나 앞장서던 것들이니 무엇이든 제대로 할까?
그들의 무능한 폭력을 많이 겪어 본 레닌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저들은 흑인이 말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주제 모르고 짖는 짐승이라고 생각했지.
한참을 그렇게 떠들던 남자는 마치 그리스 비극의 배우처럼 탄식하더니 탁자를 쾅 내리쳤다.
“아무튼 네놈은 석방이다. 제기랄… 신이시여!”
“뭐요?”
“석방이라고! 내 눈앞에서 꺼져!”
이럴 거면 왜 잡아 왔지? 남자는 뭔가 압력이 있었던 것처럼 탄식하면서도 레닌의 손목에 채여 있던 수갑을 풀어주었다.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양 레닌의 검은 피부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면서 수갑을 푼 그는 구둣발로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꺼지라고!”
“하, 하, 당신네들 연극이라도 하는 건가?”
처음에는 허위 사실로 미 정부를 모함하는 이적단체랍시고 잡아 오더니 이번에는 심문도 없이 석방? 오락가락하는 FBI의 태도에 레닌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알겠소.”
걸어 나오자 험악하게 생긴 웬 요원이 그를 불렀다.
“이봐! 누가 나가라고 했나?”
“날 심문… 한답시고 들어온 남자가 나가라고 했소. 이번엔 또 오라가라요?”
“뭐? 그럴 리가? 국장님이…? 크흠, 못 들은 걸로 하게.”
“국장…?”
FBI에 국장이라고 하면 한 명밖에 없었다. 총책임자인 존 에드거 후버.
예전에 그의 얼굴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레닌은 자신을 ‘심문’하던 게 그 유명한 후버 국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NAACP나 공산당 내에서 FBI가, 특히 국장이 완고한 반공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에 치를 떨어 봤으니.
그런데 이렇게 풀어준다니? 로비에는 함께 끌려 왔던 동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오! 서기장님!”
“자네들도 풀려났나?”
“이제 썩 꺼져! 검둥이들아!”
요원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기왕에 부를 거라면 빨갱이라고 하지. 백인 당원 하나가 투덜거렸지만 사람들은 껄껄 웃었다.
“그래 씨발것들아! 우린 간다!”
쌔끈한 소련제 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은 잘 끝났다.
살아 있는 증인이 되기를 자처한 몇몇 자원자들을 빼고는 흑인들은 대부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인 의사와 약을 믿을 수 없어서 소련제 벤질페니실린을 공수해 온 공산당은 메이컨 카운티, 터스키기 근처의 흑인들을 모두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밴을 타고 가면서 레닌은 욕설을 씹어 뱉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나긴 투쟁이었다.
저 개자식들은 거짓으로 진실을 틀어막지만… 진실은 승리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서들은 그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바뀌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충격: 전직 군의관 양심선언]
[외교부 직원의 양심고백 ‘과테말라 스캔들은 사실’]
[공중보건국 연구자 28인 성명 발표!]
‘긴 투쟁’ 까지 필요 없었다. 황색언론들은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 내부 관계자들의 고발을 실으며 몇 번이고 특종을 터트렸다.
[군의관으로서 저는 징병 대상자들이 군에 입대하기에 신체적으로 적절한지를 검사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몇몇 사람들을 ‘정상’ 처리하라는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검사상 매독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온 것을 보고, 저는 명령서를 보존….]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래 가지고 있던 증거물들이 터져 나왔다.
군대로 공중보건국이 보낸 공문들은 개중에서도 빼도 박도 못할 강력한 증거물이었다. ‘터스키기 출신 흑인들은 매독 판정 검사를 음성으로 처리하라!’ 같은 문장은 최소한 국방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였다.
공중보건국 연구자들 역시 몇 가지 증거물들을 들고 나왔다.
“애초에 그 연구 자체가 기밀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연구 설계는 6개월을 기한으로 했고, 기감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윤리적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증거로, 출판된 연구물이 여기 있습니다!”
공중보건국이 출판한 연구간행물 역시 증거가 되었다. 이 시대에 생명윤리란 것은 그다지 명확하게 정립된 것이 아니었기에 1932년의 최초 연구가 비난받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연구가 1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진행되면서, 치료약제의 개발 이후까지 ‘인류의 지식 증진’이라는 명목으로 지속되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인류의 지식 증진이라니! 그 말은 일본인들이 생체실험을 했을 때도 써먹은 말이 아닙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 미국 정부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조사 중이며….”
“외국 영토에서 저지른 죄수에 대한 실험에 대해서 미국 국무성의 공식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부 과격분자에 의한 개인적 일탈로….”
여론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파간다를 위해,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악랄함을 강조했다.
‘보라! 생체실험을 자행하는 이 악랄한 전체주의자들을!’
나치독일의 유태인, 집시 등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이나 일본인들이 외국군 포로, 중국인, 한국인 등을 대상으로 저지른 731부대를 비롯한 실험들은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결국 그런 말을 듣고는 입을 닫았다. 어찌 되었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신체마저 저 전체주의자들이 유린했으니.
그러나 미국이 똑같은 짓을, 어쩌면 더 악랄한 짓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신문의 풍자란이 가장 먼저 불타기 시작했다. 얼치기 만화가들까지 미국 정부의 이중성을 비난하는 풍자화를 그려 투고했다. 흉악하게 손톱이 돋은 손이 사람들을 쥐어짜고, 히틀러와 도조는 하늘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화룡점정은 바로 타임지였다.
<올해의 인물: 터스키기 매독 피해자 & 내부 고발자(Tuskegee syphilis victims & The Whistleblowers>
휘슬블로어, 즉 이 사건을 고발한 수많은 내부고발자들과 수백 명의 희생자들이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장개석―송미령 부부를 제외하면 한 번도 단체가 수상해본 적 없던 올해의 인물이 된 것 하나만으로도 장안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우기는 것은 얼굴에 철판 깐 매카시 정도밖에 없었다.
* * *
“내가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어? 대머리! 몰로토프! 크루글로프!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 봐!”
흐루쇼프는 내 질책에 고개를 푹 숙이고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몰로토프 역시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었고, 그나마 터스키기 매독 고발을 총괄해서 미국에 치명타를 입힌 크루글로프가 입을 열었다.
“서기장 동지… 저희들이 한 짓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지금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건가?”
소련의 첩보망은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다. FBI의 후버 역시 우리에게 약점을 잡혀 조종당해 체포한 미국 공산당원들을 풀어주었을 정도이니.
그리고 타임지에 공작을 펼쳐 터스키기 매독 피해자들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게 한 것도 우리였다.
물론 내부고발자들이 다 우리가 밀어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용기야말로 미국이 선진국일 수 있는 원동력이라 정치국에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차라리 그들에게 준다면 모를까…
“그럼 내가 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지 변명이나 좀 해 보게. 이… 이 무능한 놈들!”
1949 노벨 평화상 수상자, 이오시프 V. 스탈린.
씨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