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화
이 시대 국제여단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인도였다.
하지만 가장 뜨겁게 전쟁이 몰아치고 있는 곳은 바로 이집트였다. 영미 연합군은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수에즈를 감히 국유화한 이집트 정부를 단죄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 군대는 성공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군을 격퇴했습니다! 이집트 만세! 군대 만세!]
나세르, 사다트를 비롯한 혁명정부는 향후 더 나쁜 사태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희망적인 소식만을 들려주었다.
승리의 희망도, 필승의 자신감도 없는 약소국은 이기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최소한 소련의 지원을 받고, 국제여단의 베테랑이 몰려오자 실제로 약간이나마 희망이 보이기는 했다.
거기에 천군만마와 같은 동맹군들이 전장에 합류했다.
가장 신속하게 달려온 이들은 바로 옆의 ‘팔레스타인 공화국군’이었다.
“우리는 이집트가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이집트군은 선두에 있었는데… 이렇게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군요!”
“반갑습니다! 형제여!”
팔레스타인 공화국은 건국에 이집트가 준 도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태 민병대들과 싸우면서 단련된 지하드 전사 수백 명이 대오에 합류했다.
그 당시 부대를 이끌고 최선봉에서 성전을 탈환했던 젊은 장교가 이제는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을 보고, 팔레스타인군 사령관은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서방의 저 가증스러운 불신자들이 이렇게 시커먼 손을 뻗쳐 온다면 형제들이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랍 세계는 이런 인식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이집트 역시 ‘불신자’보다 더한 무신론자인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서방에 대한 아랍 세계의 승리를 상징하는 팔레스타인이 이집트 편에 붙었다는 것은 막대한 정통성을 이집트 측에 가져다주었다.
“형제들이여! 우리 알제리에서도 의용군을 보내겠소!”
“비록 우리 땅은 영국 놈들이 강제로 점령한 상태지만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함께 싸웁시다!”
알제리, 시리아, 레바논 등 친소 국가들부터 영미 연합군 측으로 참전한 사우디나 요르단 출신들까지 ‘지하드’를 위해 이집트 땅으로 달려왔다.
프랑스 출신의 국제여단원들은 알제리나 시리아, 레바논 같은 구 프랑스 식민지 출신의 지하디스트들과 제법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프랑스 공산당 정권은 식민지를 독립시키며 정중한 사과와 거대한 규모의 원조까지 퍼부어 주었다.
이렇게 그들이 저자세로 나오는데 한 푼이 아쉬운 아랍 국가들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또, 국제여단 베테랑들은 식민지를 점유했었던 비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이들이라는 것이 주효했다.
“불신자들과 싸운다면 우리와도 싸우는 것입니까? 하하하하하하!”
“하, 하, 하. 그대들은… 좋은 불신자라고 하지.”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PT체조 8번 준비!”
“이… 악랄한 불신자들 같으니라고….”
소련군 교관들에게 철저하게 단련되었던 프랑스군 출신자들이나 국제여단 베테랑들은 껄껄 웃으며 아랍인 의용병들을 군인으로 바꾸어 나갔다.
* * *
‘스탈린식 전쟁’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지난번처럼만 하지. 지난번처럼.”
“예?”
“대조국전쟁 말일세! 그때처럼만 하면 우리가 이기네.”
사람들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집트와 영미의 전쟁이 어떻게 대조국전쟁처럼 흘러간단 말인가?
이집트는 소련만큼 인구가 많지도 않았고, 전장의 종심이 깊지도 않았다. 동원할 수 있는 물량을 비교하면? 영미가 차라리 소련에 가까웠다.
“하나하나씩… 저들의 동맹국을 쳐내고, 우리 측으로 끌어들이거나, 전쟁에서 빼 버리는 것일세.”
하지만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런 물량전이 아니었다. 이제 이 시대의 전쟁은 2차대전 같은 대규모 병력의 회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빨간 버튼’이 심각하게 마려워질 테니.
그것보다는 대조국전쟁 당시 소련이 취한 외교―군사적 전략이 예시가 될 만했다.
소련은 루마니아, 핀란드 같은 독일의 동맹국들을 하나하나 쳐내면서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현지에서 영미 연합군의 호화로운 보급을 도와주어야 할 거점들이 하나하나 무너진다면 그들이라고 별수가 있겠는가?
“일단 수에즈는 막혔지.”
이것이 중요했다. 동지중해는 모두 친소 성향 국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부터 해서 그리스, 터키,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수에즈가 막힌 이상 함대를 끌고 와서 강제로 뚫어 버려야 했다.
“그나마 패튼, 미친 카우보이의 기갑부대는 인도로 가던 것을 되돌려 데리고 올 수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서 추가적인 육군 증원을 하려면 아프리카를 돌아서 보급을 해야 하네.”
“아…!”
지중해가 영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천연의 장벽을 저들은 가로질러야 했다. 미국의 능력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2만 킬로미터, 희망봉을 돌아 이집트와 이란과 인도까지 모두 보급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련이 남하하면 할수록 미국이 견뎌야 하는 보급난은 가중되었다.
처음에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던 전쟁은 점점 이상하게 말려 가며 동맹국들은 하나씩 이탈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이게 바로 우리 식의 전쟁이지.”
물론 맥아더라는 미친놈이 전 세계에 핵폭격을 뿌려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한 출구전략도 우리 손안에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겠답시고 방사성 코발트를 한반도에 들이붓자던 미친놈이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에게 제동을 걸어야 할 사람들은 대부분 진절머리를 내고 때려치웠던가, 아니면 매카시 같은 더한 미친놈이었지.
일단 이번에는 어느 정도 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몰로토프? 크루글로프?”
“예! 서기장 동지!”
“이라크 혁명을 허가하게. 단! 하심 왕가만은 절대 죽이지 말고 곱게 추방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는 수많은 아랍인들을 전율시켰다. 그들이 거둔 승리는 수많은 아랍인들의 입에 회자되며 서구에 대항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 ‘불온 사상’은 왕정국가들, 특히 영국에게 이권을 넘겨주며 자기 입지를 보장받기 바쁜 이라크―요르단의 하심 왕가를 뒤흔들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라크는 추축국으로 참전했다가 가장 먼저 패배하고 전열에서 이탈한 바 있었다.
터키가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감히 이라크 왕국이 추축국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내부의 불안요소는 살아 있었다. 이라크 군부 내에도 이집트를 모방한 ‘자유장교단 운동’이 점점 번져 나가며 쿠데타의 가능성을 비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심 왕가는 반드시 살려야 하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어야 요르단의 증오가 우리쪽이 아니라… 사우디로 쏠릴 수 있겠지.”
아랍천지 복잡기괴. 딱 이런 단어가 어울렸다.
국내적으로도 씨족간, 종파간 복잡하게 얽힌 알력관계들이 있는 것처럼 외교적으로도 이들 국가들은 하나가 되기 어려웠다.
지금 영미 연합군을 지원하는 요르단과 사우디만 해도 성지를 빼앗기고 빼앗은 원수 사이였다. 그나마 영미가 끼어들어 조율한 것을, 우리는 갈라놓을 속셈이었다.
이란도, 터키도 다 소련 편으로 돌아섰다면 서아시아 지역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사우디였다.
온건파에 국내 팔레스타인인들 때문에 아랍 민족주의와 떨어지기 어려운 친영파 요르단 대 미쳐 날뛰는 이슬람 극단주의 와하비스트 친미파 사우디가 메카―메디나라는 두 성지를 놓고 벌이는 단두대 매치! 이 얼마나 소련의 이익에 도움이 되겠는가!
겸사겸사 미국의 얼굴에다가도 ‘극단주의 광신자를 비호’하는 것으로 똥칠을 해 줄 수 있으니 이 어찌 아니 좋을 수가 있을까.
* * *
“뭐?! 이라크 쿠데타?”
“…그렇습니다, 각하.”
요르단에 사령부를 둔 연합군은 전해진 급보에 충격을 받고 얼어붙었다. 요르단과 이라크군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기겁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파이살 국왕께서는….”
“국왕 폐하 일가족께서는 다행히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후… 감사합니다, 알라시여….”
영국군도 당황하다가 국왕 일가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듣고 약간은 안도했다. 패튼의 전차군단이 패퇴하고 해군마저 퇴각한 상황에서 남은 가장 강력한 전력은 바로 요르단의 아랍군단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왕가 일족인 이라크를 구원하겠답시고 가면 연합군은 무엇이 되겠는가?
아주 강력한 전력은 아니지만 이라크 국왕 근위대 역시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근위대장을 보며 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근위대장이 제일 충성파인가 본데…. 그런 자를 해외로 보내 놓고 믿지 못할 군인들을 주변에 두다니.’
고전적인 반란이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해서 지금 미칠 영향이 가볍지는 않았다.
“이집트에 대한 공세는….”
“공세라니요! 지금 미군도 패배했는데 우리 전력만으로 공세를 취한단 말입니까?”
영국군 사령관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요르단 측은 벌컥 화를 내며 받았다. 아랍군단 사령관 글럽 파샤는 말리려 했지만, 그조차도 지금 전력으로 날마다 지하디스트들과 국제여단까지 몰려드는 이집트를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추가적인 증원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사기도 낮을뿐더러….”
“수에즈가 막혀서 보급이 안 되는 문제 때문에 온 것인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보급만 더 필요하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그럼 그 미친 카우보이를 내보내서 된통 깨지고 오게 하지를 말던가 그러셨습니까?”
“그분… 그자가 우리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인간인 줄 아셨습니까?”
대등한 수뇌부들이 다섯, 이라크를 빼더라도 넷이나 모인 자리는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패튼의 막말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아랍 측은 미국의 독단을 물고 늘어졌다. 사령관이면서 정양을 한답시고 회의 석상에 나오지도 않은 패튼 대신 나온 참모장은 패튼 생각만 하면 열이 받는지 상관을 ‘그자’라고 부르며 열변을 토했다.
사우디는 잠재적 적국인 요르단―이라크가 엿을 먹은 게 고소한지 계속 틱틱대면서 딴죽을 걸었고, 요르단군 사령관은 사우디 측에 삿대질을 시작했다.
그나마 서구 출신에 아랍 문화와도 가까운 영국인 출신 요르단 장군, 글럽 파샤가 싸움을 말리려 해 보았으나 자존심 싸움까지 섞인 말싸움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연합군이 싸움 두 번에 붕괴하다니….’
미국의 전력은 막강했다. 계속 증강되는 전력은 비교하자면 일본 제국을 두들겨 팰 때보다도 강력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투사할 수 있는 세력은 그 반의반이나 될까? 보스포러스와 다르다넬스를 무사통과한 소련군 잠수함들이 동지중해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이집트군의 대함미사일 때문에라도 함대를 끌고 와서 박살 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육군을 증원하자니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거리를 건너 아프리카를 우회해야 했다.
당연히 영원히 서방세력의 것일 거라 의심해 마지않은 수에즈가 떨어지자, 미국의 세계전략은 수립되자마자 붕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