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253화
“군수지원에는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그토록 용기 있고 강인한 이들이 무익하게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네. 알겠나?”
“예! 서기장 동지!”
국제여단이라기보다 국제군단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모여든 전 세계의 자원자들이 제국주의와의 전장으로 향했다.
소련은 직접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병력이었던 이들을 훈련교관, 기술자, 정비부대 등으로 파병했다. 수천 명의 군인들이 전역명령을 받고 계급장을 뗀 채 국제여단으로 향했다.
각국의 공산당들이 당 자금을 융통해 국제여단의 군비를 충당했다. 사실 대부분은 우리가 이런저런 명목으로 보내 준 원조자금 내지는 수입물품 대금이었지만.
의욕만 높았지 무장 수준이 빈약해 모로코 출신 정규군 부대들에게 패배한 스페인 내전 당시의 교훈을 사서 최대한 보급만큼은 충실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보급품을 다뤄야 할 장교진 역시 긴급 파견된 프룬제 출신의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독소전쟁을 겪으며 천문학적인 물량을 다뤄 본 소련 군수참모들은 더 넓어진 전장에 처음엔 당황한 듯했지만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솔직히 좀 못 미덥군. 우리 군대에 비하면….”
“서기장 동지, 크흠… 저희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소련군은 강군입니다. 이제 막 몇 개월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과 비교하시면….”
“맞습니다. 대부분 형제국들의 군 간부 출신들이기는 하나 그들의 훈련수준은 우리 군대에 크게 미달합니다. 다만 첩보에 따르면 영국군 식민지부대들의 훈련도도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합니다.”
천만에 이르던 소련군은 현역 기준 그 사분지 일 규모까지 감축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대대적인 인원 감축으로 자격 미달인 이들은 거의 전부 쳐낼 수 있었고, 가장 유능한 자들만 남겼다. 물론 대부분의 군 경험자들은 예비군에 편성되었지만.
한스 폰 젝트가 바이마르 공화국군을 훈련시켰던 것처럼, 모든 장교 및 부사관은 최소한 한 단계 이상 높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수많은 군무 유관자가 각종 혐의로 소련에 끌려온 이상 구 독일군을 가장 잘 모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소련이었다. 독소전에서 살아남은 대위~소령 계급의 초급 장교들 중 유능한 이들은 프룬제로 가서 개편된 군사교육체계를 거쳤다.
이제 대전 후 1기생들은 막 졸업해 시베리아의 너른 평원에서 ‘과학화 훈련단’을 상대로 수많은 실전 연습을 치르며 교육의 결과물을 시험받고 있었다.
“흠, 그런가? 하기야, 구 독일군 장교들을 상대로 그 정도 승률이라면….”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결과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장교들은 이제 예전 독일 국방군 출신의 엘리트 장교들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수준입니다.”
소련군의 전투, 지휘 매뉴얼은 훈련단 소속의 전문 대항군들과 모의전투를 통해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었다.
전문 대항군은 어떨 때는 소련군 교리에 따라, 어떨 때는 구 독일군 교리에 따라, 또 가끔은 우리가 첩보망을 통해 구한 미군 교범에 따라 훈련부대들을 상대했다. 철저한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아군 장교들의 승률은 점점 향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여단 병력들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인가? 장교들이 잘났다 하더라도….”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서기장 동지. 교도사단들의 정예 교관 출신들을 병사들을 위한 훈련교관으로 대거 파견했습니다.”
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했다. 국제여단이 항상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울 수는 없었다. 못 미더운 동맹군, 민병대 병력을 데리고 싸워야 할 수도 있다. 훨씬 적은 병력으로 거대한 적군과 맞서야 할 수도 있다.
이 정도로 주코프가 호언장담을 한다면 믿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 나온 김에 과학화훈련단 관련 보고서를 뒤적거려 보았다.
“쯧쯧, 여전히 이… 여기는 이기지를 못하는군.”
“예? 아… 크흠….”
장군들은 순식간에 억울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프룬제를 졸업한 1기생들 중 두 번째로 잘난 그룹은 참모장교로, 지휘관으로 국제여단에 파견되었다. 교도사단 출신의 훈련관들과 함께.
두 번째로 잘난 그룹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잘난 이들은 남아서 교리를 개발해야 했으니. 여전히 우리 장교들은… 최악의 난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억울합니다 서기장 동지!”
“억울한가? 억울하면 이겨 보시든가.”
소련에서 가장 잘났다는 명장들도, 프룬제의 혹독한 교육을 통과한 엘리트 장교들도 아직까지 N―1 대항군 여단을 꺾지 못했다.
N―1 대항군 여단장의 사진을 보며, 주코프는 이를 빠득 악물었다. 소련군 제일을 자임하는 그 역시도 몇 번이고 패배를 당했으니.
N(Nemetskiy, 러시아어로 독일)―1 여단장 발터 모델 명예대령은 아직까지도 소련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적을 자랑했다.
* * *
“휴… 또 졌습니다.”
“이 정도면… 상, 상당히 발전했네. 크흠… 이름이 페트로프인가?”
과학화 훈련단에 배치된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페트로프 중령(진)은 결과보고를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여단급은 아직 그에게는 벅찬 규모였다. 하지만 어설픈 러시아어로 더듬더듬 말하는 훈련단 측 여단장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독일인인가?’
니콜라이는 그의 어색한 러시아어를 보며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대전 이후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인가 본데, 솔직히 어이가 없는 실력이었다. 독일 장교들이 다 이 정도였다면 아마 대전에서 패배하는 것은 소련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교전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척하며 기갑부대를 뒤로 후퇴시킨 대항군 여단장은 어느 순간에 커다란 포위망을 만들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온 니콜라이의 부대를 격파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니콜라이 부대는 대항군의 기갑예비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대항군 여단장이며, 모의훈련 판정관이며 다들 그를 칭찬했다.
“정말 잘 했네! 잘 했어!”
“어… 감사합니다. 대령 동지. 교관 동지.”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대항군 여단장은 그의 명찰이며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니콜라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이? 연세? 가… 몇 살인가? 그 훈장들은 다 뭔가?”
“예? 아, 그…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됩니다. 훈장들은 운이 좋아서 땄습니다.”
러시아어가 어려운지 니콜라이가 하는 말을 곰곰히 듣던 여단장은 허허 웃으며 니콜라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운이 좋은 장교가 제일 좋은 장교야.”
그러고서 여단장은 휘적휘적 교관과 함께 멀어져 갔다. 니콜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그의 감각은 여단장이 대령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고위 장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 니콜라이는 그들의 습관이며 행동거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계급장을 바꿔 단 장군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다가도 니콜라이는 결국 이번 패배를 다시 곱씹었다.
순식간에 쾅쾅 떨어진 포병사격은 니콜라이가 지휘한 여단의 선봉 전투단을 박살 내버렸다. 상대 여단장은 대체 어떻게 포병을 운용한 걸까?
박살 냈다고 생각한 상대 기갑부대들이 포병사격에 의해 무너진 전열로 밀고 들어올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병사들에게 무전기 사용 교육을 시켜야겠군….’
하필 무전병이 전사판정을 받는 바람에 상대의 포격 좌표정보 등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장교들만 상위 제대 지휘능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말단 병사들까지도 다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이번 훈련을 겪고 난 소감이었다.
보고서에 쓸 내용을 생각하며,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에 설치된 장교관사에 들어서자 당번병이 경례를 붙였다.
“중령님, 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 그런가? 고맙네.”
사랑하는 카티아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카티아 페트로바’라고 쓰여 있는 봉투만 보아도 니콜라이는 기분이 좋았다.
소련군이 강력해지는 것은 뭐… 좋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시베리아로 오는 것은 별로 좋지 못했지만.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니콜라이는 편지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첫 문장에 그는 충격을 받아 버렸다.
[니콜라이, 나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
[그는 항상 내 옆에 있어 줘. 그의 뺨이 얼마나 보드랍고 머리칼이 어떻게 찰랑거리는지 아니? 웃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니콜라이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봐!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그녀는 귀여운 화살표를 아래로 향하도록 그려놓기까지 했다.
아래에는 자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카티아는 얼마 전에 태어난 아들, 스타니슬라프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갓난아기답지 않게 스타니슬라프도 엄마를 닮은 웃음을 지었다.
[당신도 같이 사진을 찍으면 좋을 텐데. 요새는 가족사진을 걸어 둘 액자를 만들고 있어.]
“휴우….”
카티아는 다 좋았지만, 그를 이렇게 깜짝 놀래키는 것을 좋아했다. 허리춤에 찬 홀스터의 권총을 꺼내 들고 모스크바로 달려갈 뻔했던 니콜라이는 뛰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첫아이의 출산도 같이 있어 주지 못하다니, 어쩐지 군대가 원망스러워졌다. 고속 진급을 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오기는 했어도….
카티아는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편지를 통해 늘어놓았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보는 손자를 끼고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스타스(스타니슬라프의 애칭)가 버릇이 없어질 것 같다던가. 또 오른 니콜라이의 월급과 훈장 수훈자를 위한 연금 덕에 라디오를 살 수 있었다던가.
언론들은 매일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높을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전 분야에서 9%를 달성하자! 농업 생산성이 12% 성장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스타하노프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자!
[치칙… 오늘의 뉴스를 전해 드립니다….]
관사에 있는 구식 라디오 역시 또 비슷한 이야기를 토해 냈다. 라디오를 탁 눌러 끈 니콜라이는 안락의자에 파묻혀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는 경제 같은 어려운 내용은 잘 몰랐지만, 옛날보다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카티아는 끝끝내 임신을 한 상태에서도 동네에서 바지런하게 이런저런 일을 해서 꽤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어린 스타스를 위해 대부분 썼겠지만.
옛날이라면 그런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은 극히 적었을 것이고, 돈이 있다고 해서 쓸 수도 없었다.
“흐음….”
그 당시에는 모든 물건이 부족했다. 지금에야 이런 임시 관사에도 라디오나 카펫, 치약 같은 물건을 충분히 배치할 수 있었지만… 영관장교 관사는 새삼 놀라웠다.
옛날에 비해 고급장교들의 특권은 거의 사라졌지만, 흐루숍카 중 큼직한 것을 배정받는 정도로도 니콜라이는 만족했다.
‘프랑스와 라인란트, 북이탈리아의 발전한 경공업 덕분에 우리나라에 적잖이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죠.’
동료들 중 제일 유식한 편인 마카로프 대위, 아니 소령은 그렇게 설명했다.
미국과의 사이가 험악해지며 미제 물건들의 수입이 끊겨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형제국들과 교역하는 물자들 덕에 생활의 질은 날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렇게 장교까지 된 지금에도 병사 시절 먹던 핫 초콜릿은 그리웠다.
‘얼른 미국과 다시 친해지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