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252화
“아저씨! 아저씨! 진짜 가시는 거예요?”
“어! 왔구나, 에르노.”
커다란 가방을 메고 캐리어까지 든 아저씨는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젊은 청년, ‘에르노’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너, 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저씨가 떠나신다는 걸 듣고,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남자는 씨익 웃었다.
에르노, 이 녀석은 정이 많았다. 의리도 있었고.
“인도라뇨! 거기는 완전히 세계 저 반대편 아닌가요?”
“하하하하! 인도의 정글이든, 아프리카의 사막이든 나를 막을 순 없지. 나야말로 최고의 베테랑 아니겠냐?”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는 남자를 보고 에르노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저씨답네요. 하….”
“너도 졸업하면 따라오거라! 내 너를 위한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놓을 수 있단다.”
“그럴까요?”
진짜 솔깃한 듯한 청년을 보고, 남자는 자기 주머니를 뒤져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뭔가를 휙휙 적어 내려간 그는 수첩을 부욱 찢어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기에 넌 아직… 풋내기 아니니? 하하하, 먼저 이곳에 한번 가 보거라. 내 오촌 조카가 그쪽에 있는데… 이걸 보여 주면 이것저것 가르쳐 줄 거다.”
“쳇, 알겠어요. 어디 보자… 성 파블로 나환자촌??”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 전 소련에서 나병에 대한 ‘최종병기’, 복합 항생제 요법이 개발되어 이제 더 이상 나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남아 있었다.
이제 의대를 막 입학하고, 세상을 돌아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찬 젊은 청년에게도 나환자촌은 어쩐지 꺼려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곳이야말로 이 땅의 전장이란다. 인도나 이집트보다도 더더욱. 거기서 환자들은 운명과 세상에 대항해 싸우지. 내 조카 녀석은 거기서 환자들의 싸움을 돕고 있고.”
“….”
남자는 그러면서 오토바이에 짐을 실으려다 무거운 짐가방 때문에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오토바이를 보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잉… 이런. 안 되겠다. 에르노?”
“예?”
“이건 너 가져라. 나는 그냥 택시를 잡아타고 가야겠군.”
“와, 진짜요? 진짜 주시는 거예요?”
나환자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시무룩해져 있던 에르노는 깜짝 놀라면서도 활짝 웃었다. 잘생긴 이마를 가리며 밤색 고수머리가 쏟아졌다.
“그래! 이걸 타고 네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돌아봐도 좋겠지. 단!”
남자는 씩 웃었다. 그가 지금까지 알아 온 에르노는 왕성한 지식욕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세상을 둘러보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오늘처럼 대학 강의를 빼먹지는 말거라.”
“아, 하하하하! 아하하…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쓰고 있던 베레모를 에르노의 밤색 고수머리 위에 눌러 씌워 준 남자는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검은 폭풍우, 하늘을 흔들고 짙은 구름 우리 앞을 가리워~ 바리케이드로! 바리케이드로! 조합의 승리를 위해!”
그가 늘 부르던 가락을, 에르노는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흐려 가는 하늘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제국주의를 거꾸러트려라! 세계 혁명 만세! 국제여단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스페인 내전의 패배 이후 세계로 흩어졌던 국제여단 출신의 베테랑들이 하나둘씩 다시 모여들었다.
“파시스트들은 고꾸라졌지만 제국주의와 자본가들이 다시 세계를 저들의 손아귀에 틀어쥐려 하고 있다! 혁명을 사수하라!”
노동자 혁명을 배신하고 퇴락한 국가자본주의로 후퇴하는가 했던 소련은 전체주의적 면모를 일신하고 혁명을 돕기 시작했다.
알제리에서, 인도차이나에서 혁명의 횃불을 높게 쳐들자 중국, 인도, 이집트, 이란에서도 변혁의 불길이 따라 피어올랐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패배한 이후 분루를 삼키며 도망쳐야 했던 수많은 망명객들은 다시금 세계혁명의 전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몇 동료 망명객들은 꿈에도 그린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고국의 옛 동지들이 나를 불렀네. 먼저 가네만….”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네!”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독일에서 추방당했던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세 조각이 나 버린 고국이지만 아무튼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비시 프랑스에게 쫓겨 도망친 프랑스인들도 고향에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자들은 끝까지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교활하게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프랑코는 미국의 눈치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후에서 스페인 정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월리스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그나마 동맹국보다 전범국 겸 종속국처럼 스페인을 취급하던 미국은 이제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며 스페인, 포르투갈, 남이탈리아 등에 힘을 실어 주었다.
고향이 그리운 국제여단의 베테랑들은 그리하여 다시 민중의 부름을 따라 전장으로 떠났다.
“이렇게라도 제국주의를 격퇴하다 보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대부분의 망명객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스페인 공산당의 서기장이자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열정의 꽃)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세계로 흩어진 옛 동지들에게 호소했다.
“전장으로 다시 갑시다! 제국주의의 하수인들을 격퇴하기 위해! 우리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저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멈춰 세울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나가지 못한다(No Pasaran)! 그렇습니다, 우리는 쫓겨났지만 그것으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소련은 직접적으로 군대를 편성하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파괴를 자아낼 수 있을지 아는 이들은 그 결정을 인정했다.
그나마 베를린에 핵폭탄 한 발만 떨어트리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려 한 소련에 비해, 미국은 일본열도 전체를 갈아엎을 것처럼 핵폭탄을 십수 발씩 떨어트리지 않았는가! 실행은 소련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그 모든 과정을 배후조종했다고 생각했다.
이 두 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어쩌면 인류 문명이 멸망하지 않을까? 적잖은 사람들은 그렇게 의심했다.
하여 세상에서 지원병들이 분쟁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이 할 수 없다면 내 손으로 하리라!”
“만국의 노동자를 대신하여 왔노라! 혁명 만세! 승리 만세!”
새로 창설된 국제여단‘들’은 그 어떤 국가의 군대보다도 사기만큼은 높았다.
자발적으로 세계혁명을 위해, 만국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를 위해 창백한 죽음이 도사린 전장으로 걸어 나온 병사들은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 * *
“이봐! 에르노! 에르노!”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 청년을 누군가가 다급하게 불렀다.
시가를 물고 베레모를 쓴 채, 새로 얻은 오토바이의 거친 엔진음을 즐기던 청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알베르토 형, 왜?”
“너 진짜 휴학한 거야? 너 미쳤냐?”
“하하하하! 왜?”
껄껄 웃으며 대답한 에르노를 보며 알베르토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미친놈, 어떻게 입학하자마자 휴학하고 여행부터 떠날 생각을 하냐.
에르노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막 교정을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해 있던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쟤? 어디 가는 거야?”
“꺄악! 나도 태워 줘!”
“나는 떠난다! 더 넓은 세상으로! 하하하하!”
그런 그를 보며 알베르토는 버럭 외쳤다.
“나도 데려가! 제기랄!”
“뭐어?”
“너 휴학했다는 거 듣고, 나도 사표 쓰고 나왔다. 내가 미쳤지….”
에르노는 이제는 하늘이 떠나갈 것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나보고 미쳤다더니, 형이 더 미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에르노에게 알베르토는 일갈했다.
“야! 어차피 우리 프로젝트 엎어져서 별로 더 할 일도 없어. 필드워크라고 생각하고 가 보지.”
“엥? 진짜 따라오게?”
나병에 대해 연구하던 알베르토는 소련이 99.9%의 나균을 처리하고 추가 감염을 방지할 수 있는 약제를 발견하자 목표를 잃어 버렸다. 방황하던 그에게 에르노의 계획은 마치 새로운 빛처럼 다가온 것 같았다.
진짜로 연구실에서 끙끙대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알베르토를 보며 에르노는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구나.”
그러면서도 에르노는 허리춤을 뒤적여 여행 계획표를 꺼냈다.
“자, 우리는 일단…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다음에….”
중남미 전역이 그려진 큼지막한 지도에는 파란 펜으로 찍찍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미라마르, 칠레로 넘어가서는 마가야네스, 발파라이소, 산티아고 데 칠레….
안데스산맥의 기슭을 따라서 칠레를 거쳐 페루로 올라가겠다는 이 장대하면서도 단순한 계획에 알베르토는 혀를 내둘렀다.
“그… 페루에 있는 나환자촌이라고 했지?”
“어. 나랑 친한 아저씨의 오촌 조카가 거기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이퀴토스 지역의 산 파블로라고 했는데… 그 아저씨한테 소개장도 받았어. 아마존 강변에 있다나?”
소개장이라고 보여 주는 종이 쪼가리는 마구 구겨져 있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퀴토스라고? 거기 완전 내륙 정글 속에 있는 깡촌 아니냐?”
“그런가? 밀림 따위는 날 막을 수 없지! 하하하하! 가는 김에 마추픽추도 한번 가 볼까?”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저돌적으로 달려 나가는 에르노의 모습은 신중한 알베르토가 보기에는 기가 막히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고수머리를 휘날리는 그는 어쩐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잘생겨야 해….’
그와 함께한다면 어디를 가든, 지옥불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다.
‘불온도서’를 읽는 학생 모임에서 만난 에르노는 늘 권위라는 것에 반항적이었고,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안 페론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반발하는 시위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적잖은 사람들이 그에게 반하기까지 했다.
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약학자 겸 생화학자로 조금만 더 경력을 쌓으면 안정적인 중산층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지만, 그는 에르노와 함께하는 ‘모험’의 스릴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후… 알았다, 알았어.”
나름 준수한 액수가 모여 있었던 저축통장을 털어 오토바이를 구입했던 알베르토는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오토바이에 자기도 시동을 걸었다.
“자, 포데로사 2세(Poderosa II)! 출발이다!”
“뭐?”
“아, 이 오토바이 말이야. 포데로사(강력한)라고 이름을 붙였어.”
알베르토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르노는 항상 이렇게 엉뚱한 면이 있었다. 세계를 둘러보겠다는 꿈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부터가 엉뚱한 게 아닐까.
밤색 고수머리 위에 별 모양이 박힌 베레모를 에르노,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꾹 눌러썼다.
“가자!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