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251화
미국이 소련과 강경한 대립각을 세운다는 것은 세계적인 후퇴를 의미했다.
미소의 지원으로 세계보건기구가 진행하던 소아마비 박멸 사업은 정치적 한파 때문에 주춤하기 시작했다. 공동 의학연구와 우주개발 연구 논의는 벽에 부딪혀 버렸다.
하지만 이런 반동 속에서도 웃는 이들은 존재했다.
“하하하하! 드디어 저 개자식들을 쓸어 내버릴 때가 왔다!”
예컨대, 남경의 집무실에서 광소를 터트리는 장개석 같은 자가 존재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타협을 위해, 그리고 나치 독일의 잔당과 협력한 중화민국을 적극적으로 제재했었다. 그렇게 대륙의 절반을 주은래가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준 장개석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국제연합은 독일군 장교들을 샅샅이 찾아내 끌고 갔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교범들이나 지식은 국민혁명군 장교들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화폐개혁의 실패로 주저앉았던 경제를 쥐어짜서라도 군비를 증강한 장개석은 미소대립을 발판삼아 천하통일의 대업을 노렸다. 그에 맞서 주은래 역시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공산당의 군대를 증강시키며 군비경쟁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진짜 드리워 오는 전운에 행복해하는 이는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요시! 지금이야말로 저 반역도당들을 몰아낼 때다!”
남일본과 북일본 간에는 계속 전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 철거현장에서의 충돌 이후에도 두 일본 간의 격돌은 이어졌다.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감히 네놈들이 여기서!”
“개소리 집어치워! 저놈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우리 부모 형제들이 다 죽었다. 개만도 못한 새끼들!”
야스쿠니 신사는 결국 철거되었다. 소련의 눈치 때문에 남일본에게 적극적으로 무력도발을 할 수 없는 북일본은 계속 도쿄를 남북으로 반분하는 장벽을 높이높이 쌓아 나갔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마음도 모른 채, 이번엔 북일본의 청년들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 * *
일단의 청년들은 농촌으로 흘러 들어간 무기로 무장한 채 남일본을 습격했다. 습격의 대상은 바로 ‘순국 12사묘’.
“정신 나간 놈들! 어떻게 그 전쟁범죄자들을! 따지자면 그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반 토막이 난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
“하, 하, 차라리 그 청년들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남일본의 일부 극우 세력들은 처형당한 전범들의 유골을 화형장에서 훔쳐내 ‘순국 12사묘’라는 묘지를 세웠다.
도조 히데키, 기무라 헤이타로 등 A급, B급 악질 전범으로 처형당한 자들은 국제군사법정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화장했다.
그들의 묻힌 곳이 극우파들, 전쟁광들의 성지가 될 수 있다는 소련의 주장하에 화장된 유골은 철저히 은폐되어 곳곳에 유기되었다.
하지만 일본 극우파들은 어떻게 한 것인지 유골들의 일부를 찾아내 그들을 모시는 사당까지 만들고 말았다.
“야스쿠니가 사라진 이상 우리 마음의 고향은 바로 순국묘나 다름없다. 이제는 어디서 호국영령을 모실꼬?”
북일본의 유력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는 비공식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졌다. A급 전범으로 기소까지 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처형되지 않은 그는 남일본 정계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른 순국 12사묘를 습격한 청년들은 추도비를 폭파하고 유골함을 파헤쳐 땅바닥에 흩뿌려 놓았다.
“일본을 망친 죄인은 누구인가! 미친 전쟁을 일으켜 청년들을 죽인 죄인은 누구인가! 특공이란 명목으로 일본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젊은이들을 의미 없이 개죽음시킨 죄인은 누구인가!”
“머, 멈춰라! 빠가야로!”
펑!
마치 참배객인 것처럼 위장한 청년들은 사제 폭발물을 사용해 순국묘 앞의 추도비를 무너트리고, 소총으로 무장한 채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경찰들과 교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곡괭이로 유골함을 깨부수어 재를 땅바닥에 뿌리고 거기에 소변까지 눈 것이 알려지자 남일본의 우파들은 눈이 뒤집혀 버렸다.
“저 개만도 못한 자식들! 덴노 헤이카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저들을 찢어 버리고….”
“아아! 영령들이시어! 우리들이 미욱하여 당신들의 안식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열한 명의 청년들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남일본 경찰당국은 그들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라고 발표했지만, 그 발표를 믿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하! 그 개자식들을 죽인 게 누군지 몰라도 참 잘했군!”
“어허 이 사람아. 다 자살이라니까? 으하하하하!”
남일본의 극렬 우파들은 그들의 죽음을 비웃었다. 감히 순국열사들을 비웃다니! 농촌의 불온분자들과 북일본의 공산당과 싸워 온 이들은 사람 몇 잡아 죽이는데 딱히 거리낌도 없었다.
물론 반대로, 북일본의 여론은 타올랐다.
“우리 청년들을 저 새끼들이 잡아다가 살해했다!”
마찬가지로 북일본 역시 그들이 진짜 자살했을 거라 믿지 않았다. 딱히 ‘순국열사’들을 싫어하지 않는 이들도, 자기네 청년을 저쪽에서 데려가 잡아 두었다가 살해했다는 사실에는 충격을 받았다.
“이게 무슨 야만인가? 이게 문명국가에서 저지를 만행인가?”
북일본은 자체 헌법에서 ‘군대’를 유지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국을 바로 아래 둔 채로 무장을 완전 포기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자체 제헌의회를 거쳐 헌법을 선포한 직후 그들은 준군사조직인 ‘자위대’를 조직하고, 또 전국적으로 노동자―농민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무력을 확보했다. 경찰 역시 유사시 군인처럼 투입할 수 있도록 ‘전투경찰’로 훈련을 받았다.
각지의 지역당에서는 당원들에게 기초적인 수준의 군사훈련을 시켰고, 일부 과격파 청년들은 소련에서 전역 장교들까지 초빙해 가며 자체적인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보복작전을 위해 아직은 허술한 수준인 시골지역의 ‘국경’을 넘나들며 테러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남일본 역시 자체적으로 결성한 일본국군 준비대를 동원해 반격에 선제공격까지 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전쟁의 검은 먹구름이 일본 열도를 뒤덮기 시작했다.
* * *
“뭐? 잽스 놈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고?”
“예, 대통령 각하. 서로 국지도발을 일삼으며….”
“하! 소련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맥아더는 고급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다리를 꼰 채 비서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듣는다기보단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쪽에 가깝긴 했지만.
그의 ‘옥수수 파이프와 선글래스’는 사실 서민적인 이미지 연출에 가까웠다. 실상은 뭐든 고급에 익숙한 고위군인이었고, 지금처럼 보는 눈이 없을 때는 얼마든지 그의 취향을 드러내곤 했다.
비서관은 애써 찌푸리지 않으며 담담하게 소련의 동향을 보고했다.
“소련은 국지도발을 자제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어떨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물밑으로는 도발을 유도하면서 겉으로는 자제할 것을 권고하는 양면전술을 펼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저 잽스들은… 그냥 내버려 두게.”
“예?”
“서로 죽고 죽이든지, 관심 가지지 말라고. 기왕에 싸운다면 소련 콧대를 눌러 줄 정도로 콱! 한 방 먹여 주든가.”
외교비서관은 당황한 듯했다.
여기서 더 전쟁을 확산시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좋지 못했다. 소련군은 바로 위, 홋카이도에까지 주둔하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그들이 치고 내려와 미국의 몇 안 되는 전진기지인 남일본을 밀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차피 소련 놈들이 너무 내려온다 싶으면 중국군이나 우리 공군을 투입하지. 소련은 여전히 우리와 직접 충돌하지 않아! 보면 모르겠나?”
“….”
“이집트에서도 소련군은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 우리 군대는 직접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비슷할 거야. 아니, 일본은 훨씬 덜 중요하니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있겠군. 수에즈보다 일본이 더 중요하겠나?”
소련은 이집트에서 자기네 신무기들을 열심히 팔아 댔다. 군사기밀 유출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신형 대전차미사일이나 새로 배치한 대함미사일을 이집트군에 아낌없이 팔아넘겼다.
하지만 신무기를 내주면서도 그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군인을 보내 참전시키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 간에 진짜 총격전이 벌어지면, 자칫하면 미소 간의 전면 핵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서일까?
사실 그럴 법도 했다. 미국은 영국에 비밀리에 배치한 전략폭격기들을 통해 소련의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를 폭격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레닌그라드까지는 고작 2천 킬로미터. 하지만 소련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동맹국, 프랑스의 기지에서도 뉴욕을 폭격하려면 6천 킬로미터는 날아와야 했다.
미국은 소련을 핵의 불꽃으로 태워 버릴 수 있었다. 소련은 불가능했지만. 맥아더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뭐, 런던이나 마드리드, 나폴리가 폭파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소련을 끝장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괜찮았다. 미국은 그 전쟁에서도 살아남아 패권국으로 다시 비상할 테니.
얼마든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킬 수 있다! 이것이 맥아더의 일관된 노선이었다. 잽스들 몇몇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어 가는 것은 소련을 파멸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이었다.
“각하… 하지만, 소련과 굳이 군사적 대립을 격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필요? 적이 있는데 그들을 피해야 할 ‘필요’가 있나?”
비서관은 조심스레 물었지만, 맥아더는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의 눈에 소련은 엄연한 적국이었고, 반드시 파멸시켜야 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방심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몇은 소련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더군. 내 생각은 아니야! 소련은 반드시 우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개수작을 부릴 거고, 우리는 그것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해! 인도나 이집트, 이란을 보게! 그들이 거기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나?”
“…알겠습니다, 각하.”
맥아더의 이런 주장을, 중동과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이 뒷받침했다.
소련은 세계를 적화시키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리고 밑밥을 깔아 두었다. 해외 파병을 선언한 맥아더의 지지율이 오히려 반등하는 것은 이런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말려 들어가는 것 자체가 소련 때문이다! 반드시 그들의 뒷공작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물론 그 대처가 군사적 개입이 아니라 미국의 막대한 자본력을 이용한 우회적 회유일 수도 있었지만, 최소한 맥아더는 그런 옵션을 선호하지 않았다. 미국이 소련을 원조할 때 있었던 평화 무드를 그는 단호히 ‘매국’이라고 평가했다.
“왜 우리가 우리 돈으로 타국 국민들의 배를 불려 주어야 하나? 소련이 집어삼킬 나라들을? 월리스의 매국을 따라갈 셈인가?”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없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그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돈 말고 다른 여러 수단들을 아는 외교관들은 대통령의 그런 독단에 당혹해했지만 그들로서도 방법이 얼마 없었다. 이미 미국은 선을 넘어 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