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248화 (248/300)

# 248

248화

[국민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갈 차후의 계획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이집트 쿠데타로 집권한 자유장교단의 리더, 나세르는 ‘아랍 최고의 라디오 연설가’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소련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저개발 국가들에게 교육 인프라 확보라는 명목하에 수백만 대의 값싼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만들어 뿌렸다.

이렇게 퍼진 라디오에 수억에 달하는 민중이 귀를 기울였다. 연설가로서의 재능이 넘치는 젊은 나세르는 이 라디오를 대중선동과 지지 확보를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하루의 일과가 끝나자 사람들은 불 가의 라디오 옆에 모여들었다. 오늘 총리님은 뭐라고 말할까?

나세르가 경제 개발 계획을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우리 이집트는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입니다. 어제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아스완 하이 댐 건설 사업에 대한 인가를 내렸으며….]

“뭐? 댐이라고?”

댐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귀가 솔깃해 모여들었다. 매년 범람하는 나일강은 고대시대에는 이집트의 풍요를 보장해 주었을지 몰라도, 치수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막대한 양의 토사가 농지를 휩쓸고 지나가면 예전에는 비옥해진다고 좋아했을지 몰라도,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현대에는 농지구획과 수리시설을 망가트릴 뿐이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영국은 1900년대 초반에 아스완 로우 댐을 건설했고, ‘이집트의 근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며 꺼드럭거렸다.

그런데 이번엔 소련이 댐을 세운다니? 사람들은 신기한 말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아스완 하이 댐에는 수력발전소와 전력공급시설이 세워질 것입니다. 어두운 농촌에는 전깃불이 들어갈 것이고, 이집트의 공장은 전기를 공급받아 돌아갈 것입니다. 새로 세워질 중공업 단지에는 아스완 댐에서 생산된 전기가 흘러 들어가 우리 이집트의 경제성장을 이끌 것입니다!]

댐은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댐 건설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지역 경제에 뿌려졌다. 수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는 농촌의 암흑을 내모는 등대가 될 것이고, 농업용수 공급의 기본이 되었다.

게으른 파루크 왕은 아스완 댐 대신 나일 계곡 개발사업이라는 실체 불분명한 사업을 내세웠지만, 젊고 정력적인 자유장교단 출신 정치가들은 아스완 댐 건설이라는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심지어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아스완 댐 건설을 도와준다지 않는가! 옆 동네의 소련 출신 의사 선생이나 값싸게 들어온 소련제, 키릴문자가 박혀 있는 라디오를 듣는 이집트 농민들은 소련에 대한 호감이 상당했다.

[이 거대한 사업의 비용을 대기 위해 우리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할 것입니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주식회사에 정당한 보상을 치르고….]

“!!!”

그러나 다음 순간 충격적인 발언이 라디오에서 터져 나왔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제국주의자들이 손쉬운 세계지배를 위해 이집트 영토에 파낸 그 운하를 국유화하리라고 젊은 총리는 선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해에 수만 척의 배가 수에즈 운하를 지났다. 거기서 지불하는 통행료만 해도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농민들도 건너건너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것이 이집트의 것이 된다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그래, 좀 팔아 주시게. 고맙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서기장 동지.]

이집트는 소련의 배후 지원하에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이 지금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훗… 프흐흡….”

이란에서는 석유가, 이집트에서는 수에즈 운하가, 인도에서는 인도 그 자체가! 미국의 개입 선언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주의는 순식간에 무너져 가고 있었다.

미국이 굳이 개입하지 않고 불개입, 고립주의를 천명했더라면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제했겠지만 미국이 미쳐 날뛰는 이상 이쪽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수에즈 운하라는 목숨줄이 틀어막힌 이상 영국의 인도―아시아 지배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대륙을 2만 킬로미터 이상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현지 주둔군을 보급하겠는가?

인도에서는 이 시점에 맞추어 영국군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란에서는 서구의 돈에 매수당한 장군들을 숙군하고 있었고. 영국으로는 막 총력을 다해야 할 시점에 발목이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회사의 대략 절반 가까이를 소유한 프랑스가 기꺼이 모든 주식을 이집트에게 넘긴 이상 영국에게는 선택권도 없었다. 토레스 서기장은 소련의 ‘적절한’ 보상금을 받고 수에즈 주식을 포기하는 것을 골랐다.

애초에 프랑스는 더 이상 지중해에 딱히 전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북대서양 방면으로 해군 전력을 배치한다면 모를까.

순순히 식민제국이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이집트에 전쟁을 선포하든가.”

중동에서 친서구 왕정은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사우디와 영국의 하수인인 이라크 왕국, 요르단 왕국이 있었고, 영국군 역시 지중해 함대를 돌려 이집트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 더 이상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적잖이 있었다.

* * *

“당… 당장 수에즈를 확보해야 하오!”

단순히 돈이 안 벌리는 것으로 끝나는 AIOC의 정유공장들과는 달리,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세계지배 전략의 핵심축이었다.

수에즈가 끊긴다면 아시아 식민지와의 물리적 거리는 몇 배로 멀어졌다. 아메리카 섬 식민지는 지난 대전 중 미국에게 구축함을 받아오는 대가로 넘겼으니, 이제 구대륙 식민지들이 전부인 영국에게 수에즈의 상실은 대영제국의 완전 붕괴를 의미했다.

이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회의실 탁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른 각료들은 미덥잖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면서도 떨떠름하게 찬성을 표했다.

미국이 배후에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명실상부 최강대국인 미국이, 영국이 유럽에서 협력해 주는 대가로 아시아 식민지를 인정해 주고 유지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형적인 육상국가인 소련은 아직 강대한 함대가 지키는 영불해협을 돌파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빈약한 보급역량으로는 서유럽을 가로질러 영국을 침공할 수도 없었고, 미국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일단 이집트라도 찍어누른다면 소련을 봉쇄할 수 있었다. 미국은 맥아더 독트린을 어기고 ‘빨갱이 놀음’을 하는 나세르에게 분노한 상태였다.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가서 카이로의 그 떨거지들을 박살 내놓도록 하지요…. 수에즈를 제 놈들이 손에 넣었다 해도 우리 해군이 거길 봉쇄하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의 빈약한 해군으로는 영국의 막강한 로열 네이비에 대항할 수 없었다. 영국 함대는 대전 중에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여전히 세계 제2의 함대였다. 세계 제1의 함대인 미국이 동맹이었고.

독일의 전함들을 배상함으로 뜯어 온 이상 로열 네이비는 왕년의 전성기처럼 강력하지는 않겠지만 이집트 정도는 박살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인도로 갈 원정군 증원병력을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상륙시키고 전함의 함포와 미제 전차부대를 앞세워 카이로로 치고 올라간다면 풋내기 자유장교단은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나세르가 소리높여 외치는 ‘아랍 사회주의’를 아니꼽게 여기는 요르단이나 이라크의 왕정까지 동원한다면 허접한 이집트군 정도는 가볍게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해군장관과 육군장관은 둘 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놈은 마치… 히틀러 같군. 라인란트를 재무장시키고, 주데텐란트를 집어삼키던 당시의 히틀러를 보는 것 같아.”

처칠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이든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히틀러 역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하며 주변 국가들을 집어삼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도발에 숙여 주었지만 결국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이제 저 ‘중동의 히틀러’가 더 이상 세력을 키우기 전에 콱 죽여 놓아야 한다! 이것이 이든의 주장이었다.

“히틀러가 그렇게 설치기 전에 밟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크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누군가가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하자 다른 사람이 핀잔을 주었다. 히틀러는 막가파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다가도 다시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영프 연합군을 박살 냈다.

결국 동부전선에 가서야 패배하는 바람에 영국은 졸지에 대륙을 모조리 장악한 소련을 혼자 상대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소련이 혹시나 견제하지 않겠습니까?”

“소련은 견제할 수단이 없습니다. 본국함대는 영불해협과 GIUK 방어선을 사수하고, 미국 함대가 이를 뒷받침할 것입니다. 육군으로는… 해협을 넘어올 수 없고….”

영국 정부가 본토에 복귀하자마자 한 것이 바로 해협의 방어 강화였다. 특히 프랑스 쿠데타를 지원했다가 실패한 이후 더더욱.

대륙 세력들은 더 이상 영국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영국의 유일한 방어선은 좁은 영불해협뿐이었다. 막강한 펀치력을 지닌 대형 전함들과 단단한 해안요새들을 해안가에 깔고 나서야 영국 정치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바로 ‘GIUK’ 방어선이었다.

Greenland―Iceland―United Kindom을 줄인 이 방어선은 영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GIUK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영국의 생명줄인 미국과의 북대서양 무역선이 끊길 수 있었다. 독일의 U보트들이 설쳐 댔기에 보급로가 끊기고 결국 패배했던 경험을 살려, 영국은 저 해역에 강력한 경계망을 구축했다.

저 방어선이 돌파당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여전히 대륙에 연결된 섬일 수 있었다. 프랑스나 소련이나 대전 이후의 수상함 전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로열 네이비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제기랄… 어쩐지 불안합니다만….”

“그게 무슨 소리요?”

“스탈린이 과연 자기 소매 속에 숨겨 둔 게 하나도 없겠습니까? 모든 게 쉽게 풀려 간다는 게 더 걱정이 됩니다.”

“끄응, 불길한 소리 마시오.”

이제 영국 정치인들에게 스탈린은 마치 사악한 마술사나 다름없었다. 그가 조종하는 ‘제3세계’의 수많은 하수인들은 대영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한 공작을 곳곳에서 펼쳤다. 갖가지 기기묘묘한 술수를 부려 세상을 농락하는 마술사!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악마나 다름없었던 히틀러조차 스탈린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헌데, 히틀러에게조차 패배한 영국이 과연 스탈린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우리는 혼자 소련과 싸우는 게 아니오. 우리 뒤에는 미국이 있고, 우리 옆에는 수많은 충실한 보호령들이 있소.”

그 말을 하면서도 이든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미국은 영국을 최우선 동맹국이라 말하면서도 현대의 가장 강력한 전략병기인 핵폭탄만큼은 공유해 주지 않았다. 영국은 부족한 자원을 짜내어 핵개발에 투자하면서도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소련이 핵무기를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어기면서 핵무기를 꺼내면 어찌해야 하나? 미국이 과연 영국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감수할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파멸할 것이라면, 핵으로 파멸하나 가만히 목이 졸려 죽나 똑같은 것이 아닌가? 이든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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