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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47화 (24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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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화

이 모든 사태를 촉발한 인도에서의 분쟁은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우리 민중전선은 모든 제국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며 모든 영국인들이 인도 땅에서 물러날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민중전선 만세! 인도혁명군 만세!”

미군이 오기 전에 영국군의 거점들을 함락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인도혁명군은 영국군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영국군의 군수공장을 확보하고, 또 자체적인 야포 등 병기 생산능력을 갖춘 혁명군의 공세가 매섭게 몰아쳤다. 인도군이 포병대를 집중, 대량 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영국군은 혁명군의 집중공세 앞에 서서히 무너져 갔다.

“사, 사령관님. 급보입니다! 탄약고에서 유폭이….”

“뭐라고? 제기랄!”

캘커타 북부를 수비하는 바드라만 요새의 사령관은 순식간에 질려 사색이 되었다.

인도군의 무장은 빈약했지만, 수는 많았다. 요새가 견고하게 버틴다면 얼마든지 공세를 막아 낼 수 있겠지만 거점들이 하나하나 함락당한다면 퇴로가 없었다.

이집트와 이란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인도 주둔 영국군은 본국에서의 보급을 당분간 기대할 수 없었다. 인도군은 이 기회를 노려 영국군을 몰아쳐 왔고, 물자가 부족한 영국군은 점점 한 발짝씩 밀려났다.

“여기가 뚫리면 캘커타가 위험하다!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영국령 인도의 수도이자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인 캘커타가 바로 후방에 있었다. 도시에 인도군이 접근하면 분명 현지인들은 소요를 일으킬 것이다.

캘커타가 함락당한다면… 대도시에 위치한 군수공장들이 또 한 번 인도군의 손에 넘어간다. 그 사태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인도군은 자체적인 보급역량은 부족했다. 대군을 운용하기에 인도인들은 대규모 행정을 다루어 본 경험이 부족했고, 썩어도 준치라고 영국이라는 산업 대국에 비해 군수생산 역량 역시 한참이나 못 미쳤다.

그러나 영국이 한발씩 밀려날 때마다 인도인들은 그만큼 강해졌다. 승리의 경험에서, 영국군의 보급품을 빼앗아서, 더 많은 인도인들이 승리를 보고 합류해서!

“북부 방벽을 보수하고 중기관총 그쪽으로 집중해! 그쪽으로 공세가 집중될 것이다. 알겠나?”

“예! 각하!”

말소리는 높았으나 그 안의 사기는 그다지 높지 못했다. 사령관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차하면 항복하겠군….’

인도주둔군의 사기는 빈말로라도 높다 하기 어려웠다. 수시로 항명 사태와 군기위반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인도인들과 전투를 명령하는 장교를 살해하려다 적발된 것이 두 번 있었고, 한 번은 실제로 성공했다.

‘무엇을 위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

병사들은 입버릇처럼 개죽음, 개죽음을 이야기했다. 나의 청춘은 왜 이역만리 열대의 땅에서 져야 하는가?

사악한 파시스트 군대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싸움에는 얼마든지 자원했을 병사들은 인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거부했다.

명백한 악, 나치 독일과의 싸움은 병사들을 전장으로 불러낼 수 있었지만 인도에서의 명분 없는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군대는 안팎으로 부서져 내려가고 있었다.

이미 영국군은 한계가 가까웠다.

“대영제국을 위해, 싸워라!”

* * *

“발사! 발사! 발사!”

쾅! 쾅! 쾅! 인도군의 76mm 야포가 연이어 불을 뿜었다. 고작 6문뿐이었지만 든든한 포병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도혁명군의 사기를 하늘 끝까지 치솟게 했다.

영국군의 대포병 사격은 멈춘 지 오래였다. 캘커타 인근을 조여 들어온 인도혁명군의 게릴라 부대들은 영국군 수송부대를 수시로 습격해 탄약 보급을 끊고 요새를 반쯤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요새에 그냥 돌진하는 것은 막대한 사상자를 낼 터. 인도혁명군이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는 것은 오직 영국군의 절망을 더 깊게 하기 위해서였다.

“포병은 전장의 신입니다. 10만 발의 포탄을 쓴다면 수천 명이 죽을 것을 수십 명이 죽도록 줄일 수 있습니다. 적이 쏠 1만 발의 포탄을 빼앗는다면 마찬가지로 아군 수천 명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소련 유학파 출신 인도군 장교는 그렇게 주장했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병사들의 소중한 목숨을 털어 넣느니 압도적인 포병을 투입하자!

물론 인도군의 포병전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았고, 전쟁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영국군이 장악한 거대한 캘커타시 근처에 침투한 인도혁명군 대원들은 마을에서 해방구를 조직했다. 공평한 토지분배를 약속하고 빈민을 위한 정부, 가난한 자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야기하자 적지 않은 수의 소작농,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인도혁명군에 투신했다.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뼈가 빠지도록 농사를 짓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난하고 굶주립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이 풍요로운 대지는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소출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피땀 흘려 농사지은 작물들은 우리 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잔혹함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현실의 잔혹함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영국 식민제국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막대한 땅을 사들여 대형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건설했다. 힘으로든, 혹은 고리대금 때문에든, 혹은 무슨 사유에서든 땅을 빼앗긴 수많은 인도인 자영농들은 소작농 내지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추락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결코 풍요롭지 못했다.

“저 거대한 대지가 겨우 몇 사람 영국인 지주들의 손에, 회사들의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피땀을 빨아 배를 불리지요.”

일당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한 자영농들은 원래 자신의 땅이었던 플랜테이션에서 수고롭게 일을 하고 얼마 안 되는 임금만을 받아 갔다.

그 일자리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었다. 농번기에는 적잖은 수의 일용직들을 고용하지만 농한기에는 대부분의 일자리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일자리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어야 했다. 모든 인프라가 플랜테이션 위주로 맞추어졌으며, 매 계절에 따라 노동력 수요는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들쑥날쑥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고향을 버리고, 정든 고향을 버리고 농민들은 떠나갑니다. 저들의 행렬을 보십시오! 병든 아비 어미가 굶주린 자식들을 안고 도시로 떠납니다.”

플랜테이션 때문에 식용작물을 생산하던 농토는 싸그리 밀려 사라졌다. 더 이상 식량이 생산되지 않는 농촌에서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소득을 제공할 일자리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쥐꼬리만 한 일당이나 겨우 쥘 뿐.

그래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터전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다. 도시에서의 삶은 슬럼가에 처박혀 영국인들을 시중드는 하찮은 일이나 하다가 병에 걸리면 죽어 가는 삶.

하지만 그것들이 농촌의 암흑보다는 나았다. 운이 좋은 소수는 ‘브리티시 드림’을 꿈꾸며 도시로 나아갔고 나름의 성공을 거둘 수는 있었다. 인도인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고꾸라질지언정.

그러나 운이 좋지 않은, 평범한 대다수는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살아 갔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꿈을 꿀 수 없이, 오늘 하루를 살아 내느라 급급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한 희망의 불꽃을 보고서 모여들었다. 제국주의를 물리치지 않고서 인도의 미래는 없다!

“저들은 이제 우리를 두려워하며 한 발 한 발 물러나고 있습니다. 저들이 왔던 바닷속으로 다시 처박아 줍시다. 우라! 우라! 우라!”

* * *

처절한 대조국전쟁 속에서 단련된 소련군의 군사지식은 수많은 나라로 퍼져나갔다.

가깝게는 소련 바로 밑에서 대치 중인 남중국과 북중국의 군대가 소련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남중국은 소련과 싸우며 서로를 닮아 간 구 독일군 출신 장교들에게 배워서, 북중국은 소련이 파견한 군사고문단에게 배워서.

또 중동에서 아랍민족주의의 횃불을 들고 일어난 이집트의 청년 장교들이나, 이스라엘을 지중해 속으로 처박은 시리아 공화국수비대 등이 소련군 고문단에게 배운 기술을 사막의 전장에서 독창적으로 발달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의 적자(嫡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인도혁명군이었다.

“그래, 인도군은 좀 잘 싸우고 있나?”

“예! 서기장 동지. 캘커타가 인도군에게 포위당했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돌파 대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해 보급선을 끊고….”

주코프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소련군 장교들이 연구한 전략전술은 그대로 인도에 가서 현실이 되었다.

영국은 인도 서부 최대의 거점인 캘커타를 포위당했다. 동부의 거점인 봄베이나 델리 역시 근처 시골에서 준동하는 혁명군 때문에 제대로 기동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기동계획이며 진격로가 실시간으로 소련으로 알려지고, 이 정보가 다시 인도혁명군 사령부로 실시간으로 전해졌기에 영국군은 결코 인도혁명군을 잡아낼 수 없었다.

소련이 직접적으로 인도에 개입하는 것을 막겠답시고 아프가니스탄에 일부 영토를 내주어 방패막처럼 쓰려 했겠지만, 동투르키스탄(신장위구르)과 티베트가 소련 영향하에 독립하자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우회경로를 통해 수천 명의 NKVD와 스페츠나츠 요원들이 잠입했고, 영국군의 중요 정보들이 시시각각 전해졌다.

“맥아더 독트린도… 이젠 어찌하는지 보세나. 하하하하!”

그리고 이로써 맥아더 독트린은 발표하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맥아더 라인의 축인 이집트, 이란, 인도가 다 소련 편으로 기울어지자 방어선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버렸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시절 영국은 러시아의 인도양 진출을 막아 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맥아더 역시 그것을 본떠 전략을 세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남진 정책’을 성공적으로 관철하고 있었다.

이란에서는 모사데그가, 이집트에서는 나세르가, 인도에서는 네루가 세계라는 거대한 장기판에서 소련의 붉은 영향력을 널리 퍼트리고 있었다.

정치국 회의실에 걸린 거대한 세계지도에서는 점점 ‘붉은 국가’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미국이 파트너로 삼아 소련을 압박하려던 사우디나 태국은 붉은 물결 사이에 고립되어 홀로 외로이 파란색으로 남아 있었으나 그들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가 무너지고, 이집트가 우리 편으로 돌아오고….”

나세르와 사다트가 이끄는 이집트 혁명정권은 이란의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 국유화에 이은 더욱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국에서는 그들의 계획을 뒷받침해줄 원조안을 통과시켰고.

수백 명에 이르는 소련 기술자들이 명령만 내려지면 이집트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련 편에 붙는 게 얼마나 유익할지를 보여 주는 산증인이 되기 위해서.

“사회주의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상에 보여 주게나. 우리의 과학기술과 공업력의 승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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