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244화
맥아더라고 아무 계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의 손이 너무 많이, 너무 멀리 뻗치고 있어. 미국은 분명 강력하지만, 소련이 구대륙을 몽땅 집어삼킨다면….”
미국은 신대륙에 있고, 소련은 구대륙에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대양을 끼고,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대양은 외부의 개입을 막는 장벽 역할도 해 주었지만, 역으로 미국이 해외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도 되었다. 대양을 수천 킬로미터씩 가로질러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힘을 투사하는 것은 유럽, 아시아 같은 지정학적 핵심지들과 맞닿아 있는 소련에 비해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소련의 국력이 미국의 대략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기에 소련이 미국에게 한 수 접어 주지만, 소련이 만약 미국과 대등해진다면? 그때도 소련이 지금처럼 살갑게 굴까?
맥아더와 미국 우파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상품 시장, 원료 구매처들이 다 소련 손아귀에 들어가는 꼴을 눈 뜨고 보고 있어야겠지.”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는 적었다. 적어도 아시아와 유럽에 비하면.
미국은 넓디넓은 땅에 비해 인구는 고작 1억 5천만밖에 되지 않았다. 면적으로 보면 영프독을 합친 것보다 여덟 배는 넓었지만, 인구는 영프독을 합친 것과 비슷했다.
아시아? 인구만 보면 아시아는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남북 중국을 합치면 5억, 영국령 인도가 거의 5억에 가까운 수준. 세계 인구 25억의 40%가 중국과 인도였다.
그런데 이 거대한 잠재 소비시장이 모조리 소련의 영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미국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미국이 파시스트들과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주의로부터, 보호무역주의의 화신들로부터 미국의 상품 시장을 지키기 위해. 그런데 그 나라들이 다 소련 손아귀에 넘어가 버린다면 미국인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
“감히 소련이 우리 영역에 손을 뻗치지 못하게, 그 부숭부숭하게 털 난 손에 뜨거운 맛을 보여 주도록!”
영국은 이제 몰락한 2류 열강이다. 지금 영국을 도와 아시아에 영국이 뿌려 둔 영향력을 접수하고, 사우디―이란―인도―중화민국―남일본을 잇는 반공 전선을 구축한다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맥아더 라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선을, 맥아더는 지도 위에 쭉 그어 나갔다.
‘맥아더 라인’, 그리고 ‘맥아더 독트린’. 이 얼마나 멋진가? 맥아더는 스스로 그렇게 감탄하면서 비서관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쩝… 그 친구는 아쉬운데.”
오랫동안 그의 비서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지난 행정부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다시 한번 비서관으로 쓰고 싶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정중히 맥아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원수 각하, 저는 아직 군대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나쁘지 않았다. 그의 심복인 ‘바탄 갱’은 솔직히 말은 잘 들었지만 능력이 대단하다고 보기엔 어려운 이들이었다. 아이젠하워 정도의 유능하고 믿을 만한 군인이 군부에 있다는 것은 맥아더의 군 장악력을 높여 줄 수 있었다.
그가 대일전 총사령관이던 시절 늘 그의 말에 토를 달던 빌어먹을 해군 새끼들을 조지는데 쓸 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맥아더는 그렇게 생각하며 ‘맥아더 라인’을 어떻게 멋지게 공표할 수 있을지 연설문 초안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매카시 역시 그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자들은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 부역 혐의로 고발되어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끔찍한 이들의 혐의를 심문할 것입니다.”
펑, 펑, 플래시가 터지는 와중에 매카시는 눈이 시뻘겋게 되어 끌려온 사람들에게 마구 삿대질을 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양팔에 수갑을 찬 채 매카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십시오! 저들의 뉘우치지 않는 모습을. 모두가 하나같이 반국가 혐의로 여기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당신이나 부끄러운 줄 아시오!”
“저! 저!”
수갑을 찬 사람 중 하나가 매카시에게 빽 고함을 치자 매카시는 입에 거품을 물 것처럼 발작적으로 고함을 쳤다.
수위가 와서 위협적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그의 어깨를 눌러 앉히자 그제서야 좌중은 조용해졌다. 매카시는 씩씩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작품과 관련된 인사들을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그런… 불쏘시개를 만드는 데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위원회의 조사마저 거부했습니다!”
“헉….”
“어떻게 그럴 수가….”
“하! 미국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게 불법이오?”
아까 고함친 이가 한 번 더 빽 고함을 쳤다. 수위는 매카시의 명령 없이도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턱주가리를 콱 올려쳤다.
“윽….”
“저자! 저자야말로 소련의 간첩이오! 저… 끔찍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반역혐의자를 일으켜 세우시오!”
아까는 앉히더니 이제는 세우는가? 그는 킬킬대며 억센 손으로 일으켜 세우는 수위들과 매카시를 비웃었다.
“이름?”
“당신도 아시면서 왜 물으시오? 여기 내 이름을 모르는 분 혹시 계시오이까?”
“…이름!!”
“아데노이드 힌켈!* 하하하하하하!!!”
그는 콧수염을 푸들거리며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이 같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영화 속의 배역 이름을 듣자 매카시는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당신! 미국을 모욕하는 거요? 당신의 행동은 이 자리와 미국을 모욕하는 것이오!”
“내 말이! 당신은 지금 자유의 나라, 미국을 모욕하고 있는 게 아니요?”
“빌어먹을… 저 새끼 의회 모독죄로 체포해!”
수갑을 차고서도, 그는 세련된 몸짓으로 일어나 좌중을 향해 우스꽝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금 제 이야기를 듣는 분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는 불행은 그저 탐욕이 지나가며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입니다. 인류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조소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쓰디쓴 나날은 지나가고 독재자는 죽… 으읍….”
수위의 두터운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발버둥을 치며, 찰리 채플린은 끌려 나갔다. 하지만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관중들에게 희극적인 눈웃음을 보냈다.
“빠드득….”
매카시는 그런 채플린의 태도에 빠득 이를 갈면서도 계속 심문을 이어 나갔다.
“다음은… 증인의 증언이 있겠소이다. 올라오시오.”
“예!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생긴 젊은 배우 한 명이 매카시의 손짓에 따라 단상 위에 올라왔다. 끌려왔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를 알고 있는지 탄식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름은?”
“로널드 윌슨 레이건입니다. 각하.”
잘생긴 얼굴에 환한, 어쩐지 가식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건은 매카시에게 짧은 목례를 보냈다. 매카시는 이제야 마음에 드는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자리에 배우들 중 존재하는 반미국적인 인물들,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섰습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더 이상 이런 암적인 인간들이 스크린 뒤에 암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사람들은 레이건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터져 나올 때마다 환호와 야유와 박수를 보냈다. 그는 기분 좋게 수많은 사람들을 고발했다.
“돌턴 트럼보는 ‘모스크바의 휴일’의 각본을 써서 소련에 넘겼고, 그의 각본은 소련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리스 라프, 레스터 콜, 하워드 코흐…. 수많은 유명 영화감독, 각본가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들이 바로 할리우드 내에서 ‘스탈린을 위한 표’를 행사하는 이들입니다!”
“옳소! 옳소!”
“와아아아!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아라!”
군중 속, 매카시가 섞어 놓은 바람잡이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점점 더 험악하게 몰고 갔다. 찰리 채플린처럼 배짱이 두둑하지 않은 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수정헌법 제1조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닥치시오! 당신네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자들이 아니오? 그런 이들이 민주주의의 보호를 말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한 사내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코끝에 걸린 안경이 스륵 흘러내렸다.
광기 어린 이단심문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의 열광 속에서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박멸하고 ‘위대한 미국’을 수호할 것을 선언했다.
* * *
얼마 후 신문 한구석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렸다.
<해결 방법>
공산주의자 색출이 있은 후
연방보안관은 워싱턴 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국민들이 어리석게도
공산주의자에게 놀아나 정부의 신뢰를 잃었으니
이것은 오직 2배의 충성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국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국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끌려갔던 시인 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미국에서 다시 고향, 독일로 망명할 것을 선택하며 마지막 기고 글을 남겼다.
‘다른 국민을 선출하라!’ 그의 일갈은 매카시와 그 하수인들을 더 길길이 날뛰게 했다.
“우리야말로 국민이 선출한 정부다! 당신은 소련의 첩자가 아닌가! 당신의 조국은 어디인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사람마다 내놓은 대답은 달랐다.
몇몇은 미국에 남기를 원했다. 더 이상 세상을 떠돌며 다른 고향을 찾고 싶지 않았던 이들은 ‘젊었던 적 저지른 실수’를 참회하고 미국에 충성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몇몇은 그러길 거부했다.
“나는 미국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곳인 줄 알았소이다.”
아인슈타인의 선언은 미국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핵무기 투하 이후 충격을 받아 반핵운동을 펼치던 그는 매카시즘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고,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논쟁은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소련과 내통했소! 그가 빼돌린 내용이 소련에 가서 핵무기가 되었소이다! 그와 일단의 핵물리학자들이 미국의 자산인 지식을 도둑질해 소련으로 보내 주었소!”
알버트 아인슈타인, 줄리어스 오펜하이머 등 좌파 성향으로 유명한 핵물리학자들이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다.
스탈린이 직접 대전기 중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아인슈타인이 그걸 받고 다수의 핵물리학자들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논란을 접한 몇몇 학자들은 황급하게 유럽으로 다시 망명을 떠났고, 그것은 오히려 매카시의 주장이 더 신뢰를 얻게 할 뿐이었다.
“이 미국에서 모든 빨갱이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 아데노이드 힌켈: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찰리 채플린이 1인 2역으로 맡았던 배역의 이름. 대놓고 아돌프 히틀러의 패러디이다. 사진은 영화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