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243화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도래했다.
“서기장 동지! 서기장 동지!”
“어차피 우리가 생각한 그 결과일 텐데, 뭘 그리 급하게 말하나?”
“…예, 말씀대로입니다.”
소련 정보망은 미국 내에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이 전해 오는 정보만으로도 대선에서 맥아더의 승리를 점치기에는 충분했다.
“집계 결과… 58% 대 41%. 민주당의 대참패입니다. 월리스 전 대통령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유례없는 대패였다. 실제 역사에서 공화당이 이 정도로 대승을 거둔 것은 루즈벨트 이후로는 70년대에 가서나 가능했다.
공화당의 대승은 민주당이 삽질해서나 가능했다. 민주당이 기어들어 간 베트남 전쟁에서 빠져나오고, 중국과 데탕트를 이룬 닉슨이 지금 맥아더 수준의 대승을 이뤄 냈을 뿐이다.
월리스가 어지간히 인기가 없기는 한 것 같았다.
“전임자가 너무 대단했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트루먼은 전쟁이 더 늦게 끝난 바람에, 자기 손으로 일본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월리스는 전쟁을 혼자 마무리 지은 루즈벨트가 넘겨준 배턴을 받아야 했고, 임기 내내 준동하는 극우세력들과 싸워야 했다.
업적이란 업적은 루즈벨트가 모조리 가지고 갔고, 월리스는 나름대로 ‘동방 외교’에서 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언론과 정계의 하이에나는 그를 계속 물어뜯었다.
거기에 떨어지는 경제성장률도 월리스의 발목을 잡았다.
“솔직히 그 정도면 굉장히 잘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소련을 위해 좋아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못난 대통령은 아니었다. 경제성장률이 8%대에서 6%대까지 떨어지고, 실업률이 2%대로 올랐다고 ‘경제 파탄’을 일으켰다, 공황을 몰고 오는 중이라며 비난을 받다니!
여당인 민주당조차 사태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며 보수화되고 있었다.
“어쨌건 우리가 의도한 대로 되었군.”
몰로토프와 흐루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은 알고 있었다. 소련이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크루글로프는 FBI 국장 후버라는 필승카드를 적의 심장부에 꽂아 두고도 묵힐 이유가 있는지 갸우뚱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맥아더가 이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최소한, 승부수를 던져 볼 만은 했다.
“월리스는 분명 좋은 파트너지만… 그가 간신히 재선이 된다 해도 지금 같은 밀월 분위기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걸세. 우리가 아무리 저들의 경계를 낮추려 해도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전 세계적인 탈식민화는 결국 경계를 하게 만들 걸세.”
지금도 미국의 우파는 속속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독실한 복음주의자들, 아시아가 붉은 물결에 물드는 것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들, 서유럽과의 동맹이 미국의 패권에 필수 불가결하다 생각하는 사람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격차는 줄어들고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따라잡히기 전에 소련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들을… ‘진창(the Quagmire)’ 속에 처박아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 * *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것입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Make America Great Again! 맥아더의 취임 일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저 신임 대통령이 밝히는 앞으로의 비전에 주목했다.
과연 맥아더는 미국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 미국 국민들은 각자의 희망을 담아 대통령을 선출했다.
누군가는 빨갱이들의 마수로부터 미국을 구원해 달라는 의지를 담아 맥아더를 뽑았다. 또 누군가는 더 부유하고 강력한 미국을 원했기에 맥아더를 뽑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기의 바람을 새 대통령에 투영하고 있었다.
“미국은 우리 산업을 희생해 외국을 살찌웠습니다. 미국은 우리 군대를 희생해 외국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인의 부, 마땅히 미국인의 것이어야 할 그 부가 다른 국가들로 넘어가는 와중에 우리는 그저 두 눈을 멍하니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맥아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섭게 성장하며 미국의 패권을 위협해 오는 최강의 적. 몇몇은 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소련의 성장세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새로운 비전이 미국을 지배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맥아더 독트린’이라 불릴 미국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무역, 세금, 이민, 외교에 관한 모든 결정은 미국 근로자와 미국 가구의 이익을 고려하여 내려질 것입니다.”
‘맥아더 독트린’을 이야기할 때, 맥아더는 쾅 하고 단상을 내리쳤다. 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오직 미국의 이득이 모든 가치판단에 우선할 것이다!
도덕도, 국제법도 이익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그 모습은 수많은 나라 외교관들을 부르르 떨게 했다.
“그리고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은 단호히 세상을 위협하는 그 모든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특히, 공산주의에 맞서,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외교적인 무엇이든, 혹은 무력이든. 우리는 힘을 모아, 미국을 위대하게 지켜 낼 것입니다.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와아아아!! 만세! 만세!”
사람들은 단호히 미국을 위하겠다 선언하는 맥아더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민중은 각자 자기네가 원하는 것을 정치인들에게서 찾았고, 정치인들은 그 환상을 이용해 권력을 휘둘렀다.
맥아더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권력을 휘두를 참이었다.
* * *
“우리는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개입해야 하네. 이것만이 유럽의 우리 동맹을 지키는 한편,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길이네!”
국무성 관료들은 각자 짧게 탄성을 터트리거나 탄식했다.
‘개입’. 말은 쉽지만, 그 정도가 어디까지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현지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괴뢰정권이나 군정을 시행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공산당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겠다는 맥아더의 주장은 듣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당장 소련과 갈라선다면?
“하지만, 각하… 소련과 대립각을 세운다면….”
“미국이 파병할 수 있는 규모를 영국과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내게 보고하시오.”
“각하?”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맥아더에게 국무성의 관료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이번의 대승으로 의회 다수당이 되었다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식 파병 추진이라니?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디에 파병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과 협의한다면 위치는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인도에… 미군을 파병한다고?”
“하느님 맙소사….”
인도라니? 크기로 보나 인구로 보나 서유럽 전체와 비교해야 비등비등할 그곳에 미군을 밀어 넣겠다고?
벌써 수십만에 이르는 영국군이 빨려 들어가 허우적대는 그 진창 속에 개입이라니. 대체 맥아더 대통령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전쟁이 끝난 지 대략 4년. 집으로 돌아간 장병들은 고향에서 새로운 꿈을 꾸며 조국을 재건하는 데 여념이 없는데 이들을 다시 전쟁으로 끌어낸다니?
“안 되겠네. 가서 재고를 요청드려야겠군.”
인도 문제는 인도에서만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맥아더가 ‘공산국가’라고 퉁쳐 부르는 아시아 제3세계 블록이 모두 인도 전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극동의 대한민국부터 중동의 시리아까지, 인도의 독립이야말로 아시아가 진정 식민지에서 탈출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한목소리로 주장했다.
그런데 인도를 다시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군홧발 아래 짓밟기 위해 미군이 출정하는 것을 보면 그 나라들은 무어라고 생각할까?
소련의 영향력은 제3세계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으나 지배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이 제 손으로 대국을 망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이제 막 식민지를 벗어난 국가들이 미국을 뭐라고 볼 것인가!
지금껏 미국이 식민지들을 영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것은 다 위선이 될 것이다. 거기에 들인 외교적 비용과 노력은 한 치도 쓸모없는 헛짓거리가 될 것이고.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외교를 망쳐 놓을 수 있지…?”
어처구니가 없어진 외교관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동료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응수했다.
“한 사람? 아니, 국민들이 망쳐 놓았지.”
딴에는 그랬다. 주권자인 국민은 맥아더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며 그에게 이따위로 외교정책을 엎어 버리고 망쳐 놓을 권한을 주었다.
창밖의 노을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붉게 비치는 황혼이 어쩌면… 어쩌면 미국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고 관료들은 생각했다.
* * *
“그게 진짜란 말인가! 하하하하하! 이젠 됐어! 이젠 우리가 승리했네!”
“…잘됐습니다, 총리 각하.”
영국 내각은 나지막한 환호와 감탄을 내뱉었다.
미국의 신임 대통령 맥아더는 단호하고 불같은 태도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영국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밝혔다.
인도네시아 식민지가 사실상 독립한 이후로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들은 하나하나 탈식민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가장 거대한 영국령 인도 식민지에선 이미 몇 년째 게릴라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명목상 독립한 친영 성향 보호령들에서도 영국의 영향력은 점점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제3세계론자들, 자치론자들, 강경 반제국주의자들이 내각에 진입해 반영 정책을 밀어붙였고 친영 정책은 식민지인들의 반발만 샀다.
“휴… 정말… 정말 다행이군.”
이든은 고인이 된 처칠을 떠올렸다. 구대륙의 위기를 신대륙이 구원해 주리라 예측했던 처칠은 맞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치 독일의 준동은 영미소 삼국의 공동 대응으로 짓눌러 버릴 수 있었다. 미국의 막대한 생산력과 물자 지원, 그리고 엄청난 인력은 전 유럽을 손아귀에 쥔 나치 독일조차 간단히 꺾어 버렸다.
이제 소련이 배후에서 사주하고 선동하는 식민지 문제를, 영미는 공동 대응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미국은 물밑으로 구 추축국들과도 접촉해 군사적 합동전선까지 구축하려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이 제안 역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응답했습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라… 거참, 마음에 드는군.”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줄여서 NATO. 소련이 주도하는 EESC에 대항하기 위해 맥아더는 군사동맹을 제안했다. 자유주의 성향 국가들은 이제 나토의 깃발 아래 뭉쳐 소련과 공산세계의 안보 문제에 공동 대응하고, 또 식민지의 반란을 공동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미국이 가진 막강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다른 국가들에게는 몰라도 미국이라면 한 수 접고 들어갔고, 이제 미국이 주도한 군사동맹이 본격적으로 출범한다면? 인도의 반란분자들도 끽소리 못하고 토벌당할 것이다.
“하하하! 오늘은 축배를 드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