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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42화 (242/300)

# 242

242화

새해가 밝았다.

몽고메리시의 흑인들과 공산당원들은 추운 날씨에도 여전히 보이콧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지만, 백인들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며 오히려 더 힘을 얻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우리가 이깁니다!”

“저들의 발악을 보십시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히스테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백인 당국자들은 흑인들이 이런 대규모 운동을 조직한 것은 반드시 어떤 불순한 개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이콧 운동을 탄압했다.

흑인들은 길을 걸어 다니다가 보안관이나 경찰관이 총을 들이대고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을 몇 번이나 겪어야 했다.

“풀이 짓밟는다고 죽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저것에 가까웠다.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더 푸르게, 더 강인하게 자라나는 잡초와 같이. 함께하는 이웃들, 동지들이 있기에 보이콧은 계속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선물이 도착했다.

* * *

“이… 이게 다….”

“그렇습니다! 다 우리 차입니다!”

수십 대의 신형 자동차들이 길거리에 가득 늘어서 있었다. 보이콧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서툰 영어로 입을 연 소련 영사관 직원은 손에 든 종이를 술술 읽어 내려갔다.

“스탈린 서기장 동지의 친서입니다. 크흠, 우리 형제국 미국의 인민들에게! 여러분들의 용기 있는 투쟁에 대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소련은 모든 인민은 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평등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휘이이이익!”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대목을 영사관 직원이 읽자 곳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수와 환성이 잦아들 무렵 영사관 직원은 다시 서한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제의 나라, 미국에서도 그 점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당원들과 전우였던 이들이 통근에 고생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에, 미국이 지난 전쟁 중 그러했던 것처럼 소련 역시 차량을 원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두 나라 인민들의 우의가 영원하기를!”

미국이 렌드리스로 수천수만 대의 트럭을 보내 주었던 것처럼, 소련도 ‘미국인’들의 고난을 두고 보지 않겠다.

그리하여 이들 앞에는 수십 대의 승합차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차가 없어서 버스에서 차별을 당해야 했던 흑인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존 레닌 서기장은 소련제 차량 위에 올라서서 사람들에게 외쳤다.

“자! 이제 떨어야 할 자 누구입니까!”

“인종차별주의자들! 사업주들! 버스 회사들!”

“우리에게는 이제 무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무기가!”

물론 그것이 차량은 아니었다. 대중은 원래 세상을 바꿀 무기를 다들 가지고 있었다.

단결과 투쟁이라는 이름의 무기. 그 무기의 힘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레닌 서기장은 새로 인도된 차량의 열쇠를 두터운 손에 한가득 쥐고 한곳으로 걸어갔다.

“자, 받으십시오. 여러분들을 이제 우리가 고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산당에서는 해고된 택시 기사 열 명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저들이 운행하는 승합차들이 보이콧 참가자들을 태우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닐 것이다.

수십 대나 되는 차량들은 잘만 계획한다면 시의 흑인들을 대부분 태우고 돌아다닐 수 있는 수량이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버스 회사가 결국 인종차별을 포기한다면 흑인들의 교통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홀로 저 거대한 백인 권력체계에 맞서 싸우다, 이제 든든한 빽이 생긴 느낌이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하고 떠나가려는 소련 영사관 직원의 손을, 짐 파크스가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제게 감사하실 게 아닙니다.”

소련은 미국을 형제로 생각했다. 형제의 나라에서 인민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냥 두고 보아야 하겠나?

솔직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소련이 말하는 ‘형제의 나라’를 딱히 실감하지 못했다. 루즈벨트 대통령 서거 당시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선언 정도나 좀 실감이 났을까? 하지만 이 ‘선물’을 겪고 나자 소련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두 나라는 생각보다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미국인들은 소련에게 생필품과 식량을 팔았고, 소련은 이렇게 자동차부터 시작해서 여러 중공업 제품을 싸게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소련과 연계된 공산당은 계속 세를 불려가고 있었고.

이번 보이콧 운동을 계기로 몽고메리시의 흑인들 중 절반 가까이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양심적인,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백인 노동자들도 적잖게 공산당에 참여했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 백인들은 여기서 졌다고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다른 데서 치고 들어오겠지….’

그들이 지지하는 맥아더와 매카시가 올해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흑인들에게는 힘든 시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더 심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짐 파크스는 아내 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무기가 있었다. 단결, 투쟁, 그리고 승리의 경험이.

* * *

“고맙습니다, 서기장.”

[하하하, 별말씀을요. 사실 이것은 우리 일이기도 합니다. 소련 내에서도 크게 말은 나오지 않지만, 암암리에 인종차별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주 슬픈 일이지요….]

월리스는 피곤한 얼굴로 핫라인을 잡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스탈린 서기장은 소련 내의 ‘암암리에 일어나는 인종차별’을 가지고 걱정을 해야 했지만, 미국은 대놓고 일어나는 인종차별을 가지고 씨름해야 했다.

소련 정도면 이 시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진보적인 편이나 다름없었다. 국가수반이었던 레닌은 외조모가 칼미크인에 유태계 혈통으로 서구에서는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었고, 스탈린 본인도 조지아인이니 아시아계라 할 수 있었다.

아시아인이 국가수반이 된다…. 이런 것은 유럽의 ‘문명국’들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열등한 유색인종들이 어찌 감히!

“이걸 가지고 공화당 수구파들이 날뛰고 있지만, 그쪽은 제가 어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도 흑인 표심 때문에 대놓고 차별을 주장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원래 링컨의 당으로 강력한 흑인 지지세를 자랑하던 공화당은 루즈벨트 시대에 흑인 표심을 대부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략 2:1 정도로 민주:공화를 지지하던 흑인들은 맥아더와 매카시의 폭주를 보며 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몽고메리 버스 사태를 계기로 확 세력이 커진 공산당도 있었지만, 공산당은 미국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하기로 당론을 정한 상태였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민주당 행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한 소련의 지령이 있었겠지만, 그걸 그냥 무시할 만큼 민주당의 상황이 좋지도 않았다.

[저는 월리스 대통령이 대단히 힘든 시기에 미국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기는 했습니다만, 잘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짜 잘했더라면 제 지지율이 이렇지는 않았겠지요! 하하하하….”

[그 점은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소련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만….]

하지만, 그 말 뒤에 생략된 것이 무엇인지 월리스는 알 수 있었다.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맥아더, 빨갱이 사냥에 미친 매카시가 대권을 쥔다면 미국은 진정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자기네들을 먹여 살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쟁을 주장하는 인간들이란! 소련이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교역량은 미국 경제의 거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몰락해 가는 영국이나 중화민국은 끝끝내 놓지 못하겠다면서 소련을 거침없이 적대하고자 하는 자들이 경제를 얼마나 아는지, 월리스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사실상 소련이 주도해서 끌어가고 있는 세계보건기구 사업은 그럼 어찌할 것인가? 그뿐이 아니다. 소련의 에너지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 투자한 자금은 얼마인가! 소련에 수출하기 위해 늘려 놓은 공장 설비들은 다 어찌할 것인가!

“그 점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월리스는 문득 깨달았다.

‘포기하면 편하지 않을까?’

이렇게 아등바등하면서 무언가를 바꿔 보려 해도, 백날 말하는 것보다 한 번 겪어 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맥아더의 당선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대중이 맥아더를 겪어 본 후 질리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최소한, 월리스는 그가 틀렸다는 점 하나만큼은 확신하고 있었고, 맥아더가 불러올 파국이 너무 거대하지만 않다면….

한번 정점에 올랐다가, 그 일당들과 함께 무너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운을 ‘겨우’ 대통령 혼자서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고 월리스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협력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소련은 조약을 먼저 어기지 않습니다. 그 하나는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듣던 중 다행입니다.”

미국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면, 소련은 결코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 그 보장에 월리스는 차라리 고마워졌다.

“아무튼 이제… 언제 또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대선에서 패배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면, 이 핫라인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련 서기장이 별 의미 없는 미국인 떨거지와 굳이 시간을 내서 대화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스탈린은 껄껄 웃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퇴임 후에 같이… 이것저것 해 보면 좋을 텐데요.]

“예?”

[나는 개인적으로 퇴임 후에 몇 가지 공공사업을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예컨대… 빈곤지역에 집을 짓는 사업이라든가….]

월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던 강철의 독재자가 퇴임 후를 고민하다니?

이것을 말해 주는 것부터가 국가기밀을 까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 내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특급 중의 특급 정보인데, 그걸 이렇게 말해 주다니?

[이건 비밀로 해 주시죠. 내가 물러날 것을 계획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불필요한 잡음이 생길 수도 있으니.]

“물… 물론입니다.”

알려 줘 봐야 맥아더 같은 놈이 써먹을 것을 생각하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월리스의 가슴속에서는 새삼 존경이 피어올랐다. 그 누구도 스탈린을 감히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독소전쟁에서 보여 준 지도력, 공업화의 신화적인 성공은 그 믿음을 공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인 루즈벨트마저도 스스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4선까지 밀어붙였는데… 독재자인 스탈린이 자기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니?

[어떻습니까? 집 짓는데 관심이 있으십니까?]

스탈린 서기장은 이제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유혹하기까지 했다. 월리스는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나쁘지 않군요. 아니, 좋습니다! 하하하하하하!!”

* * *

아마 스탈린은 지미 카터 같은 ‘인권 전도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쌓아 온 이미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백만 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었으니.

물론 소련의 도덕적 우위를 선전하는 살아 있는 프로파간다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권력자가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돌아가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라….

내가 생각해도 어쩐지 감탄이 나왔다. 이 정도면, 향후 권력교체도 좀 더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을까? 워싱턴처럼, 재선까지만 하고 물러나는 전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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