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화
식민지 위기는 안 그래도 뒤숭숭한 영국 정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런던에서는 연일 더 많은 배급과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 그리고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식민지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충돌했다.
“대영제국 만세! 신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인도는 영원히 영국의 것이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보라! 언제까지 전쟁으로 젊은 생목숨을 낭비할 것이냐! 제국주의자여 물러가라!”
경찰들은 과격한 두 시위대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며 서로 벽돌과 각목을 휘둘러 대는 이들을 제지해야 했다.
“그, 그만두시오! 그만!”
휘이이이익! 호루라기를 불고 경찰방패로 막아 냈어도 자기 공격이 막힌 것을 본 시위대는 더 힘을 주어 돌을 던졌다.
누군가의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누군가는 이가 부러졌다. 바닥에 넘어졌다가 성난 시위대의 구둣발에 짓밟힌 이도 있었다. 런던 중심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충돌이 벌어졌고 전국의 경찰들을 차출시켜 모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아직 힘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식민지를 포기하고 섬에 다시 틀어박히라고?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우리는 수백 년간 그 땅을 지배해왔는데 인제 와서 버린다고?”
보수층들은 여전히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에 수백 년간 영국이 이루어온 위업의 결정체는 바로 식민지였으며, 포기하고 다시 섬에 틀어박히는 것은 거대한 후퇴였다.
백년전쟁에서 패배하고 대륙의 영토를 모조리 상실한 무능왕 존 시절의 악몽을 영국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 거대한 대륙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그저 관망할 수밖에 없는 자그마한 섬나라.
굳이 보수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노동당 지지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영국! 제국 만세! 만세!”
“우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나라지. 암! 식민지 독립이라니 어림도 없지!”
여전히 옛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는 고달픈 노동자들의 아편으로 작용했다. 위대한 나라라는 인식은 비참한 현실을 잊게 해 주었고,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 꿈을 품게 해 주었다.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더 목소리 높여 정권의 편을 들었다. 그래야 이전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 자기네들이 저지른 짓 때문에라도 그들은 더 열심히 제국의 영광을 부르짖었다.
마지막으로 언론은 처칠 시절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
[대공황의 악몽? 식민지 블록의 유지는 필수불가결]
[파탈리푸트라 전투의 대승! 식민지 반란 토벌 직전]
언론은 전쟁이 끝나면 대공황이 다시 닥쳐올 수도 있을 것처럼 선전의 나팔을 불어 댔다. 미국과 소련은 역대급 호황을 맞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만이 정체 중인 것은 싹 숨겨 놓고서.
그런데 식민지들마저 독립한다면? 독점적인 판로가 막힌 영국은 결국 몰락할 것처럼 언론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들만 해 댔다.
식민지를 포기하고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선택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 원조는 마치 독이 든 사과처럼 미국에 종속되는 길로 치부해 버렸다.
거기에 마치 당장에라도 반란군을 끝장 내버릴 수 있을 것처럼 선전해 대니 대중은 불만을 품으면서도 위에서 하는 말처럼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영국 정권은 불안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언론과 배급으로 불만을 무마하고 흘러간 옛 제국의 영광으로 대중을 마취시키며.
하지만 진짜 폭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우리 형제국들의 우호와 협력이 영원토록 증진되기를 바랍니다. 자, 건배!!”
“건배!”
와하하하하 하는 커다란 웃음과 홀 내를 진동시킬 만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오래간만에 커다란 잔에 술을 가득 채워 들이켰다.
물론 러시아인들이 늘상 물처럼 처먹는 40도가 넘는 독주가 아닌, 프랑스산 최고급 와인이었지만. 파티장의 이곳저곳에서 프랑스산 샴페인이 펑펑 터지며 이 자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유럽 에너지―철강 공동체 만세! 만세! 우리의 단결이 영원하기를!”
“우라! 우라!”
“하하하하! 만세!!”
새로이 출범하는 <유럽 에너지―철강 공동체>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첫 출범을 화려하게 기념하고 있었다.
가입한 국가만 해도 소련,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북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브란덴부르크, 라인란트, 프랑스까지 해서 13개국.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 준비 중이었고 덴마크가 옵저버로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 외에도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물밑에서 가입의사를 타진 중이었으니, 명실상부 전 유럽을 아우르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었다.
“더 효율적이고 값싼 에너지 공급과 철강 생산의 경제화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주셨습니다. 함께하는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모두 협력할 수 있으면 합니다. 우라! 우라! 우라!”
“우라! 우라!”
이 모임을 주최한 호스트인 루마니아의 명목상 국가원수인 ‘붉은 국왕’ 미하이 1세는 잔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 각국의 늙다리 지도자들이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젊고 잘생긴 이가 나와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감탄하면서도 환호했다.
“와아아아! 만세! 만세!”
물론 그는 이렇게 나와 얼굴만을 비춘 후 다시 물러갈 것이다.
비운의 미남 국왕은 외교적으로 이용하기 좋은 카드였고, 루마니아 공산당은 전폭적인 협력이 가능한 왕가를 굳이 탄압하지 않았다.
‘붉은 국왕’이라는 별명,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눈빛까지. 매력이란 매력은 한 몸에 갖춘 미하이 1세는 각국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거, 나보다 저 친구가 인기가 많군그래? 나도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이었는데….”
“크흠, 한마디 전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서기장 동지는 지금도 미남이십니다.”
“그걸 왜 전해? 농담일세 농담. 옛날이나 미남이었지 지금은 다 쭈글쭈글한 늙은이고.”
스탈린도 젊었을 적에는 야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미남자였다. 미하이 국왕처럼 세련되고 우수에 찬 얼굴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몰로토프의 좀 과한 아부도 오늘 들뜬 나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유럽 에너지―철강 공동체는 더 높은 단계의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우리 소련은 이제 유럽의 산업생산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실제 역사의 유럽연합 역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로 시작하여 90년대에 유럽연합으로 발전했다.
우리는 단순히 석탄과 철강뿐만 아니라 다른 에너지 자원들(석유나 가스) 역시 생산관리 및 협력대상에 포함하기 위해서 ‘에너지’ 공동체를 표방했을 뿐, 향후의 목적은 비슷했다.
“미국이 이 자리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참 아쉽군….”
“그… 그렇습니까?”
“이제 유럽 내에서의 전쟁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더 이상 전쟁을 바라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말입니다. 각국의 철강과 석탄―석유―가스 생산을 총괄하는 상위 기구로서 우리 공동체는….”
이번엔 토레스 서기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공동체의 목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에너지―철강 공동체는 각국의 생산을 관리할 상위 기구였다. 이제 에너지산업과 철강산업은 국가 간 통합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변모할 것이다.
예컨대, 알자스―로렌에서 생산된 광석들은 북이탈리아에 가서 북독일에서 생산한 석탄과 함께 강철이 되어 유고에 공급될 것이다. 이런 통합은 효율성의 제고를 가능케 했고, 또 전쟁을 불가능하게 했다.
더 많이 강철을 생산해 군수물자 생산을 늘리려 해도, 다국적으로 관리되는 철강생산은 전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유럽 국가들은 군수능력을 사실상 거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처럼 독자적으로도 막대한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서로에게 엮여 있는 에너지와 철강공급은 상호 의존을 통해 전쟁을 불가능하게 했다.
“뭐, 미국은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 이 사업에 참여하니 괜찮겠지.”
미국은 어차피 유럽 국가들과 경제통합을 하기에는 거대한 대서양으로 갈려 있기에 결국 참여를 거부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은 따로 경제협력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 그 시베리아 개발 컨소시엄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지. 하하하하, 미국 친구들 돈 덕분에 참 빨리도 진행되고 있지. 안 그런가?”
‘시베리아 개발 컨소시엄’은 말 그대로 시베리아를 개발하기 위한 다국적 사업이었다.
시베리아에 묻혀 있는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 특히 천연가스는 막 그 효용성을 인정받고 있었고, 가스전을 개발하고 파이프라인을 깔기만 하면 전 유럽과 아시아에 공급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파이프를 깔고 공급할 인프라가 필요했고.
유럽 에너지―철강 공동체 소속 국가들, 미국, 대한민국, 그리고 만주인민공화국이 해당 사업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예 그렇습니다. 미국인들은 참 무지막지하더군요.”
미국은 더 값싸고 더 효율적인 에너지에 막 눈뜨고 있었다. 시베리아에 묻혀 있는 막대한 자원 개발에 참여하고 지분을 내주겠다는 소련의 제안은 미국의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을 벌떼처럼 끌고 올 수 있었다.
수억 입방미터의 가스와 수천만 배럴의 석유, 그리고 수천 톤의 귀금속들까지! 여기에 정치적인 의미까지 더해졌다.
“소련이 가스 공급으로 유럽 에너지 경제를 장악한다면, 그들이 에너지를 가지고 온 세계시장을 뒤흔드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 것입니다!”
“에너지 공급은 현대 문명과 동의어입니다. 소련이 에너지 공급을 독점한다는 것은 현대 문명을 소련 손에 넘겨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뭘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소련 주도하에 출범하는 유럽 에너지―철강공동체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점점 유럽이 소련 세력권 안에 묶여 가는 것은 그들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소련이 그 에너지의 원천이 될 시베리아를 서구 자본들에게 개방하고 공동투자를 제의하자 이 태도는 180도 뒤바뀌었다.
“무조건 저기 참여해야 합니다! 저… 검은 금광을 손에 넣지 못하면 미국은 아메리카에 고립되게 됩니다!”
이러나저러나 소련으로서는 이득이 되었다.
인프라를 놓고 ‘현재 개발되는’ 유전과 가스전의 지분을 내준다 쳐도, 향후 추가적으로 개발되는 가스전은 더 비싸게, 간섭 없이 팔아먹을 수 있어 에너지 자원을 몽땅 뺏기는 꼴은 나지 않는다.
반면 소련의 독자적인 능력으로는 수십 년은 걸릴 시베리아 개발이 국제자본의 개입으로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미국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철도를 놓을 때처럼 중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수입해 시베리아 개발에 투입했다.
이제 막 장개석의 ‘남중국’, 즉 중화민국과 갈라서 독자적인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주은래의 ‘북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은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을 파견해 외화를 벌어 갔다.
또, 미국인이 막대한 돈을 소련에 투자했다는 것은 두 국가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향후 맥아더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소련 가스전에 수억 달러를 투자한 미국인 기업가들이 과연 소련을 맹목적으로 적대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수만 킬로미터 단위로 깔리기 시작한 가스와 석유 파이프들은 이제 검은 황금기를 전 소련에 불러오기 시작했다.
파티장의 불이 어두워지고,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수십 개의 유전에서 불꽃이 솟구치고, 수천 개의 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떨어지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그 장엄함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번영의 불꽃입니다 여러분! 우라! 우라! 형제애와 번영이여!”
“우라! 우라!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