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233화
“으음… 이제 이게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그래? 한 잔 더 타줄까?”
“아, 하하. 괜찮아 카티아. 당신도 아침 먹지 그래?”
이제 제법 장교로 관록이 붙은, 즉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니콜라이는 한 손에 큼직한 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문을 넘겨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마시는 사워크림 가득한 아이스 소비에트 때문일까? 똑같이 마시는 카티아는 저렇게 날씬하고 날렵한데, 어쩐지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에 니콜라이는 자신의 배를 문득 만져 보았다.
“….”
뭉실뭉실하게 잡히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고뇌하며, 그 고뇌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니콜라이는 다시 신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영국군, 인도에 5만 명 증파 결정]
[시베리아 개발 다국적 컨소시엄 출범]
[세계보건기구 발족. 첫 사업으로는 천연두,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통한 박멸 선언.]
으음, 그렇군 따위의 감탄사를 내며 니콜라이는 신문을 쭉 읽어 내려갔다.
예전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찾아서 생각해 내며 낑낑거리며 읽어야 했겠지만, 이제는 이런 어려운 글을 읽는 것도 가능해졌다.
다 카티아 덕분이다. 그에게 찾아온 천사. 니콜라이는 아이스 소비에트 잔과 신문을 내려놓고 아침 토스트를 굽는 카티아에게 다가갔다.
“어머, 당신….”
“사랑해 카티아.”
니콜라이가 와락 껴안자 카티아는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도 그녀는 말괄량이 악동처럼 니콜라이의 허리를 쿡 찔렀다.
“헤헷, 누가 보면 당신이 임신한 줄 알겠어.”
“그, 그러게….”
그렇게 땀을 삐질대면서도 니콜라이는 카티아의 배를 쓰다듬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깡촌 출신 무지렁이가 이제는 당당히 프룬제 군사대학에 다니는 소령님이 된 것보다도, 이제 아빠가 된다는 것이 더욱 경이로웠다.
그는 수십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를 또 했다.
“아들일까? 딸일까?”
“당신도 참. 그 말 여섯 번만 더 하면 천 번째인 것 알아?”
“그… 그래?”
“아니, 사실은 더 될지도 몰라. 하하하하!”
어느 쪽이든 좋았다. 일찍 죽은 동생을 제외하면 형제가 없었던 니콜라이는 내심 북적북적한 대가족을 원했다.
옛날처럼 굶으며 자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매달 그에게 주어지는 월급도 적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카티아는 엉겨 붙는 니콜라이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막 구운 토스트에 미제 땅콩버터와 직접 만든 산딸기 잼을 듬뿍 발라 주었다.
“난 당신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
“난 당신 닮은 아들이면 좋겠는데?”
또 몇 번이나 반복한 이 대화를 하면서 부부는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카티아는 요새 계속해 온 뜨개질을 하며 니콜라이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당신은 아들이면 좋겠다면서 왜 그건 분홍색으로 하는 거야?”
“아니면 다시 떠서 내가 입지?”
“하하하하하!”
카티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명랑하고 바지런했다. 원래는 간호병으로서의 경력을 살려 추가적인 교육을 이수한 후 간호사로 일하려 했지만, 결혼을 하고 또 금방 임신을 하는 바람에 집에만 있게 되었지만 그녀의 부지런함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매일 뜨개질을 해서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한 옷가지를 만들고, 또 어디선가는 옷감을 사 와 휑한 집안을 꾸밀 커튼이며 식탁보를 만들었다. 그녀의 자수 실력을 보며 간호사가 아니라 외과의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 니콜라이는 옆구리를 쿡 찔리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가족은 어려울 텐데?”
니콜라이는 어쩐지 아쉬웠다. 카티아는 똑똑하고, 착하고, 싹싹하고, 아무튼 이 세상의 좋은 점이란 좋은 점은 다 가져다 뭉쳐 놓은 것만 같았다.
사실은 허당인 자신보다 차라리 그녀가 인민영웅에 더 적합할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는 동료 장교들의 관사에 가게 되면, 특히 독신자들의 집에 가게 되면 개판인 꼴에 깜짝 놀랐다. 빨지 않은 옷가지, 먹다 남은 음식물, 그리고 대체 원래 뭐였는지 모를 쓰레기들이 작은 흐루숍카 안에 가득했다.
니콜라이와 카티아의 아늑한 보금자리와는 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그를 구원한 인민영웅을 다시 한번 사랑스럽게 바라본 니콜라이는 출근 시간이 다 된 것을 깨닫고 또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카티아, 그럼 나 다녀올게?”
“잘 다녀와!”
쪽, 그의 뺨에 짧은 뽀뽀를 한 카티아는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 * *
프룬제 군사대학에서는 니콜라이와 같은 장교들이 여럿 수학하고 있었다.
물론 니콜라이처럼 현지임관 출신들은 몇 없었다. 대전 말에 막 소위, 중위가 된 병사 출신들은 대위, 소령이 교육을 받는 프룬제 군사대학 입학요건에 미달했고, 유능한 자들은 일선에서 구르고 덜 유능한 이들은 전역을 했다.
대부분은 정규 장교교육을 받아 임관하고 승진한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니콜라이가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다.
“어! 영웅 동지! 하하하하하!”
“하, 하하… 아, 마카로프 대위… 좋은 아침입니다.”
오히려 자꾸 영웅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지.
현지임관 출신으로 순식간에 소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나게 유능하거나, 엄청난 군공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실전들을 겪어 본 장교들 중에서 그 끔찍한 전장을 헤쳐 나와 순식간에 승진한 니콜라이를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하, 요새도 참 얼굴이 좋으십니다. 사모님이 만들어 주시는 사과 파이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또 놀러 가도 되겠습니까?
“예! 얼마든지요. 카티아도 항상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카티아는 시커먼 독신 장교들에게 항상 인기가 높았다. 사과나 배, 호두 파이를 맛있게 구워 주면 제대로 된 음식이라곤 KFC의 치킨버거밖에 먹지 못하는 독신 장교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대곤 했다.
물론 카티아가 장교들에게만 인기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급 장교들의 부인들도 명랑하고 싹싹한 데다 집안일에 능한 카티아를 딸처럼 귀여워했고, 동네 꼬마들도 상냥한 ‘카티아 누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내 자랑이 입에서 근질거렸지만 애써 참아 낸 니콜라이는 헛기침을 하며 강의실로 향했다.
* * *
프룬제 군사대학은 총참모부에서 일할 장교들을 키워 내는 데 방점을 두었다. 여기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장교들은 ‘보로실로프 고급군사학교’로 가서 장군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혹독한 경쟁을 거쳐야겠지만.
“최근 주코프 원수의 군제 개혁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여….”
소련군은 요사이 한 차례의 격변을 거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정치국은 비대하게 팽창했던 군대를 감축시켰다.
그리고, 이 감축 과정은 그동안 안보상의 이유로 손대지 못했던 급진적인 군제개혁을 실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소련은 더 이상 직접 육상 국경을 맞댄 적국이 없게 되었다. 있다면 지난 전쟁에서 중립인 양하며 나치 편을 들었던 스웨덴 정도?
주코프 원수는 이 기회에 ‘새로운 시대의 전쟁’을 개혁의 모토로 내세우며 군부를 효율화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모든 군단편제는 해체되고, 더 경량화되고 기동화된 여단 및 사단 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군단편제는 강력하지만 둔중했으며, 공군의 막강해진 파괴력으로 인하여….”
“쩝….”
새 시대 군대는 결국 ‘핵폭탄’의 위력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고고도에서 날아온 폭격기 한 대에 도시가 찢겨 나가고 대군이 전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든 편제는 기동성과 생존성을 위주로 개편될 수밖에 없었다.
공군장교라면 가득 자부심에 부풀었겠지만, 어쨌든 기갑장교인 니콜라이에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분쟁에 핵폭탄을 펑펑 쏴 댈 수는 없는 법. ‘전 세계에서 벌어질 국지적, 기습적, 만성적 충돌을 제어하기 위해서 육군이 필요하며, 그리하여 육군은 경량화될 수밖에 없다’가 강의의 요지였다.
수백 대의 육중한 부됸늬 전차들을 끌고 가서 파쇼들의 방어선을 박살 내던 시대는 갔고 공지합동이니 제병협동이니….
니콜라이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강의 내용에 집중했다. 후배 장교들의 앞길이 그에게 달려 있었다.
학장 동지는 그가 입학했을 때, 학장실로 그를 조용히 불러다 놓고 이야기했다.
“자네는 소비에트 장교의 신세대이네.”
니콜라이는 그때의 대화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다.
“상부에서는 결정을 내렸지. 장교들은 유능해야 하면서도, 너무 유능하고 전문적일 경우 외부에서 손댈 수 없어지는 문제가 발생하네. 그리고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고여 버려 견제할 수 없어지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어.”
얼마나 높은 곳에서 이야기를 한 것인지, ‘상부’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 학장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별 하나를 달고 있는 장군이 그럴 정도라면 누구일까? 체르냐홉스키 대장? 주코프 원수? 혹은… 스탈린 동지?
“그리하여 상부에서는 자네와 같은 병사 출신의 장교들이 더 많이 고급 군사과정에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했네. 사관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엘리트들이 아니라. 자네 같은 인민영웅… 하하하, 왜 그런 표정을 짓나?”
“아, 아닙니다!”
“겸손하기도 하군. 아주 좋아. 아무튼 자네와 같은 영웅적인 초급장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윗선에서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네. 꼭 당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영웅 동지.”
“감사합니다! 학장 동지!”
니콜라이는 벌떡 일어서며 경례를 붙였고, 장군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날 이후 니콜라이의 생활은 쉬울 수가 없었다.
정규 군사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에게 당연히 그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휙휙 지나가는 프룬제의 교육은 너무나 어려웠다.
나름 똑똑하고 유능한 이들을 뽑아 그중에서도 잘난 이들을 선발한 고급군사과정에 있는 장교들은 ‘운으로 들어온’ 니콜라이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래서 니콜라이는 도저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끄응… 영차.”
강의가 끝나자 무거운 가방을 들쳐메고, 니콜라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수십만 권의 장서를 갖춘 프룬제 군사대학 도서관은 그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어제 배운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오늘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내일 본 내용을 예습하다 보면 그의 평범한 머리에도 언젠가는 이 막대한 지식을 다 욱여넣을 수 있겠지.
“또 오셨습니까?”
“아, 예. 하하하하!”
“페트로프 소령님처럼 매일같이 오는 분은 하나도 없는 것 같군요. 다른 분들은… 하하….”
젊은 사서는 낄낄대며 다른 장교들의 뒷담을 했다.
“대부분이 다 위로 올라가려면 연줄이 중요하다고 친목에 정치질에… 윗선에 줄 대려는 꼬라지를 보면 참 기도 안 찹니다.”
“그래도 기본은 되어야지요. 기본도 안되어 있는 장교가 위에 있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래서 소령님이 좋다니까요? 하하하하!!”
니콜라이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사서는 겸양으로 받아들이면서 껄껄 웃었다. 그는 니콜라이가 정말 마음에 드는지 도서 대출이나 복사 같은 것에 늘 편의를 봐주었고, 어떤 책이 중요한지를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나중에 사모님 파이나 좀 가져다주시죠.”
부하들을 죽이는 장교가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했다.
그래도 죽을지 몰라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집에 보내기 위해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기 위해선 그가 노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