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231화
“미국은 우리 소련에 비해 몇 배 정도의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예?”
“말 그대로네. 미국과 소련의 격차는 얼마나 클 것으로 추정되나?”
정치국원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략 50% 정도 크지 않을까 추정합니다. 서기장 동지.”
“그만큼은 아니고 20% 정도가 아닐는지… 종합적인 국력으로 보았을 때는….”
다들 제각기 낙관적인 주장들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실제와는 떨어져 있었다.
벌써 1946년도 끝나가는 와중에 경제데이터를 분석하고 발표할 흐루쇼프는 대충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의도를 파악하고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 대충 우리가 절반을 넘어서서 60%에 가까워졌다고 집계가 되었다만….”
“예?? 그 정도입니까?”
“그렇네. 아직 한참 멀었어 이 사람들아! 하하하하!”
물론 공산권, 즉 구 독일―프랑스―북이탈리아―동유럽을 다 긁어모으면 미국과 비벼볼만 할지도 몰랐다.
잠재적 우군인 인도와 북중국, 그리고 중동 국가들까지 어찌어찌 더한다 치면 대등했고.
하지만 미국 역시 전 세계에 수많은 동맹국들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 소련의 국력은 미국과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 밖으로 보이는 것은 거의 대등할 정도라고 생각해 조금 줄여 말했습니다만, 아직 한참의 격차가 있었군요.”
“저희도 격차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격차가 아직 있어 보여야 한다는 것이네. 미국이 최대한 우리를 과소평가하게 해야 하지.”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미국은 우리의 좋은 우군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적수였다. 계속 미국과 화친하는 정책을 펼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야 미국에 친소련 성향의 월리스 정부가 들어서 있었으니 괜찮았지만, 여론조사는 계속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내용을 아는 이들은 다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 대선을 위한 경선 레이스가 슬슬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그… 그 또라이 새끼가 또 돌아온다는군.”
“우웩….”
보로실로프가 눈치 없이 구토하는 제스처를 하다가 눈총을 받자 다른 정치국원들이 킬킬댔다. 꼭 적대국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자들이라 정치국원들은 다들 맥아더와 매카시를 혐오했다.
백신처럼 국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 매카시의 프로파간다나, 장군 주제에 문민통제를 무시하고 막 나가는 맥아더를 좋게 보는 사람은 식자층에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 그렇게 다 양식 있는 것은 아니었다.
* * *
“주님께서는 사악한 소련과 손잡는 정부를 벌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맥아더 장군 만세!”
“할렐루야! 아멘!”
미국 표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력 중 하나는 바로 독실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소위 ‘빨갱이들이 주물럭거리는’ 현 정부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소련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출신의 신자들 기독교도들 역시 미국의 주류 종파들과는 달랐으나 반소 감정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공화당의 챔피언으로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맥아더―매카시는 이들을 최대한 아군으로 삼으려 했다.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미국은 안전할 것입니다. 저기 워싱턴을 사악한 빨갱이들, 무신론자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여러분들에게 이 성스러운 나라 미국의 주권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저는 매카시 후보님 말씀대로 우리 지미에게 백신을 하나도 맞히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지미는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다 주님의 도우심 덕이죠.”
매카시가 주최한 지역 행사에서는 이런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집회를 하며 어떻게 지역을 ‘복음화’시킬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각종 생활 의제며 지역 안건들이 오가곤 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깜둥이들, 빨갱이들의 사악한 음모인 백신 접종, 자꾸 떨어질락 말락 하는 동네 집값이나 학교 문제 등.
“그 깜둥이 놈들이 전쟁에 나갔다 왔답시고 설치는 꼴들이란….”
“하! 그놈들은 전투가 아니라 뒤에서 청소나 한 주제에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용사인 줄 압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적엔 깜둥이들은 총에 손을 대지도 못했는데….”
이들의 불만이 하나하나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집회장은 순식간에 ‘타락한 미국 사회’를 성토하는 현장으로 바뀌었다.
“깜둥이들은 저들이 백인과 똑같은 인간인 줄 알고 나댑니다. 그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여야 합니다!”
“이게 다 소련의 사주 때문입니다. 그 끔찍한 스키타이 놈들이 세계를 황화시키려고 수작을 부렸습니다!”
“냄새나는 중국 놈들도, 야만적이고 비열한 잽스 놈들도 다 아시아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중국에 대체 왜 돈을 그렇게 퍼다 줬는지….”
“자! 자! 다음 대선에서 공화당을 찍으시면 여러분들의 그런 불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맥아더를 대통령으로!”
집회에서는 다시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 나왔다.
“맥아더! 맥아더! 매카시! 매카시!”
“와아아아아! 만세! 만세!”
이런 분위기는 남부의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물론 남부에서는 미국의 대내적 정책에 불만을 가졌고, 도시에서는 보수층들이 외교노선에 불만을 가지는 식으로 불만의 방향은 다르긴 했다.
“영국이 더 이상 식민제국으로서 열강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면 대체 미국은 누구와 함께 소련을 상대할 것입니까?
“월리스 행정부는 소련의 기만정책에 놀아날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소련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도시 상류층들은 그렇게 월리스의 노선을 씹어 댔다. 영국의 귀족적인 문화를 동경하거나, 유럽 상류층들의 삶을 따라 하던 부호들은 당연히 대영제국을 도와야 한다며 미국의 불개입 노선을 비판했다.
“식민지 토인들은 아무리 해도 가르칠 수 없는 작자들인데, 그자들을 선도해 주던 영국이 물러난다면 우리가 그 짐을 떠안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황화론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저 끔찍한 동방 야만인들이 세상을….”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황화론을 이야기하며 소련이 문명화된 세상을 끔찍한 아시아―볼셰비즘 밑에 종속시켜 버릴 거라 주장하기도 했다.
식민지들이 독립한다 해도 그들이 모조리 소련 손안에 들어가 버리면 어쩔 것인가?
막 독립한 인도네시아에 친소 공산당과 민족주의자 연립정권이 세워지고, 중동에 연쇄적으로 친소국가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보수적인 일부 식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월리스의 외교정책은 총체적인 실패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X, 즉 미 국무성의 조지 케넌이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소련 행동의 기원’(통칭 ‘긴 전보’)은 이런 논쟁들을 폭발시켰다.
소련을 지정학적 핵심지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 정계를 강타했고 ‘유약하고 소심한’ 월리스는 대통령에 부적합하다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국무성이며 행정부 내에 수백 명의 빨갱이들이 설친다는 매카시의 주장은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 * *
“환장할 지경이로군….”
“각하….”
월리스는 국무회의에서 머리를 잡고 신음했다. 공화당의 프로파간다로 그의 지지율은 점점 하락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월리스로는 선거에 패배할 것이라며 다른 후보를 찾기 시작했고, 공화당으로의 추가이탈까지 말이 나오는 판. 백악관은 도무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가장 크게 비판받는 친소 외교노선을 버려야 하는가?
“제기랄, 여기서 우리가 각을 세우면 식민지들이 완전히 다 기울어져 버릴 것을 모르고 저러는 것인가? 저놈들, 진짜 당선되고 나서 그럴 생각인가?”
‘빨갱이들에게 놀아나 미국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을 하며, 소련과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자살골이나 다름없었다.
식민지 정권들이 친소를 표방한다 해도 소련과 미국이 손을 잡고 친구처럼 잘 지내는데 미국을 적대할 일이 없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에 손을 내밀고 협력을 요청했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영국을 도와 인도를 침공하고, 제3세계에서 패악질을 부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한국도, 유고도, 얼마든지 우리와 협력하고 있는데….”
저들은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과 친하게 지내는 국가들은 오히려 소련이라는 거대한 중력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미국에 접근했다.
극동에서는 한국이, 동유럽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중동에서는 쿠르디스탄이나 팔레스타인 같은 국가들이 미국에 외교적으로 ‘더 높은 단계의 협력’을 타진했다.
해당 국가들은 국내 대자본들을 국유화했을지언정,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 어딘가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미국을 상대로 무역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다.
정치적으로 소련의 위협을 부르짖는 것은 항상 정치인들이었다. 오히려 기업인들은 해당 국가의 핵심 산업시설들을 홀라당 집어 먹고 싶어 하는 거대 트러스트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외교노선을 좋아했다.
당장 소련에 수출 제한을 걸고 말려 죽이려 한다면 미국 국내산업들이 고사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영국 이 미친놈들은 대체 왜 이따위로 나오는 건가!”
참을성 많은 월리스는 결국 국무회의 안건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엄청난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 쏟아부은 게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래도 파시스트 놈들하고 손을 잡아? 국제사회 눈치라는 것을 안 보는 건가?”
아직도 19세기인 줄 아나? 월리스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씩씩댔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정당성과 명분이 중요했다. 민족자결이라는 원칙하에 식민지들이 하나하나 독립을 요구하는데, 그것을 저지하고 수탈을 계속할 근거는 참으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미국은 그래서 평화적으로 상품을 팔아먹고, 친미 정권을 세워 간접적인 통제를 하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영국은 직접적으로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놓아주면 결국 미국이나 소련 쪽으로 기울어지려 할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영국이 더 이상 세계를 주물럭거리는 강국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뻔하게 보였다.
위신 때문에 식민지를 유지하려 하는 정부, ‘제국’의 영광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국민.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자신들의 세상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끄응….”
그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인의 역할이라지만, 그 짐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빨갱이 딱지가 이미 박혀 버린 월리스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 하든 소련의 사주다, 빨갱이다, 하는 몰이 때문에 도무지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오리까….”
그를 이렇게 남겨 두고 가 버린 루즈벨트가 어쩐지 원망스러워졌다.